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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경상도의 북부지방 사람들은 어떻게 한양으로 갔을까? 영주, 안동, 봉화, 예천지역에 살던 백성들과 관원, 청운의 꿈을 안고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하던 선비들, 장사를 하던 상인들은 주로 순흥(順興)도호부 창락면 관촌리(현 풍기읍 창락리)에 있던 역에 모여서 죽령(竹嶺)고개를 넘었다.
 
죽령이 시작되는 풍기읍 창락리에는 영남 북부에서 가장 큰 역(驛)이 있었다. 현재도 창락리에는 옛 역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유적들이 있다. 역의 주춧돌과 당시 역장(찰방)의 선정비가 서 있다.
 
조선시대 전국에는 권역별로 40개의 중심역과 500여개의 간이역을 두었다. 창락역은 바로 중심역 중에 하나였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한국철도공사 경북북부지사쯤 된다. 창락역 산하에는 순흥, 영주, 봉화, 안동, 예안, 예천 등의 간이역이 있었다.
 
역장은 종6품의 벼슬을 받았고, 찰방 아래 사무를 담당하는 역리, 사령, 역리 보조, 노비 등을 합하면 80~100여명의 역원이 일했다. 역마 역시 15~20필이 있었다. 주요 업무는 통신 및 운송기관으로 공문서 전달, 마필 공급, 관리와 사신의 숙박, 공물과 관물 수송 등을 도왔다.
옛길
▲ 소백산의 옛길 옛길
ⓒ 영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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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북부지방 백성들은 풍기읍의 창락역을 시작으로 현재 중앙선 희방사역이 있는 무쇠다리 주막거리~느티정 주막거리~주점 주막거리~고갯마루 주막거리 순으로 이어지는 죽령 길을 넘나들었다.
 
죽령 옛길
▲ 죽령 옛길 죽령 옛길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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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제2연화봉과 도솔봉이 이어지는 잘록한 지점에 자리한 해발 696m의 죽령.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는 '아달라왕 5년(서기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 했고, 조선의 지리서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 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殉死)했고, 고갯마루에는 죽죽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라고 전한다.
 
삼국시대 죽령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지역으로 불꽃 튀는 격전장이었다.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한 것은 장수왕 말년(서기 470년경)이다. 하지만 신라 진흥왕(서기 551년)은 거칠부 등 여덟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략, 죽령 이북 열 고을을 탈취했다.
 
그 40년 뒤인 고구려 영양왕(서기 590년)시절 명장 온달 장군이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등의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죽령이 막중한 요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죽령은 구한말까지도 경북 북부지방 여러 고을이 서울 왕래에 모두 이 길을 이용했기에,  사시장철 번잡했던 이 고갯길에는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객점, 주막, 말을 관리하는 마방, 짚신가게 등이 목목이 늘어져 있었다.
 
죽령 옛길은 장장 2천 년간의 유구한 세월에 걸쳐 영남지역 교통 대동맥의 한 토막이었던 길이다. 이 길은 1930년대 죽령을 넘는 신작로의 개통과 연이은 철도 관통으로 쓰임새가 줄어들더니, 최근에는 중앙고속도로의 완공으로 점점 이용하는 사람이 끊겨 50~60년 동안 숲과 덩굴에 묻혀 있었다.
 
죽령 옛길
▲ 죽령 옛길 죽령 옛길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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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애환을 간직하며 2천년 가까운 세월, 영남 내륙을 이어온 죽령의 옛 자취를 되살려 보존하려는 뜻에서 1999년 영주시가 죽령 옛길의 일부인 희방사역(무쇠다리 주막거리)~죽령 고갯마루 주막거리까지 2.5km의 길을 복원했다. 울창한 숲과 산새, 다람쥐, 야생화 등이 반기는 산길을 걸으면 옛 선비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이번 도보여행의 출발점은 복원된 희망사역에서 죽령 고갯마루 주막거리까지를 두 배 정도 연장한 원래의 풍기읍 창락리 역참(驛站)터에서 시작했다.
 
토요일(7일)아침 10시, 시내버스를 타고 창락역이 있던 풍기읍 창락리에 소재한 '영주 소백산풍기온천'(http://www.sobaeksanpunggispa.or.kr)정거장에 도착했다. 산삼배양근 원료 및 제품 등을 만드는 '비트로시스'와 2007년 조성된 풍기인삼 및 특산물 판매장 '풍기 소백산인삼시장', 지식경제부 산하 우정사업본부가 운영하는 '풍기우정교육센터' 등이 주변에 있어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풍기온천
▲ 죽령 옛길의 시작지 소백산 풍기온천 풍기온천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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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출발점으로 하여 희방사역까지 도보로 1시간 정도거리이다. 옛 사람들이 걸어 다닌 농로를 중심으로 길을 잡았다. 희방사역을 알리는 방향 표시판은 없고, 무쇠다리 주막거리에 있는 '용바위산장식당'(http://www.yongbawee.com)이정표가 길 건너에 보인다.
 
