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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성삼재쪽으로 향하는 이원규 시인
 지리산을 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성삼재쪽으로 향하는 이원규 시인
ⓒ 성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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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중천에 뜬 시각, 산속 집에서 느지막이 일어난 시인은 복장을 갖추더니 애마에 올라타고 있었다. 갑옷을 걸친 장수의 모습으로 오토바이 안장에 걸터앉은 그는 두 손으로 시동을 걸었고, 잠시 뒤 애마는 우렁찬 함성을 질러 댔다. 그리고는 이내 바람을 가르며 쏜살같이 달아나 멀찍이 한 점이 되어 사라져 갔다. 시인은 지리산 실상사에서 열리는 문화제에 가는 것이라 했다.

다음날(10월 26일), 오체투지의 회향 행사가 있던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 시인은 그 자리에도 모습을 나타냈다. 오체투지가 처음 노고단에서 출발할 때 시낭송으로 마음을 담았던 그가 회향 행사에 나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지리산에서 계룡산으로 옮겨온 시인은 마이크를 잡고 중악단에 들어서는 오체투지 순례를 맞이하는 중이었다.

고행의 길에 나선 신부님과 스님을 마중하는 그의 마음은 왠지 특별해 보였다. 왜냐하면 회향 행사는 오체투지의 끝이 아닌 잠시 휴식을 의미하는 시간이어서다. 봄이 오면 다시 출발하게 될 것이고, 그 순간 시인이 지금처럼 마중자의 위치로만 있게 될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인 듯했다. 시인은 이어질 오체투지에서 자신도 땅바닥에 던져야 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10여 년 전 지리산 자락에 들어와 자연 속에 유유자적하며 시를 쓰던 시인도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에 내내 마음이 쓰이고 있었다. 가만히 있자니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만드는 세상. 나서자니 오십을 앞둔 나이에 드는 고민. 산속에 은거하려는 그를 끊임없이 불러내는 세상에 시인의 고민은 깊어만 지고 있었다.

땅바닥에 엎드려야 하는가... 시인은 고민 중

[피아산방] 전남 구례군 토지면 구산리 산 중턱에 오롯이 한 채 있는 집. 사람들은 그곳을 피아산방이라 부른다. '너와 나의 경계가 없다'라는 뜻으로 시인 이원규는 지리산에 내려와 자신이 사는 집을 그리 부르고 있었다. 그 이름대로 언제나 사람들로 넘쳐나는 피아산방은 그 벗들이 즐겨 찾는 사랑방이자 오가는 사람들의 여인숙 역할을 하는 독특한 곳이기도 하다. 밤새 통음하며 세상을 향한 담론을 형성하기도 하는 곳이다.

이전에는 '피아산방'이란 글씨가 큼지막하게 새겨진 북이 집 앞에 문패 대신 내걸리기도 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시인의 집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월의 흐름에 닳아진 북이 얼마 전 문패의 역할을 마치고 은퇴하면서, 지금은 처마 밑 풍경 소리만이 은은히 바람의 지나침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시인은 자신의 책에서 피아산방을 이렇게 자랑한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뻗어 내린 능선이 섬진강으로 흐르는데 그 능선 아래 문수골이 있습니다. 문수골의 서쪽은 화엄사골이고 동쪽은 피아골이지요. 지리산의 수많은 골짜기 중에서 가장 맑은 물이 흐르는 문수골 입구의 왕시루봉 자락에 나의 거처인 외딴집 피아산방이 있습니다. 창문 열고 내다보면 오래 묵은 다랑이 논 바로 아래 깊고 푸른 못 문수제가 있고, 그 아래 구례군 토지평야와 섬진강이 멀리 내려다보입니다."

"산중의 외딴집에 살다보니 대문이 필요 없습니다. 훔쳐갈 게 없으니 아예 자물쇠도 필요 없지요. 지리산에 스며들어 살면서도 도시처럼 잠금장치를 한다는데 참으로 우스워 나날이 그야말로 열린 집입니다. 비록 빌린 집이기는 하지만 사시사철 너와 나의 경계가 없다는 뜻의 피아산방 글씨가 적힌 북 하나를 걸어두고 삽니다. 잘 아는 후배들이나 산꾼들이 지나다가 내가 있건 없건 차를 마시고 잠을 자고 가기도 하지요."

- <지리산편지> 중

문수골 산중턱에 자리잡은 외딴집. 이원규 시인이 사는 곳이다.
▲ 피아산방 문수골 산중턱에 자리잡은 외딴집. 이원규 시인이 사는 곳이다.
ⓒ 성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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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저녁 피아산방에서 밤새 술잔을 기울이던 시인은 큰 결심을 앞두고 있는 표정이었다. 시인의 안사람은 "이 사람이 내년에 일 저지르려 한다"며 그의 결단을 암시하고 있었다. 가급적 나서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내심 시인의 고민을 이해하는 듯했다. 그가 결심한다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함을 알고 있는 분위기였다.

