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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경기도 수원에서 아이셋을 키우면서 사는 30대 중반의 주부입니다. 정치와는 무관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었지요.

이명박 정부가 시작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TV뉴스를 보면서 점점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이건 아닌데"라는 막연한 마음을 갖게 됐습니다. 그렇게 느낄 때쯤 이미 중고생들은 촛불을 들고 모이고 있더군요. 그게 벌써 두 달 전 일입니다. 그 때는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답답함에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현수막을 걸고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의미로 과천 지역에 나붙은  현수막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의미로 과천 지역에 나붙은 현수막
ⓒ 서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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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5월 중순 과천지역에서 "우리 집은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반대합니다"라고 쓰인 현수막을 집집마다, 그리고 아파트 베란다에 걸어놓는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그때 무릎을 탁 치며, 막연한 답답함이 풀릴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친구와 함께 생협에 연락하여 현수막을 구하고, 아는 사람부터 동참하자고 현수막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촛불문화제에 처음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전북 익산에 살면서 지역에서 촛불 집회에 참석하던 친정오빠가 서울에서 열리는 촛불문화제에 한번 참석하자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친정엄마와 오빠, 그리고 저와 아이셋은 서울로 향했습니다. 청계광장에 식구들이 처음 집회에 갔던 그때는 광우병 국민대책위 추산 5만명이 모였던 지난 5월 31일 토요일이었습니다.

그 이후 친정 엄마가 아이들을 대신 봐주시거나 회사에서 퇴근한 남편이 아이들을 봐줄 때 촛불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안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촛불 집회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대통령의 거짓말과 국민을 속이는 정부를 보면서 피곤했지만 매주 주말마다 서울광장에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던 6월 28일, 정부가 "강경진압"을 외치던 그날 드디어 대책위 주관으로 자유발언시간 도중 뒤편에서 소화기를 뿌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행진을 시작하며 앞으로 나아가자 물대포도 쐈습니다. 물대포 쏘는 것을 그때 실제로 처음 보았습니다. 소화기의 뿌연 연기가 올라오고…. 정말 멀리서 봐도 가슴이 떨렸습니다.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친구와 그날 밤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29일 계엄령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그리고 29일 새벽까지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엄청난 폭력과 연행이 이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위험한 현장에 친정오빠가 있었기 때문에 가슴을 졸이며 오빠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다행히 물대포만 맞았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29일 일요일 오후3시 법무부장관 등 관계장관들이 나와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앞으로 더욱 '강경대응' 하겠다고. 제 귀에 그 담화문은 계엄령으로 들렸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연행되어갔습니다.

저희 집은 6대째 내려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입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비상시국을 선포하고 미사를 집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반가와 친정엄마께 알려드렸습니다. 엄마는 너무나 가고 싶어 하셨고, 저 역시 역사적인 현장에 꼭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야말로 장엄한 미사가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일이지만 6월 30일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엄마를 모시고 다시 서울시청 광장으로 갔습니다.

큰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참고로 저희 큰아이는 칠보산자유학교에 다닙니다) 4시 30분이라 늦을 각오를 하고 갔습니다. 도착했더니 이미 미사 시작 시간인 오후 6시를 40분이나 지나있었습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저 수많은 사람들이 묵묵히 앉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스피커차를 막고 있어 못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경찰들이 스피커차를 막아 미사시간이 1시간 30분 늦어졌습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 미사를 순탄하게 시작하게 했다면 쓸데없는 반감은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인국(왼쪽) 신부가 30일 저녁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비상 시국미사에서 서울광장에 천막을 치고 매일 오후 7시에 미사를 열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인국(왼쪽) 신부가 30일 저녁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비상 시국미사에서 서울광장에 천막을 치고 매일 오후 7시에 미사를 열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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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는 저녁 7시 30분에 시작됐습니다. 멀리 있어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신부님 300분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돌아 가운데로 입장하셨습니다. 너무나 감동적인 시작이었습니다. 맨 뒤에 함께 하셨던 스님들도  감동을 더해 주었습니다.

신부님께서 "▲국민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장관 고시 철폐 및 전면 재협상 선언 ▲국민의 소리 청취 ▲보수언론의 왜곡 보도 자제 ▲과잉진압 지시한 어청수 경찰청장 해임 및 연행자와 구속자 전원 석방"을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실때에는 함성과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습니다. 가슴이 후련하고 눈물이 흘렀습니다.

성가와 기도는, 그리고 성서말씀은 지금의 상황을 너무도 잘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성가대신 불렀던 <헌법 제1조> <광야에서> <함께가자 우리 이길을>은 신자와 비신자 모두의 마음을 아우르고 다독여 주는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노래를 시작하기 전 "촛불을 높이들고~~~ 왼손이 힘들면 우리에겐 오른손이 있습니다. 오른손이 힘들면 우리에겐 왼손이 있습니다!!"하신 신부님의 말씀은 즐겁기도 하지만 촛불을 든 손과 손에 엄청난 힘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촛불을 '질기게' 들겠습니다

신부와 수녀, 일반 시민들이 30일 저녁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주최로 열린 비상 시국미사를 마친뒤 사제단을 선두로 가두행진을 시작하고 있다.
 신부와 수녀, 일반 시민들이 30일 저녁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주최로 열린 비상 시국미사를 마친뒤 사제단을 선두로 가두행진을 시작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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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쉽지만 아이들 때문에 미사후 행진을 시작할 때 집에 돌아와야 했습니다. 남대문을 돌면서 행진하고, 차선도 모두 차지하지 않고 차량을 배려하면서 짧은, 그러나 지금까지 촛불행진 중 가장 힘있는 행진을 하고 돌아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들의 자진해산 요청을 받아 시민들이 아쉬워 했지만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오마이뉴스>에 올라온 "따뜻한 어머니 품에 안겨 실컷 운 느낌"의 기사 내용 처럼 국가에 기대했던 위로를 사제단에게 받았습니다. 바쁘고 힘든 일상 중에도 매일매일 촛불을 들고, 혹은 밤을 지새우면서 물대포를 맞았던 분들은 미사 내내 위로를 보내주신 신부님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두달 넘게 끈질기게 걸어온 촛불에 정의로움을 심어주시고, 자부심을 심어주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 분들의 기도가 그날 모인, 그리고 집에서 마음 속으로 촛불을 밝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여 주셨고, "질긴 놈"이 될 수 있는 힘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며 단식하시는 신부님들이 건강하실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신부님들이 저희들을 지켜주신 것처럼 저도 아이들과 가족들, 그리고 제 주변의 이웃들과 함께 '질기게' 촛불을 들렵니다.


태그:#정의구현사제단, #시국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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