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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 취재원의 관계를 말할 때 '불가근 불가원'이란 말을 자주 쓴 때가 있었다. 너무 가깝지도 말고, 또 너무 멀어져서도 안된다는 이야기다.

기자는 아무리 보기 싫은 취재원이라도 멀리 할 수가 없다. 그것이 기자의 숙명이다. 기자는 또 아무리 가까운 취재원이라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기자와 취재원의 너무 가까운 밀착은 유착으로 이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취재 보도에 필요한 최소한의 '객관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불가근 불가원'이란 말처럼 기자가 취재원의 관계에서 기자가 취해야 할 '금도'를 잘 표현한 말도 없다.

해외 특파원들의 칼럼은 그런 점에서 여유로운 글들이 많다. 해외에 나가 있는 특파원들은 비교적 거리를 두고 한국 사정을 살펴볼 수 있는 여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지리적인 거리감은 국내에 있을 때와는 달리 해당 언론사의 숨막히는 분위기에서도 조금은 벗어난 홀가분한 시각과 여유를 주는 듯도 하다.

그래서일까. <조선일보> 해외 특파원의 글이지만, <조선일보> '특파원칼럼'은 <조선일보>의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차분한 칼럼을 읽어볼 수 있는 재미가 종종 있다. 아무리 해외에 나가 있다한들 <조선일보>에서 아주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색깔 빠진 '특파원칼럼'은 여러 모로 유용하고, 신선한 시각을 전달하는 경우가 꽤 있다.

비근한 사례로는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이 전당대회를 각각 취약한 지역에서 연 것이 한국 정치에 시사하는 바를 제시한 이하원 워싱턴 특파원 칼럼('적진에서 열린 미 전당대회', 9월 5일자) ▲촛불집회가 한창 불붙기 시작하던 때 각기 맛과 안전을 이유로 미국산 쇠고기와 호주산 쇠고기 사용을 고집하고 있는 대표적인 외국산 규동(쇠고기덮밥) 체인 기업 두 곳이 호각지세를 이루고 있는 점을 예시하면서 쇠고기 유통시스템에 대한 신뢰 부재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더 증폭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리 안의 신뢰의 문제'를 짚은 선우정 도쿄특파원 칼럼('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 5월 20일자)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아래 *주 참고)

태국 소요사태와 한국 촛불집회에 '이중잣대'

외신은 쿠데타와 같은 엄중한 상황에서도 평화로운 모습을 전하기도 한다. 사진은 지난 2006년 9월 19일 태국 쿠데타 다음날 젊은 태국군인 한 명이 탱크 위에서 조간신문을 유심히 읽고 있는 모습.
 외신은 쿠데타와 같은 엄중한 상황에서도 평화로운 모습을 전하기도 한다. 사진은 지난 2006년 9월 19일 태국 쿠데타 다음날 젊은 태국군인 한 명이 탱크 위에서 조간신문을 유심히 읽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 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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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8일자 <조선일보> '특파원칼럼'은 그러나 해외특파원의 시각에서 '역지사지'의 시각을 가져보자는 취지의 칼럼이지만, 그 방향은 되레 정반대다.

이항수 특파원의 칼럼은 최근 태국 사태와 관련해 한국정부가 취한 '여행자제국' 선포 조치에 대해 태국 왕실이 불편한 심기를 표출했다는 기사 내용을 화두로 삼았다. 지난 5·6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촛불집회가 열렸던 한국이 이런 조치를 취한 것에 대해 태국 왕실이 섭섭함을 표현할 만도 하다는 취지를 배경에 깔고 있는 칼럼이다.

그런데 칼럼의 내용은 국내 촛불집회와 태국 소요사태에 대해 이중적 잣대를 적용하면서 헷갈린다. 태국 소요 사태에 대해서는 "지난 2주 사이에 지방 공항 3곳이 잠시 폐쇄되기도 했지만, 한밤의 집회장 근처를 제외하고는 방콕과 태국은 조용하다"며 "이제는 태국의 여행 경고 수준을 낮춰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푸미폰 현 국왕이 재임한 62년 동안 19번이나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지만, 큰 불상사가 없었"으며 "지난 2일 비상사태 선포로 군대까지 출동했지만 큰 불상사는 없다"는 점 등을 들기도 했다. 친절하게 '현 상황을 일상적인 정치상황으로 이해한다'(59%)거나 '태국은 위험하지 않다'(73%)는 외국인 관객들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까지 소개했다.

맞는 말이다. 한국 외교통상부의 '여행자제' 조치는 너무 안이한 조치일 수 있다. 한국과 태국과의 국가 관계에서도 그렇지만, 자국인의 해외여행 자제 조치가 '해외여행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도 너무 행정편의적인 조치라는 지적도 나올 수 있다.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조치들에 대해 이 정부가 너무 둔감한 탓도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이항수 특파원이 태국의 사태에 대해서는 이처럼 '우호적'이면서도 촛불집회에 대해서는 해외에 과격한 장면들만 부각됐다는 점에서 "한국의 시위 문화는 당장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다.