"(주가가) 930까지 내려 갔더만" 하고 씁쓰레 웃던 시인은 "국감장에서 유인촌 장관이 막말 삿대질 한 것이 방금 방송에 나오더라"며 거꾸로 가는 세상이 불쾌한 듯 조소하는 모습이었다. 좌중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한 번씩 꺼내던 육담도 잘 내놓지 않을 만큼 거꾸로 가는 세상사에 그는 많이 불편해하고 있었다.

산속에 살며 문학을 가르치기에 몰두하려는 시인을 세상이 끊임없이 흔들어 대고 있었던 것이다. 

분단의 역사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빨치산의 아들] 구례 문수골의 피아산방에서 만난 시인 이원규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80년 10·27법난 때 산속에서 붙잡혀 내려왔으며, 광부 일을 하며 막장 인생을 거쳤고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었다.

90년대 초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남한사회주의노동자 동맹(사노맹)'의 기관지 <노동해방문학>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가까운 지인들만이 알고 있는 시인의 주요 이력이다. 당시 그는 노동문학사에서 일하며 투쟁시를 썼고, <노동해방문학>을 편집했다.

한편으로 시인은 분단의 역사에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산사람이라 불리던 빨치산이었다. 남편이 살아 있음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탓에 그의 어머니는 그래서 시인을 뱄을 때 괜한 오해를 받았다고 한다.

시인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어릴 적 수염 가득한 얼굴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잠깐의 기억'뿐.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기억만이 가득할 뿐이지만, 그러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아버지의 영향은 지금도 시인에게 남아있다. 그가 빨치산의 주 무대였던 지리산에 자리를 튼 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다. 

그가 펴낸 첫 시집은 <빨치산의 편지>였다. 그의 시 곳곳에서 빨치산의 흔적에 자주 눈에 띄는 이유였다.

홀로 지리산 빗점골 / 빨치산 루트를 따라 오르다 / 무성무성 웃자란 쑥무덤에 합장을 한다 // 뉘신가 나보다 먼저 가시었네 / 이미 오래전에 한 무더기 똥을 싸 놓고 지나가시었네 // 고마워라, 당신의 똥 자리 / 쑥쑥 무성하다니! // 산짐승이든 빨치산이든 / 누군가는 꼭 죽어야만 가능한 일이었지요.                                                        - '쑥무덤' 전문

시와 산문에 담은 살아온 이야기

올 초 펴낸 이원규 시인의 시집 <강물도 목이 마르다>와 <지리산편지>
 올 초 펴낸 이원규 시인의 시집 <강물도 목이 마르다>와 <지리산편지>
ⓒ 실천문학/대교북스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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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도 목이 마르다'와 '지리산편지'] 올해 초 그는 4년 만에 두 권의 글을 묶어냈다. 산문집 <지리산편지>와 시집 <강물도 목이 마르다>가 그것이다. 시인의 작품을 들여다 보면 사실 거반이 자신의 이야기들이다. 이원규의 옛 과거와 지리산에서의 현재, 그리고 미래의 결의를 작품 속에서 엿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가 않다.

생과부 울 엄니 나를 낳자마자
탯줄로 짠 그물로 네평 점방을 차렸다.
막걸리 국수 오징어 양초 포도 감기약
하내리 구랑리의 만물 백화점
아직 젊은 마흔살 암거미의 집이었다.
처마 끝 외줄을 타고 날아간
유사비행의 좌파 아버지 거미에게는
집이 곧 덫이요 무덤이요 감옥이지만
서방도 없이 새끼를 낳은 화냥년
똥물을 뒤집어쓰면서도 차마
씨를 발설할 수 없는 무당거미의 집이었다.
밤마다 소복을 입고 정화수
맑은 물방울을 거미줄에 매달며
남몰래 첫사랑의 천적 지아비를 기다리던
무당거미 울엄니…
- <강물도 목이 마르다> '천적' 중

지리산 가을 들녘은 지금 농부들의 막바지 수확의 손길로 분주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단풍나무며 붉나무며 온 산을 물들이는 노랗고 붉은 기운에 넋을 빼앗기지만 사실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단풍의 기운은 황금빛 들녘입니다. 아니 그보다 아름다운 단풍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일용할 양식을 꿈꾸며 온몸을 던지는 농부들의 구릿빛 근육입니다.
- <지리산편지> '황금빛 들녘이 부릅니다' 중

날마다 먼 길을 걷고 걸어 그대에게 갑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민족의 젖줄 낙동강 1천 3백리를 걷고 또 지리산 둘레 850리를 두 번 그리고 제주도와 경상남도 내륙과 한강 남한강 영산강 금강 등 어언 2만 리 길을 훨씬 넘게 걸어 그대에게 가고 또 가지만 이 길은 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어느새 내 몸과 마음속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지요.
- <지리산편지> '발로 쓴 편지를 보냅니다' 중

지리산은 그에게 새로운 삶을 안겨준 동시에 환경과 생명의 중요성을 알게 해 준 곳이라고 한다. 야생마처럼 지리산 주위를 맴돌던 시절 '지리산 살리기 국민행동'(현 지리산생명연대 전신)의 사무처장을 맡으면서, 그리고 낙동강 걷기 순례와 지리산 순례를 통해서 생명 평화의 소중함을 더 깊이 깨닫게 됐다는 것이다.

