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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이란 팀이 있다. 지난 1993년 창단해 1995년 3월 1일 처음 그라운드에 나섰다. 이 팀 선수들은 다른 팀과 달랐다. 24시간 내내 그라운드를 지켜야 했고, 또한 태생적으로 '공정성', '공영성', '다양성'을 추구하는 플레이가 요구됐다.

 

이 팀은 '구단주'가 없다. 아니 있다. 주식 대부분을 공기업이 갖고 있으니 엄밀히 말하면 국민이 '구단주'다.

 

이 팀은 창단 그 해부터 '4강'에 들기 시작하는 등 출발이 좋았다. 신생팀이니만큼 열심히 뛰었다. 그러나 역시 IMF를 비켜가지 못했다. 다른 팀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팀은 더욱 깊은 시련을 겪었다. 6개월 동안 월급이 한 푼도 나오지 않아 헌 운동복을 입고 뛰어야 했다. 고난의 시절이었다.

 

팀은 나라에 세금도 못 냈다. 그래도 선수들은 악착같이 뛰었다. 한 선수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무척 힘들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는데 6개월이나 월급이 안 나오니 당장 생활이 막막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럴수록 '팀'이 우선이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사원들이  회사를 먼저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가장 힘든 상황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기였다."

 

선수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다행히 팀이 살아났다. 이는 아직까지도 이 팀의 자랑이다. 함께 고난을 헤쳤기 때문에 팀워크는 더욱 끈끈해졌다. 13년차 한 선수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어려웠던 시절을 헤쳐 나오고 회사가 정상화되면서 분위기가 많이 '업'됐다. 다른 어느 '팀'보다도 분위기가 좋았고 자신감이 생겼다. 여태까지 YTN을 끌고 온 힘이라고 자신할 수 있다."

 

지금도 이 팀 홈페이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YTN10년사'만 봐도 이들이 그 시절 얼마나 똘똘 뭉쳐 어려움을 이겨왔는지, 그래서 얼마나 자랑거리로 여기는지 잘 느낄 수 있다.

 

고사 직전의 팀이 되살아나자 선수들은 더욱 힘을 냈다. 더 열심히 뛰었다.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더해진 끝에, 멋진 '골'을 넣기 시작했다. 2003년부터 '세트 플레이'로 인한 골이 터졌다. 노종면 선수가 처음 고안한 <돌발영상>이란 골이 터지기 시작하더니 이에 환호하는 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임장혁 선수 역시 안정적으로 이 세트플레이를 이어갔다.

 

4월부터 시작된 새 단장에 대한 불길한 소문

 

 

그런데 2008년 4월, 다시 이 팀에 불길한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 단장으로 구본홍씨가 온다더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물론 선수 출신 단장이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라운드를 완전히 떠나 대통령 방송특보를 지낸 사람이다.

 

선수들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정치권에 몸을 담갔던 단장이 선수들의 창의적인 플레이에 개입할 여지가 충분하고 대통령이 좋아하는 플레이만 강요할 것이 뻔하다는 이유였다. 감독과 코치들이 단장의 눈치만 보다가 팀을 엉망으로 만들 것이라는 우려였다.

 

그런데 2008년 5월에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5월 29일 YTN 이사회는 구본홍씨를 단장으로 내정했다. 장소까지 긴급 변경하면서 말이다. 그라운드를 누비던 선수들이 하프타임 때마다 모여 술렁대기 시작했다. 일부 선수들은 바쁜 틈을 쪼개 성명을 발표했고  당시 '주장'(노조위원장)이었던 현덕수 선수는 7월초 단식에 들어갔다.

 

그리고 7월 17일, YTN팀 주주총회가 열렸다. 그런데 30초 만에 구본홍 '단장' 선임 안건이 통과되어 버린 것이다. 선수들의 충격은 컸다. 주주총회장에서 한때 자기들을 가르쳤던 '코치'들에게 항의했지만 그들은 들은 척도 안 했다. 많은 선수들이 처음 눈물을 흘렸다.

 

바로 다음날부터 선수들은 '구본홍 단장 출근 저지 투쟁'에 돌입했다. 일부 선수들이 구단장 신임 찬반투표를 제안했으나 훨씬 많은 선수들이 이에 반대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8월 5일 다른 나라 선수들까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국제기자연맹(IFJ) 사무총장까지 나서 '한국 YTN팀의 플레이를 장악하려 하지 마라'고 경고했다.

 

8월 12일, YTN '세트플레이' 창시자 노종면 선수가 새 주장으로 뽑혔다. 14일과 18일에는 노사가 만나 대화를 시도했으나 결렬되었다.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8월 29일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 "YTN의 공기업 지분을 매각할 수 있다"고 발언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선수들의 화를 돋웠다. 그라운드에서 열심히 뛰던 선수들의 집중력이 조금씩 흐트러지면서 회사 문제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신재민 차관의 지분 매각 발언이 전해지면서 '아, 지금 상황이 뜻밖에 커질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정부가 맘먹고 YTN을 주무르려면 진짜 그렇게 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6년차 기자)

 

그라운드에서 투쟁하는 선수, 더욱 멀어지는 단장

 

 

하지만 선수들은 그라운드를 떠나지 않았다. 묵묵히 플레이를 펼쳤다. 단장은 여러 경로를 통해 "팀 경영에만 신경 쓰고 선수들 플레이는 노 터치 할 것"이라고 강변했지만 선수들은 믿기 어려웠다. 누구도 의식하지 않는 플레이를 펼치고 싶었고, 명예롭게 지켜온 팀 컬러에 또렷한 정치색이 남는 게 싫었다.

