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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4년 전, 힘든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첫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다. 당시 뜨거운 여름 훈련을 마치고 이병 계급을 받은 나는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속으로는 어떤 고참들을 만나게 될까 하는 은근한 걱정도 있었다. '그래도 훈련소보다야 낫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첫 자대배치를 받고 선임병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속으로 '으아악, 망했다'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세상에. 온 몸이 근육질로 단련된, 천하장사 이만기씨에 맞먹는 우람한 고참들이 눈앞에 등장한 것이다. 내무실 앞 체력실에서 웃통을 다 벗고 오로지 몸 운동에만 열중하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근육질 고참들 주눅들게 할 비장의 무기는...

길거리에서 만나면 못본 체할 만큼 위압적 인상들. 알고보니 고참들 중 상당수가 대학교에서 럭비·축구 선수였다고 한다.

격한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니 성격도 무서울 것이라고 속으로 걱정을 했다. 그래서일까? 내 머릿속에는 끔찍한 뉴스가 파닥파닥 상상의 나래를 폈다. 선임들한테 폭행을 당한다거나, 언어폭력을 당하는 그런 비극적인 뉴스 말이다. 나는 그 무서운 인상의 고참들이 분명 그런 사람들일 것이라고 오해를 했다.

'에잇, 망했다. 앞으로 어떡하지, 이 곳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까?'

게다가 설상가상. 그런 난감한 상황에 비상상황이 겹쳤다. 밤에 장기자랑을 한다는 것이다. 걱정이 됐다. 톡톡 튀는 장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이 난감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뭔가 해결책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골똘히 생각에 빠진 지 얼마나 지났을까? 머릿속에서 기발한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무서운 고참들을 주눅들게 할 비장의 장기자랑 카드가 생각난 것이다. 덕분에 난 속으로 흐흐흐 웃으며 결전의 시간을 기다렸다.

육군훈련소에 입소한 훈련병들이 교관으로부터 교육내용 전반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육군훈련소에 입소한 훈련병들이 교관으로부터 교육내용 전반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 국방홍보원 국방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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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신병. 장기자랑 뭐할 거니?"

그리고 몇시간 후, 드디어 장기자랑 시간이 왔다. 우락부락한 고참들은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며 뜨거운 눈초리로 날 쳐다보았다.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나서 뭔가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며 고참에게 말했다. 비장의 카드를 말할 차례가 온 것이다.

"우슈 시범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고수의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나의 대답에 고참들 눈이 휘둥그래졌다. 흥미 만점이라는 표정이다. 내무실이 술렁거렸다. 무술 시범을 보인다는 말에 고참들이 눈이 놀란 토끼눈이 돼버린 것이다.

고참들은 진짜 우슈를 할 줄 아냐고 놀란 표정으로 다시 묻는다. 나는 "네"라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이소룡과 이연걸이 "아뵤, 아뵤~" 하는 바로 그것, 견자단과 성룡이 영화계를 주름잡는 바로 그것, 쿵푸를 하겠다고 큰 소리를 뻥뻥 친 것이다.

"우와, 정말? 너 쿵푸 할 줄 안다는 말이야?"
"네… 할 줄(은) 압니다."

하지만 겉모습의 당당함과는 달리 사실 속마음은 울렁거렸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할 줄만 알았기 때문이다. 우슈를 배운 적은 없었다. 그저 무술영화를 보며 자체 연습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속으로는 잔뜩 걱정이 됐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 위안을 했다.

"정무문 보면서 연습했잖아,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난 이연걸 광팬이잖아.'

중고등학교 시절에 집에서 이연걸의 <정무문> <영웅> <탈출>을 보고 혼자서 우슈 연습을 했던 나, 학교에서도 아이들하고 무술놀이를 하면서 놀았다. 게다가 어디 그뿐이랴, 태권도와 유도를 남들보다 더 많이 배웠다는 자신감. 그래서일까? 그 모습만 보여주면 된다는 생각에 조금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잠시후, 결전의 시간이 왔다. 나는  기합을 잔뜩 넣고 왼손으로 오른주먹을 감싸면서 우슈 동작을 시작했다. 뭐, 사실은 태권도 동작에서 몸만 조금 흐느적거린 거였지만 말이다.