이 흐름은 2003년 탁발순례에 이어졌고, 올해 초 운하반대 생명의 강 순례에 그는 맨 앞에 서 있었다. 따라서, 오체투지를 고민하는 것은 시인에게 있어 당연한 선택인지도 모른다. 치열했던 역사의 삶속에 그는 언제나 최전선에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바뀌는 순간 어머니가 나를 놔 주셨다

오체투지 회향식이 열린 26일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에서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시인의 모습
▲ 이원규 오체투지 회향식이 열린 26일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에서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시인의 모습
ⓒ 성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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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전사] 90년대 초반 그는 <노동해방문학>의 문예 전사로서 결연한 투쟁의 시를 격한 감정을 실어 써 내려 갔던 때가 있었다.

마침내 피의 깃발이 올랐다
붉은 피 뚜욱뚝 흐르는 전선의 깃발이 올랐다
너무도 오랜 역사의 무덤을 뚫고
죽창으로 일어서는 전노협의 깃발
'노동해방'의 깃발이 올랐다
(중략)
45년 해방의 깃발
노동조합 전국평의회의 깃발이 솟구치고
우청찬 만세삼창의 함성으로
해방조국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조선의 혁명계급은 진정 누구인가?
동지들이여, 착취계급의 사슬을 벗어 제치고
단결하라, 단결하라!
(중략)
- <노동해방문학> '전선의 깃발' 중

공안정국의 회오리 속에 사노맹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또한 위험한 순간이었지만 가명이나 필명이 아닌 본명을 쓰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광풍의 회오리 속에 잠시 비켜설 수 있었다고 한다. 신분이 공개돼 있고 언제든 연행이 가능했던 인물인지라 공안당국은 그의 연행을 저울질하며 지켜보고 있기만 했다는 것. 구속을 각오했던 그는 '미행만 잔뜩 따라붙는 상황이 어리둥절했다'라고 당시를 회고한다. 

공안당국으로부터 관심이 멀어질 무렵 <중앙일보> 입사를 통해 주시가 풀렸음을 확인한 후, 기자로 활동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97년 대선 직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바로 세상과의 인연을 털고 지리산으로 내려오게 된다.

"사실 고생하신 어머니 때문에 착실하게 직장생활을 했던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그런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셨고 나는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런데 대선이 끝남과 동시에 어머니가 돌아가신거다. 이제는 미흡하나마 민주정부가 수립됐고, 내가 할 일을 다 마무리 했다는 홀가분한 심정이었다. 어머니가 나를 놔 준 것이었다."

시인은 <중앙일보> 시절을 이야기하며 97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던 <중앙일보> 내 비사를 털어놓기도 했다. 당시 이인제 후보 측에 투서를 날려 내부 분위기를 알려줬던 것은 그와 함께 일하던 몇몇 동료들이었다는 것. "치밀한 계획 끝에 벌인 일이라 내부감찰이 들어왔지만 아무도 걸려들지 않았다"며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펜과 종이 대신 아스팔트 위를 고민하게 만드는 세상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에 들어서고 있는 오체투지 순례단. 이원규 시인은 내년에 이어질 오체투지 순례 참여를 깊이 고민하고 있다.
▲ 오체투지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에 들어서고 있는 오체투지 순례단. 이원규 시인은 내년에 이어질 오체투지 순례 참여를 깊이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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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체투지] 지리산을 떠돌며 시작에만 몰두하던 그는 몇 해 전 부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함께 하고 있다. 그가 선택한 또 다른 실천문학인 셈이다. 생명 평화를 화두로 간간이 순례 길을 따라나섰지만 시인은 글쓰기와 가르치는 일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시인이 묵묵히 시를 짓고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해 주기만을 바라지 않는 모습이다. 거꾸로 가는 세상은 시인을 다시금 옛날 전사의 모습으로 돌려놓으려 하고 있어서다.

시인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뒤에서만 도우려던 생각이 앞에 나서려는 것으로 바뀌어 있을 만큼 그의 고민은 깊어지는 모습이었다.

시인이 펜과 종이대신 아스팔트 위를 부여잡을 고민을 해야 할 만큼 구시대로 돌아가는 세상, 이원규 시인의 선택을 유추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체투지 회향 행사가 끝나는 순간 시인은 분명히 마음 끈을 다지는 모습이었다. 미소 한 켠으로 결연한 의지가 더욱 굳게 엿보였다.

그게 시인이 지금껏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이리라.


태그:#이원규, #오체투지,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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