이정표를 따라서 과수원 길을 200~300미터 가다 보면 수령이 300년은 넘게 되어 보이는 큰 느티나무가 있고 소백산에서 내려오는 남원천이 나온다. 남원천을 가운데 두고 양쪽은 대부분 과수원이다. 여름, 가을에는 농로를 걸으며 익어가는 사과열매와 함께 시골의 정취에 흠뻑 취해 볼 수 있다. 남원천을 따라서 서북쪽 길을 30~40분 정도 걸어올라 가면 용바위산장식당이 나온다. 용바위산장식당의 이정표는 길을 가면서 3~4개는 더 발견할 수 있어 갈림길이 있어도 길을 가는데 불편은 없다.
 
느티나무
▲ 남원천변 느티나무 느티나무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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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봉과 도솔봉 사이를 따라서 흘러 내려오는 남원천 물줄기가 참 깨끗해서 좋다. 더운 여름이면 물에 발을 담그고 20~30분 정도 담소를 나누며, 참외를 갈라먹거나 시원한 냉커피를 한잔하면서 잠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남원천
▲ 남원천 남원천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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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간이 화장실도 하나 있고, 남원천을 끼고 왔다 갔다는 하는 길이 정겹다. 창락교 위에서 사진을 한 장 찍거나 냇가의 너럭바위에 앉아 포즈를 잡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주변의 사과나무와 함께 소나무와 잎갈나무도 정취를 더해준다.
 
풍경에 취해 거닐다보면 순식간에 용바위산장식당에 다다르게 된다. 산책하는 기분으로 대략 한 시간 정도 걸어야하는 거리지만, 경사가 거의 없는 길이어서인지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십여 년 전에 생긴 용바위산장식당은 한우갈비와 오리탕을 주로 하는 곳으로 계곡 옆에 지어진 건물이라 물소리도 좋고, 음식도 맛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방갈로에서는 민박도 가능하다.
 
무쇠다리
▲ 무쇠다리 주막거리 무쇠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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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물을 한잔 마시고 산장을 지나면 바로 무쇠다리 주막거리를 알리는 돌비석이 나온다. 신라 시대 희방사를 창건(643년)한 두운조사에게 도움을 받은 지방의 한 유지가 희방사 가는 길목에 있는 이 마을에 무쇠다리를 놓아준 것이 유래가 되어 무쇠다리 주막거리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오늘 날 무쇠다리를 없어졌지만, 무쇠다리 주막거리라는 이름은 남아 있고, 현재는 희방사역이 생겨 희방사역 마을이나 풍기읍 수철리라고 불리는 곳이다.
 
희방사역
▲ 중앙선 희방사역 희방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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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희방사역전으로 가는 작은 터널을 지나면 하루 2번씩 상하행 열차가 서는 희방사역이 나온다. 역전에는 대략 30~40호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이 있다. 역을 끼고 죽령 방향으로 길을 돌려 조금만 걸어가면 죽령 옛길 표지판이 보인다. 길이 복원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도중에 화장실이 없는 관계로 마지막 볼일은 희방사역 변소에서 보고 가는 것이 좋다.
 
죽령 옛길은 현대적인 의미로 보자면, 생태공원과 산책로, 역사탐방을 겸하여 복원이 된 완만한 등산로이다. 따라서 남녀노소 누구나 함께 걸을 수 있다.
 
죽령 옛길
▲ 죽령 옛길 죽령 옛길
ⓒ 영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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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신라시대 길을 처음 낸 이후 망국의 한을 품었던 마의태자, 남쪽 정벌에 나선 고려태조 왕건, 조선의 통치기반이자 선비사상의 토대인 주자학(성리학)을 도입한 회헌 안향 선생, 영주출신의 대신 정도전, 조카인 단종 임금을 복위시키고자 목숨 바친 금성대군, 왜적척살을 위해 몸 바친 의병대장 유인석, 이강년 등 수많은 전설과 이야기가 서려있는 죽령 옛길을 걸으며 선인들의 발자취를 느껴볼 수 있다.
 