이항수 특파원은 '복면한 시위대가 경찰에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장면', '부상당한 시위대와 경찰들의 모습들', '경찰의 물대포 발사 장면', '광화문 대로를 버스로 막은 바리케이드', '불타는 버스' 등의 장면만 해외 언론을 통해 투사된 '촛불집회'의 '단골장면'들이었다면서 "시위대와 경찰의 부상을 위해서라도, 나라의 위신과 장래를 생각해서라도 한국의 시위 문화는 당장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이항수 특파원이지만 태국의 소요사태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입장을 피력했다. 이항수 특파원은 "외신을 통해 전달되는 태국 소식은 시위대끼리의 한밤 난투극 장면과 시위대가 칼과 쇠막대 등으로 무장한 장면, 복면 시위대가 부상자를 나르는 장면 등 보다 극적인 모습"들이라며 "총리 공관 앞마당의 '총리 즉각 퇴진' 구호도 난무하지만 노래와 웃음이 공존하는 축제 분위기에서 진행되고 집회장 바깥의 가로 세로 1~2㎞의 '해방구' 안쪽에서는 수천 명의 시위대가 해먹이나 천막 아래서 낮잠을 잔다"며 평화로운 모습을 강조했다. 그 뿐만 아니다. "이러니, 많은 태국 사람들이 실상을 호도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까지 했다.

바꿔야 할 것은 '시위문화'가 아니라 '시위진압문화'

지난 6월 25일 오후 미국산쇠고기 수입위생조건 장관고시에 반대하며 청와대 입구 경복궁역 부근에서 주부들이 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경찰이 방패로 유모차앞을 가로막고 있다.
 지난 6월 25일 오후 미국산쇠고기 수입위생조건 장관고시에 반대하며 청와대 입구 경복궁역 부근에서 주부들이 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경찰이 방패로 유모차앞을 가로막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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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가 뒤죽박죽이다. 태국의 사태를 그렇게 본다면 한국의 촛불집회는 얼마나 평화로웠던가. 수차례나 백만명 가까운 인파가 모이고서도, 큰 불상사 없이 평화로운 집회를 끌어간 것은 누구였던가. 태국의 소요사태에는 분명한 지도부가 있지만, 촛불집회는 변변한 지도부라고 할 것도 없지 않았던가.

그런 촛불집회였음에도 마치 '계엄령'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던 것은 누구였던가. 만약 촛불 시위대가 정부청사나 청와대를 지금 태국 시위대처럼 사실상 점거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런데도 태국의 소요 사태에 대해서는 평화로운 시위대의 모습을 부각시키면서, 왜 그런 평화적 분위기가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한국의 시위문화만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태국 소요 사태에는 집권 세력에 대한 국왕과 군부의 부정적인 입장이 반영된, 매우 복잡한 정치적 역학관계가 작용하고 있는 것임에 분명하지만,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표출된 민의를 경찰력이나 군을 동원해 원천 봉쇄하거나 짓밟지 않고 있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그런 앞뒤 맥락을 고려하자면, 태국 시위 사태에 빗대어 굳이 한국의 시위문화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바뀌어야 할 것은 한국의 '시위문화'가 아니라 '시위 진압문화'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이항수 특파원이 칼럼에서 밝힌 것처럼 그가 홍콩 특파원으로 부임한 것은 지난 4월이다. 아직 한국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그의 '특파원칼럼'에서는 아직 특파원의 체취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 *주: 쇠고기 유통 시스템의 신뢰도를 높인다면 수입 쇠고기에 대한 불안을 어느 정도는 불식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불안과 불신의 요소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 아니겠느냐는 자성적 성찰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선우 정 도쿄 특파원의 이 칼럼 내용은 그러나 촛불 여론으로 정부가 위기에 몰리자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들에 의해 이른바 '쇠고기 원산지 표시제'가 문제의 해법인 것처럼 여론을 조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활용'됐다.

<조선일보>는 '쇠고기 원산지 표시제'를 전면 도입해 소비자들에게 그 선택권을 주는 방안을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의 대책으로 제시했으며, 정부도 7월부터 쇠고기 원산지 표시제를 전면 확대 실시했다. <조선일보>는 촛불 국면에서 쇠고기 원산지 표시제의 전면 도입과 철저한 시행을 거듭 강조했지만, 정작 쇠고기 원산지 표시제 도입 이후에는 전면 도입 및 시행에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많다는 기사를 한두 번 게재한 이후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다. 독자들에 대한 명백한 약속 위반이다.



태그:#조선일보, #촛불집회, #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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