"오, 잘하는데?" "오오… 하하하." "와, 진짜 우슈 배웠나 보네?"

그런데 대성공이었다. 반응이 좋았다. 간간히 발차기 섞어 주시고 자체개발 취권·당랑권·원숭이권법, 다 섞어버린 나의 모습에 고참들이 깜짝 놀랐다. 고참들의 눈에는 내 가짜 우슈 시범이 진짜처럼 느껴진 모양이다. 뭐 좋은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박수를 쳐주는 고마운 고참들도 있었다.

잠시 후, 쿵푸 시범은 완벽하게 끝이났다. 종전의 가라앉은 분위기는 온데 간데 없고, 내무실은 웃음 바다가 됐다. 나는 속으로 '휴, 끝났다'를 외치며 일이 다행스럽게 끝났음에 안도했다. 나는 이제 고참들한테 사랑받는 일만 남은 거라고 믿었다.

'휴, 이대로만 끝나면 완벽해.'

그런데 내가 안심하고 있던 그 때, 해피엔딩 결말을 가로막는 비극적 반전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역시 완벽한 거짓말이란 없는 모양이다.  갑자기 상병 계급을 단 고참이 대뜸 일어나더니 말하는 것이다.

"이봐, 우슈는 처음 보네. 간단히 대련 한 번 하자. 나 OO대학교 태권도 선수야."

헉. 오마이갓, 눈앞이 깜깜했다. 대체 이 부대는 어찌 된 것인지 럭비·축구 선수 뿐만이 아니라 태권도 선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 고참은 내가 우슈를 배웠다고 하니까 무도인의 입장에서 대련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중량급인 고참은 진짜 태권도 선수. 몸풀기 겸 앞차기를 하는데 내 머리보다 더 높게 발이 휙휙 올라온다. 다리도 쭉쭉 뻗어진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눈 앞의 고참은 <정무문>의 연걸이 형이 와도 이길 수 없을 듯한 태권도 고수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플라이급인 내가 어떻게 중량급의 진짜 태권도 선수와 대련을 한단 말인가.

'앗, 큰일났다. 난 이제 죽는 건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못하겠다고 말해야 했으나 그 우락부락한 고참들 앞에서 정색을 하고 안 한다고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죽느냐, 망신을 당하느냐 고민 앞에서 최후의 선택을 해야만 했다.

"아, 아… 네. 뭐, 까짓거 한번 해보죠."

영화 속 주인공처럼 고참의 얼굴을 가격한 나...'아뿔싸'. 사진은 <쿵푸 허슬> 장면
 영화 속 주인공처럼 고참의 얼굴을 가격한 나...'아뿔싸'. 사진은 <쿵푸 허슬> 장면
ⓒ (주)콜럼비아 트라이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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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 한 번 하자. 나 태권도 선수야"

현실을 외면한 나의 무모함에 결국 비극적인 대련이 시작되고 말았다. 그런데  태권도 선수 출신의 그 고참, 몇 번 발차기를 하더니 내 전투력(?)을 안 모양이었다. 설렁설렁 대련을 하는 것이다. 마치 품세 연습을 하듯 말이다. 내가 다칠까봐 신경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 모습에 한편으론 안도하면서도 괜히 오기가 났다. 평화에 도취한 내가 오버를 하고 만 것이다.

'에이… 뭐야? 시시한데, 내가 분위기 좀 띄워볼까?'

