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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정(78) 할머니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라디오를 켠다. 라디오 방송을 듣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그가 라디오 방송과 함께 하루를 시작한 지는 6개월 남짓으로 듣는 방송은 한결같다. FM 100.3MHZ '관악FM'. 그의 하루를 생기 넘치게 해 주는 원동력이다.

 

그가 라디오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로 나서면서부터. 여든에 가까운 나이지만 한씨는 엄연한 라디오방송의 진행자다. "내가 나이는 많지만 말 더듬거나 하지 않지요? 진행하면서 막히는 모습이 있던가요?"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 강하게 든다"고 한다.

 

"노래 신청도 늘고 즐겨 듣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 음악 프로그램 '쾌지나칭칭'을 진행하고 있는 한혜정 할머니의 은근한 자랑이었다. 은근히 지상파방송의 진행자와도 한번 겨루어 보고 싶은 욕심도 나게 해줄 만큼 라디오는 그에게 자신감과 활력을 안겨주고 있다. 인생의 새로운 묘미를 알게 해 준 고마운 존재인 셈이다.

 

실버세대에 자신감과 활력 찾아준 공동체 라디오

 

 

이는 그가 사는 곳에 지역 FM 방송이 생기면서 가능해진 일이었다. 지상파와는 다른 지역 밀착형 방송인 관악FM은 '소출력  라디오 방송'이라고도 불린다. 작은 출력으로 지역의 소식을 전하는 라디오방송으로 일반적으로는 '공동체 라디오방송'이라고 불린다.

 

공동체 라디오는 송출 출력이 1W 정도로 반경 5~7km가 가청권(청취 가능 권역)일만큼 아주 작은 규모다. 분권화 지방화 시대, 지역의 소식을 전달하는 라디오방송으로 2005년 10월 첫 전파를 발사했다. 전문 방송인이 아닌 자원봉사자들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시범적으로 분당, 공주, 나주, 대구 등 전국 8개 지역에서 방송이 이뤄지고 있다.

 

공동체 라디오방송은 간단히 '동네 이장님 확성기'라 표현되기도 한다. '○○마을 주민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마을 방송에 근원을 두고 있어서다. 예전에는 이장님 집에 설치된 확성기로 동네 소식을 전했다면 요즘은 한 차원 더 발전해  FM 주파수를 이용해 작은 소식을 전하고 있는 셈이다.

 

지역 밀착형 방송이라 동네 주민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비영리, 공익적 성격을 갖고 있어 동네 주민들의 참여가 두드러지다. 한혜정 할머니도 노인복지관을 통해 일정 기간 교육을 받은 후 진행자로 직접 참여하게 된 것이다.

 

함께 방송에 참여하고 있는 최영자(71) 할머니는 "우리들 세대 나이에 맞게 추억을 되살려주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늘 흥미롭다"면서 "복습, 예습하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 덕분에 사는 것이 즐겁다"고 말했다.

 

지원 중단·광고 허용? 방송하지 말라는 것!

 

 

하지만 이처럼 공익적 성격이 강한 공동체 라디오방송이 내년부터는 상당히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그간 시범사업이란 특성에 따라 지원되던 정부의 기금이 본 사업을 앞둔 내년부터는 끊기기 때문이다. 방송통신위는 내년 1월부터 공동체라디오에 대한 '지원 중단'과 '광고 허용'을 결정한 상태다. 더 이상 지원하지 않을 것이니 광고 수입으로 운영비를 충당하라는 것.

 

방송통신위의 이런 방침에 공동체 라디오방송들은 강력 반발하고 있다. '사실상 문을 닫으라는 처사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주파수 출력이 제한된 상태에서 가청권이 고작 반경 5~7km인 마당에, 이들이 광고수입을 얻기란 사실상 어려운 현실이다. 잘 들리지도 않는 방송에 광고를 줄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안병천 관악FM 방송본부장은 "현재까지 방송 운영에 있어 광고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0%인데, 출력도 약한 상태에서 광고 수입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하다"며 "현재 방송법상 10W(와트)로 제한된 출력 문제도 시행령 미비로 진척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지원을 중단하는 것은) 방송을 하지 말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광고 수입이 가능할 정도의 출력 증강이나 방송 환경 개선이 없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공적 지원을 없앤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라는 것. 그는 "행정소송을 내고 싶은 심정"이라면서 "비영리·공익 방송 보고 하루아침에 상업방송이 되라는 말과 같다"고 답답해  했다. 이어 "결국 이렇게 될 경우 공동체 라디오의 근본 취지가 훼손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공동체 라디오의 현실에 비춰볼 때 이들이 반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독립적인 운영이 가능한 환경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방송통신위가 이런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공적 지원이 사라질 경우 공익성은 약해질 수밖에 없고,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자를 육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던 처음 취지에도 상당히 벗어나게 된다.

 

방통위 "발전기금 중단, 이전 정부 때 결정된 사항"

 

 

공동체라디오 시범사업자들의 모임인 한국커뮤니티라디오방송협의회(회장 정용석)는 방송통신위 방침이 제대로 시행되려면 '출력 증강을 통해 최소한 허가받은 기초지자체에는 들릴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현재 출력을 10W 이하로 묶어둔 방송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

 

이것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지 않는 한 '공적 지원을 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들의 기본적인 견해다. "계속 지원이 어렵다면 적어도 출력이 올라가 광고 수입이 가능할 때까지 단계적으로 지원금을 축소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이 단체 송덕호 사무국장의 주장이다.

