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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와 수녀, 일반 시민들이 지난 6월 30일 저녁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주최로 열린 비상 시국미사를 마친뒤 숭례문을 지나 명동으로 행진하고 있다.
 신부와 수녀, 일반 시민들이 지난 6월 30일 저녁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주최로 열린 비상 시국미사를 마친뒤 숭례문을 지나 명동으로 행진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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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일자 <조선일보> 사설 '종교와 정치'을 읽고 종교인(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종교는 종교의 위치에서 발언할 때 더 큰 의미와 무게를 지니는 법"이라며 천주교정의사구현제단과 개신교·불교계의 시국기도회와 시국법회에 대하여 준엄하게 타이르는 듯한 논조의 사설을 보면서 '종교의 위치를 논하기 전에 언론의 위치'를 논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종교와 정치'라는 사설을 통해 <조선일보>는 이번 촛불집회를 폭력불법집회이며, 모든 사안에 대해 양비론으로 재단하며 종교의 권위를 찾는 길은 촛불 정국에서 침묵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종교와 정치' 사설은 왜곡으로 채워져 있다. 너무 기초적인 내용들이라 논할 가치도 없는 것이지만 그 정도가 심해 하나하나 지적해 보려고 한다.

누가 불씨를 되살렸나

'종교와 정치' 사설을 통해 <조선일보>는 "'광우병 대책회의'가 주도하는 불법·폭력 시위가 갈수록 시민의 외면을 받기 시작하자 일부 종교인이 '종교행사'로 그 불씨를 되살리려 대신 나서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촛불집회의 주도세력(?)을 잘못 짚었다. 촛불 주도세력은 광우병대책회의가 아니라 평범한 일반 시민들이요, 더 확대하면 초중고등학생들이다. 80년대와 같이 뚜렷한 조직이 촛불집회를 이끌지 않았다. 그로 인해서 참여하는 시민들의 숫자를 쉽게 가늠하기 어려웠다. 50일 넘게 이어지는 촛불집회에서 이미 국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다 알려주었다.

그렇게 시민들의 의식은 변했고, 시위문화도 변했는데  현 정부는 87년 6월 항쟁 이전으로 돌아간 듯한 진압방식을 택하고 있다. 과연 누가 폭력시위를 부추기고 있는 것인지 <조선일보>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이명박 정권은 촛불집회가 시작된 이후 몇 번 촛불을 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진정성이 의심스러운 두 번의 대통령의 사과와 계속된 말 바꾸기가 상황을 여기까기 몰고 왔다.

종교인들은 사실 촛불을 들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리고 현재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낼 수있는 행동은 역설적으로 촛불을 계속 드는 일이다. 오히려 불씨를 되살리는 세력은 일부 종교인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와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언론이다. 바로 그들에게 '불씨를 되살리는'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1일 저녁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주최한 시국미사가 열리고 있다.
 1일 저녁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주최한 시국미사가 열리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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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종교와 정치' 사설을 통해 유신체제하의 폭압을 일일이 열거하며 '사회의 숨구멍이  막혀버린 시대'였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과연 그 폭압의 시절에 <조선일보>의 논조는 어땠는지 돌아봐야 한다. 과연 <조선일보>에 그 시절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유신시절에 대해 "사회의 숨구멍이 막혀버린 그 시절 종교와 종교인이 나섰다. 종교밖에 나설 곳이 없었고 종교가 나서야 할 때였다"고<조선일보>는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금은 숨쉴 만한 시대이니 자중하라고 타이른다.

그러나 시국 문제에 종교가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숨구멍이 막히기까지 침묵했던 것에 대한 반성이었다. 숨구멍이 막힐 때까지 침묵한 것이 얼마나 큰 죄인 줄을 깨달았기에 종교인들이 나선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지금 숨 쉴만한 시대니 종교인들이 나서는 것은 옳지 않다고 이야기 하지만, 숨을 쉬고 있을 때 제대로 숨을 쉬게 하는 것도 종교인의 역할이다. 숨구멍이 막힐 때야만 종교인이 나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인들 보다 더 정치적인 <조선일보>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물론 종교도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발언은 때와 장소의 논리에 맞는 발언이야 한다"면서 종교인들에게 훈수를 두었다. 이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나 개신교와 불교계의 움직임은 때와 장소조차도 파악하지 못한 행태이며, 이들을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집단으로 몰아가는 표현이다.

하지만 80년대로 회귀한 듯한 현 정국에서 종교인들에게 침묵하라고 강요하는 <조선일보> 사설이 훨씬 더 정치적이다.

한편으로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종교를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집단인 것처럼 매도하면서, 지금 여러 종교가 한 가지 구호, 한 가지 목소리를 외치며 정치의 거리로 들어서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오히려 종교는 '수천 수만 가지의 입장과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으며, 그 다양한 입장 속에서 조정자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천주교, 개신교, 불교계가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왜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종교가 한 목소리를 내는지.

<조선일보>는 "지금은 하나지만 앞으로 어느 날 종교들이 서로 다른 구호, 다른 목소리로 자기 주장만이 옳다고 내세우며 정치의 울타리로 넘어 들어와 종교끼리 충돌한다면 이나라는 어떻게 되겠는가?" 걱정을 하고 있다. 

촛불 집회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종교계를 걱정하는 모습으로 보여지지만 이 역시 유치하다. 위에서 말한대로 어느 입장을 견지하든지 종교가 비정치적일 수 없으며, 끊임없이 타종교 뿐만 아니라 동일한 종교내에서도 다른 입장들이 충돌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정치적인 성향이 달라 충돌하는 것에 대해 지나친 우려도 종교계가 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조선일보>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종교를 제대로 알고 이야기 해라

나는 <조선일보>가 걱정하고 있는 종교의 위치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종교가 마치 정치·외교·경제·사회 문제들을 선과 악으로 이분법적인 재단을 하고 있는 듯이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결론적인 이야기는 양비론으로 넘어간다.

"종교도 정치에 발언을 할 수 있고 때로는 해야 할 때도 있다. 지금 종교와 종교인은 대통령과 정당에는 헌법이 정해준 저마디의 구실을 제대로 해내라고 국민에겐 감정의 열기를 내리고 국민의 건강을 지키면서도 이 위기가 헌정의 위기로 번져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이성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라고 사설을 마무리 한다.

1일 저녁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주최한 시국미사에서 참석자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1일 저녁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주최한 시국미사에서 참석자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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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한 번 묻자.

지금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나 예정되어 있는 개신교와 불교계의 행동이 이성을 상실한  행동인가?  다양한 요구와 다양한 이슈가 들어있는 촛불집회를 누가 이분법적으로 재단하고 있는가? 그것을 단순히 폭력·불법집회라고 규정하고 있는 정부와 <조선일보>, 그대들이야 말로 지독히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조선일보>는 종교의 권위를 걱정하며 점잖게 타이르는 듯, 훈수를 두는 듯 사설을 쓸 일이 아니라 그 펜촉을 자신들의 모순된 논리의 허구를 바로잡는 데 써야 할 것이다.

종교에 대해 훈수를 두려거든 좀 제대로 알고 이야기를 하라. 그게 종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태그:#조선일보, #종교와 정치, #촛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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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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