이 썰렁한 분위기를 띄워야겠다는 일념에 나는 멋진 동작을 연출하려고 했다. 내무실 아래 신발칸을 밟고 뛰어올라 고참에게 날라차기를 해버린 것이다. 마치 영화 <정무문>의 한 장면처럼. 그런데 오마이갓.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 발차기가 고참 얼굴을 휙 스쳐간 것이다. 그 발차기에 깜짝 놀란 고참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순간 나는 빙하기를 맞이한 생물처럼 얼어버렸다. 신병 주제에 감히 고참의 얼굴에 발길질을 한 것이다. 그것도 태권도 선수인 고참한테 말이다.

고참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져 있었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조금 전의 배려는 온데간데 없어졌다. 설렁설렁했던 발차기는 점차 날카로워졌다. 몇 번 막는데 팔이 화끈 거릴 정도로 아팠다. 너무 아파 눈물이 찔금 나올 정도였다.

무서운 마음에 이 대련이 얼른 끝났으면 하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그런 바람을 와장창 깨버린 고참의 분노의 뒤차기가 내게로 날아왔다. 초음속 미사일보다도 빠른 그 발차기를 난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문득 아테네올림픽 때 문대성 선수의 발차기를 맞아 쓰러진 상대편 그리스 선수가 떠올랐다. 아아, 날라오는 발차기를 보며 나도 그런 운명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번개처럼 스쳐지나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으악.'

그런데 눈을 감은지, 1초·2초….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이상하게도 별 일이 없었다. 나는 아직 살아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인가? 슬며시 눈을 떴다.그제서야 고참의 발차기가 내 얼굴이 아닌 내 머리카락 위를 스치고 지나갔단 사실을 알았다. 아.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몸이 얼어붙은 채 고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고참이 갑자기 활짝 웃는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된다. 고참이 잘못 발차기를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다칠까봐 일부러 발을 올려 차 준 것이었다. 역시 진짜 고수는 달랐다.

"대련 잘했다. 우슈 고수. 더 하면 다치겠다. 여기까지 하자."

우락부락 선배들과 편안히 보낸 군생활

그렇게 내 오버로 야기된 고참과의 대련은 죽을 위기(?)를 넘긴 채 끝이 났다. 좌충우돌인 나의 신병 신고식도 막을 내리고 있었다. '장난이라도 오버하면 안 된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은 채 말이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우락부락해서 두렵기까지 했던 고참들은 알고보니 정말 천사같은 사람들이었다. 폭력은커녕, 욕조차 하지 않는 순박한 운동선수들이었던 것이다. 내가 처음에 그들을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오해한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사실 문제아는 나였다. 군복무 시절 엽기적인 사고(?)를 참 많이 쳤다. 기사 쓰려다가 부대원들 전체 특박을 잘리게 만든 적도 있었고, 보초 서며 졸다가 같은 장교한테 연속으로 걸린 적도 있었다. 온갖 욕을 다 먹어도 부족했을 상황에서 그 우락부락 고참들은 꾸중대신 착한 마음씨로 위로를 해주었다. 그런 고맙고 멋진 사람들 곁에서 나는 정말 편하게 군생활을 했던 것 같다.

군대 시절 찍은 사진이 별로 없는데, 그 중 하나. 엄지 치켜든 고참 옆에 있는게 저랍니다.
 군대 시절 찍은 사진이 별로 없는데, 그 중 하나. 엄지 치켜든 고참 옆에 있는게 저랍니다.
ⓒ 곽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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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친구들을 만나 군대 이야기를 할 때면 친구들은 "너는 정말 군생활을 편하게 한 거야"라고 말을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오늘 기사를 쓰며 문득 잊고 있던 그 고참들의 순박한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내게 장난스레 건네주던 별명 '우슈 고수'라는 별명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우슈 고수' 거짓말이 만들어낸 부끄러운 이름이지만 왠지 나쁜 느낌이 아니다. 어설펐던 나의 군대 생활이 그대로 묻어있는 추억의 이름이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잊을 수 없는 거짓말> 응모합니다



태그:#우슈, #쿵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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