 

방송통신위 쪽도 부분적으로는 이들의 주장을 인정하고 있다. "전파 출력이 약한 부분에 대한 문제는 있다"는 것. 그러나 지원에 대해서는 부정적 태도다.

 

방송통신위 한 관계자는 "발전기금 지원 중단은 이미 이전 정부 때 결정된 사항"이며 "운영할 만한 광고 수입을 올리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역민을 위한 토착 사업을 하면서 중앙의 예산을 지원한다는 것은 맞지 않다. 지역방송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분들이 많다면 지역적으로 재원을 마련해 운영할 수 있다는 생각에 우선 시범적으로 예산을 지원한 것이고 시범사업이 끝나는 시점에서 다른 방송들과 형평성 문제도 있어 더 이상의 지원은 어렵다."

 

또 출력 증강에 대한 부분도 "주파수 재배정이 쉽지가 않다"며 "주파수 환수와 재배치에 대한 방송들의 이해관계가 달라 조정이 쉽지 않다"고 밝혔다. 이어 "연말에 시범사업 평가 용역이 나올 예정"이라며 "그것을 기준으로 내년도 공동체라디오 본 사업 진행에 대한 방향을 정하게 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미디어 공공성 간과하는 방송통신위

 

 

그러나 방송통신위의 이런 방침은 미디어의 공공성을 간과한 것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2~3년을 내다보고 일해왔다"는 공동체 라디오방송 관계자들은 방송통신위의 방침이 "공적 기능을 포기하라는 것과 다름이 없다"며 허탈해 했다. '2005년 시험방송 때도 고작 3개월 방송한 시점에 평가 보고서가 작성됐고, 그간 수익도 못 내게 했으며, 담당자가 7번이나 바뀔 만큼 관심도 없었다'는 것이 이들의 지적이다. '실질적 조사도 안 하다가 갑작스레 일방적인 용역 조사를 진행하고 있을 만큼' 방송통신위의 방침에 문제가 많다는 것이 공동체 라디오방송들의 주장이다.  

 

공익과 비영리의 원칙 아래 미디어 불평등 해소를 위해 애썼고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고 있음에도 풍전등화의 현실 앞에 놓인 공동체 라디오방송. 처음에 세운 사업 목적대로 '한정된 주파수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지역문화를 발전'시키고 있음에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정책 재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일은 더 늘어나야지, 줄어든다는 게 말이 되나요? 우리 같은 사람들, 이런 방송 덕분에 얼마나 많은 도움 받고 있는데. 이런 방송 없어지면 절대 안 돼요."

 

'내년에 방송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 방송의 즐거움을 한창 이야기하던 한혜정 할머니의 표정에는 이내 근심이 서렸다. 옆에 있던 다른 실버 진행자들도 "정부가 왜 이렇게 좋은 방송을 왜 없애려 하느냐? 없어지면 안 된다"며 거들었다. 공동체 라디오의 위기 상황, 가장 큰 피해를 볼 사람은 바로 이들 지역 주민들이었다.

 

"라디오 통해 미디어 불평등 해소하고 방송 문턱 낮추는 성과"

[인터뷰] 공동체 라디오 관악FM 안병천 방송본부장

 

"공동체 라디오의 성과는 상당히 큽니다. 미디어 불평등을 해소시켰고, 방송의 문턱을 낮춰  저변을 확충한데다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진 분들에게 자존감을 갖게 해 줬거든요."

 

지난 11월 27일 '관악FM'에서 만난 안병천 본부장은 공동체 라디오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주류 방송과는 다른 내용으로 '듣는 방송이 아닌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방송'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는 것. 그는 공동체 라디오의 공공성의 덕분에 이런 모습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공동체 라디오를 시작하면서 미디어의 공적인 역할이 무엇일까를 고민했어요. 그 과정에서 미디어 소외 계층들에게 초점을 맞췄던 것이지요."

 

'관악FM'은 실버 세대들과 청소년들에게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다. 청소년 회관과 노인 복지관에 스튜디오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노력의 결실이다. 공동체 라디오의 공공성을 제대로 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안 본부장은 "2년간의 노력 끝에 실버 세대들과 청소년 방송 토대를 만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공동체 라디오의 인프라도 구축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년부터 정부 지원이 중단될 예정인지라 그간의 성과가 물거품이 될까봐 그는 고민하고 있었다. 

 

"지원을 끊겠다고 하니 청소년이나 실버세대, 소외 계층으로 나가는 예산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더군요. 공익과 비영리 방송은 필요한 공적 개념인데, 광고로 먹고 살려면 이런 부분이 소홀히 되는 것이야 당연하고 결국 돈 되는 방송을 해야 하잖아요."

 

그는 공동체 라디오가 "지역사회 문화 향연과 풀뿌리 민주주의의 성장을 가능케 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안정될 때까지는 국가적 시책으로 더욱 지원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지원이 끊기면 지자체 등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그럴 경우 여러 제한이 많다"는 것. 중앙에서 주는 게 가장 깨끗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안 본부장은 "그동안의 시험방송을 평가하는 용역 보고서를 작성한다는데, 제대로 하려면 한 방송국에서 최소 1주일은 지켜봐야 알 수 있는 것"이라며 보고서가 겉핥기식으로 작성될 수 있음을 우려하고 "정부 담당자들도 상황을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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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공동체 라디오, #관악FM, #방송통신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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