옛길이 시작하는 길목의 안내판에는 신라의 명재상 '죽지'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신라의 명신 술종이 삭주도독사(강원 영서지방 장관)로 부임시 고갯마루에서 길을 닦고 있는 한 거사를 만나 서로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부임해서 한 달 뒤, 술종과 그 부인은 거사가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이를 이상히 여겨 거사의 안부를 알아보니, 거사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술종은 거사가 꿈속에 자기 집에 찾아 온 일을 두고 '아마 우리 집에 다시 태어나려는가 보다.'했는데, 과연 부인이 아들을 낳으니 그 이름을 죽지라 했다. 그 아이가 성장하여 화랑이 되어 김유신과 더불어 삼국통일의 대업에 큰 공을 세우니, 그가 바로 신라 진덕왕에서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4대에 걸친 명재상 죽지였다. 이 같은 사연은 죽지의 구원으로 죽음을 면한 득오곡이 죽지를 사모하여 지은 <모죽지랑가>로 삼국유사에 전한다.
 
죽령 옛길
▲ 죽령 옛길 죽령 옛길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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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 옛길은 곳곳에 숲, 풀, 나무, 꽃, 새, 동물 등에 대한 안내판과 전설 및 터의 유래에 관한 해설판 등을 설치하여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굽이굽이를 돌 때 마다 각종 산새들과 다람쥐가 노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두 번째 굽이를 돌면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에 관한 설명문을 발견할 수 있다. '무게가 3,379근 소리가 우렁차고 맑아 멀리 백리 까지 들린다.'라고 <영가지>에 전하는 국내 최고 범종이다. '세조가 상원사를 원당 사찰로 정하고 국내에서 가장 좋은 종을 구하는데 이 종이 뽑혀, 예종 1년(1469년)가을, 왕명으로 수백 명의 군졸과 백여 필의 우마를 동원 안동에서 상원사로 운반하는 도중, 죽령에 다다라 이 종이 꼼짝도 하지 않자, 종의 젖꼭지 하나를 떼어 안동에 보내고 나서야 움직였다.' 현재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이 종은, 현재까지도 36개의 젖꼭지에서 한 개를 떼어낸 자리가 아직도 선연하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다. 아울러 조선시대 퇴계 형제에 관한 이야기도 세 번째 굽이를 돌면 발견할 수 있다.
 
조선의 명종 3∼4년(1548∼1549년)경 풍기군수 이황이 종형을 마중하고 배웅하던 자리에 지어진 잔운대와 촉령대 이야기다. 그 무렵 충청감사였던 퇴계의 형 온계가 고향 예안에 다니는 길에 퇴계가 이곳 죽령에서 주연을 마련, 마중하고 배웅하던 자리로서 동서에 두개의 대를 쌓았고 동쪽을 잔운대, 서쪽을 촉령대라 했다 한다. 현재 그 터와 유적은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죽령 옛길
▲ 죽령 옛길의 안내판 죽령 옛길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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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읽으면서 간간히 풀과 나무, 장승, 주막터 등을 둘러보면서 1시간 정도를 올라가니 시나브로 고갯마루 주막거리에 다다른다. 이곳을 넘어 계속 전진하면 단양군 대강면이 나온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풍기읍과 영주시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죽령 주막
▲ 죽령 주막 죽령 주막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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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건너편 죽령주막의 약수는 먼 길을 오느라 지친 길손들의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어 좋다. 죽령 정상에는 휴게소가 있고, 영주와 단양을 가르는 경계석도 있고, 각종 안내문구와 관광안내용 대형지도 등도 있어 도보여행자들에게 길 안내에 큰 도움이 된다.
 
죽령 경계석
▲ 죽령 경계석 죽령 경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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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가 다 되어 주막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길을 거슬러 창락리로 돌아왔다. 오후 3시 밖에 되지 않아서 '영주 소백산풍기온천'에서 목욕을 하고서, 풍기인삼이 유명한 곳이니 '풍기 소백산인삼시장'에서 인삼을 한 채 샀다.
 
5시가 다 되어 시내버스를 타고 풍기읍으로 나와 여름용 냉장고 섬유로 인기가 높은 명품 풍기인견(人絹-VISCOUS)가게들을 둘러보고 인견베개를 하나 산 다음, 다시 버스를 타고 영주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덧붙이는 글 | ※길 안내: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30분마다 한 대씩 다니는 시외버스를 타고 영주시외버스터미널까지 2시간 30분 정도면 도착한다. 다시 30~40분마다 한 대씩 있는 시내버스를 타고 30분이면 풍기읍 창락리에 도착한다. 오전 10시 전에 죽령을 향하여 출발하면 정오 경에 죽령 주막에 도착하는 것이 가능하다. 식사를 하고 올랐던 길을 되돌아오면 오후 3시면 창락리에 닿는다. 창락리에서 온천을 하고, 풍기로 나와 인삼, 인견 쇼핑을 마친 다음, 영주로 가면 오후 6시 경에 서울로 돌아가는 시외버스를 탈 수 있다. 하루 밤 영주나 풍기에서 숙박을 하는 경우라면 다음 날 여유를 가지고 소수서원, 선비촌, 부석사를 둘러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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