 

그러다 9월 1일 노종면 주장이 다른 선수들에게 의견을 묻는 절차를 밟았다.

 

"우리가 잠시 그라운드에서 떠날 수도 있음을 경고하자."

 

총파업 투표 실시 결정. 총파업은 76.4%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급기야 구본홍 단장은 선수 12명을 두 번(9월 9일, 12일)에 나누어 고소했고, 12명의 선수들은 9월 25일 남대문경찰서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9월 16일에는 그라운드 위에서 투쟁을 펼쳤다. 노종면 주장과 일부 선수들이 YTN 생방송 도중 피켓시위를 노출시킨 것이었다. 그래도 구 단장이 꿈쩍 않자 9월 29일에는 젊은 선수들이 나섰다. 회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무기한 릴레이 단식농성에 들어간 것이다. 두 명의 선수가 쓰러져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젊은 선수들은 특히 침묵하고 있는 고참 선수들을 비판했다.

 

"줄서기에 눈이 먼 일부 간부들은 구씨를 부추겨 후배들을 고소하고 징계하도록 하는 등 극도로 파렴치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스스로 인사위원을 자청해 직접 구씨를 위해 징계라는 칼로 후배들을 협박하는 짓에 앞장서고 있다"(YTN '젊은 사원들의 모임' 기자회견문)

 

"기자회견을 하는 이 자리에 최소한 부팀장 선배 몇 분이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기자라는 게 뭔지 모를 때, 걸음마부터 시작해 공정방송과 기자정신을 가르쳐준 선배들이 계속 침묵하고 있다. YTN과 후배들을 사랑한다면 그 침묵을 깨 달라."(기자협회의 한 간부)

 

그러나 구 단장은 점점 더 선수들과 멀어지고 있었다. 10월 6일, 단장은 노종면 주장, 현덕수 전 주장, 우장균 선수를 포함한 6명에게 '방출'을 통보했다. 다른 6명의 선수에게는 그라운드에서 몇 달간 빠지라고 명령했으며, 8명의 선수에게는 감봉, 13명의 선수에게는 노란 경고카드를 꺼내 들었다. 선수들은 이날 한번 더 울었다.

 

"징계는 예상했지만 그처럼 대량 징계를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특히 해고당한 사람, 정직당한 사람들이 모두 회사 안팎에서 인정받던 기자들이었다. 사원들이 구본홍 사장에게 완전히 문을 닫게 된 계기였다. 정말 자질없고 자격없는 사람인 것이 이 날 드러난 것이다."(12년차 기자)

 

앵커 선수들이 먼저 나섰다. 10월 8일 검은 유니폼을 입고 뛰기 시작했다. 이른바 '블랙투쟁.' YTN팀의 세트 플레이 중 가장 골 결정력이 높았던 <돌발영상>은 결국 지난 10월 7일 이후 볼 수가 없게 됐다. 매일 이 플레이만 연구하던 임장혁 선수 등 2명 중징계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였다.

 

"<돌발영상> 프로그램이란 게 그냥 아무나 인사발령나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노하우와 테크닉 등을 위한 준비기간이 길어야 하고 공동작업으로 호흡을 잘 맞추지 않으면 매일 뽑아내기가 힘들다. 그런데 3명의 PD중 2명을 해고·정직 처분했다. 사측은 <돌발영상> 대비책도 전혀 내놓지 않은 상태였다. <돌발영상>의 회사 기여도가 얼마나 높은지는 사측이 더 잘 알 것이다."(임장혁 <돌발영상> PD)

 

10월 25일, 단장 출근저지를 펼친 지 100일

 

 

이렇게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열심히 뛰는 한편으로 회사 앞에서 구 단장 출근저지를 펼친 지 10월 25일로 100일을 맞는다. 연차가 높지 않은 선수들은 새벽에 그라운드를 한번 뛰고 집회에 참가했다가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구 단장은 '10분 출근투쟁'을 벌이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엔 이곳저곳에서 몰래 회의를 하고 있다.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고 작전을 짜야할 일부 감독·코치들은 구 단장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선수들은 외롭지 않다. 우선 지난주부터 다른 팀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격려하고 있다. 노종면 주장은 늘 새로운 방식의 투쟁에 앞장서며 선수들의 결속을 다지고 있다. 김밥과 생수로 시작하는 아침… 서로를 챙기주며 100일을 왔다.

 

선수들은 무엇보다 지난 100일간 그라운드에서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예전처럼 눈빛을 맞추며 선후배들과 함께 뛰고 싶은 욕구, 또 다른 세트 플레이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유일한 소망이라고 했다.

 

한 선수는 이렇게 말했다. 

 

"몸은 늘 지쳐있다. 물론 힘들 때도 많았다. 하지만 한 번도 마크해야 하는 현장을 놓친 적이 없다. YTN만의 '동지애'가 있다. 앞으로도 계속 할 것이다. 200일·1000일이 되더라도 할 것이다. 빨리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 새벽부터 취재 계획을 세워도 모자랄 판인데 한 사람 때문에 YTN 전체가 힘들어지고 있다."

 

24일 아침에도 구 단장을 회사 앞에서 막은 선수들은 오전 9시 30분 무렵 모두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갔다. 또 열심히 뛰다가 오늘은 오후 6시 프레스센터에 다시 모여야 한다. 

 

이들은 지난 100일 싸움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확인서'(YTN 노조 안종필 언론상 수상)를  받은 뒤, '구본홍 출근저지 100일'로 넘어가는 내일 새벽까지 YTN 앞에서 열릴 문화제에 참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태그:#YTN, #구본홍, #노종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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