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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보면 261년(신라 첨해 이사금 15)에 달벌성(達伐城)을 축조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 기사는 대구 지역을 지칭하는 지명(地名)을 확실하게 증언해주는 최초의 기록으로, 그 이름이 바로 '달벌'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물론 그 이전까지는 대구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대구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7세기 무렵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이후 철기가 유입되면서 거주민들의 세력은 더욱 왕성해졌을 것이며,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작은 나라를 세웠을 터이다. 그리고 그 소국은 아마도 변한 12국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세력이 강성한 나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3세기경부터는 신라문화권에 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대구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 그 이전까지는 무엇이었는지 불확실하다는 말이며, 첨해 이사금 때의 달벌성 명칭이 비로소 확실하다는 뜻이다.

 

그 이후 대구 지역은 달구벌(達句伐)로 불려졌다. 달구벌의 '벌'은 평야, 언덕, 들판, 성읍 등등의 뜻으로 이해된다. 백제사람 중 유일하게 동상을 남긴 계백 장군이 전사한 곳도 황산벌이니 '벌'은 곧 '넓은 땅'인 것이다. '달구'는 '큰, 넓은'의 의미를 지닌 순우리말이다. 물론 '닭'을 "달구새끼"라고 말할 때에 쓰이는 사투리 '달구'와는 다르다. '달구벌'은 곧 '넓은 언덕, 광활한 들판' 정도의 의미라는 이야기이다.

 

이는 요즘 쓰는 대구(大邱)라는 명칭의 옛이름인 대구(大丘)를 보면 바로 이해할 수 있다. '클 대(大)'에 '언덕 구(丘)'는 곧 '달구벌'이기 때문이다. 우리말 명칭인 '달구벌'이 한자식 이름인 대구(大丘)로 바뀐 것은 757년(경덕왕 16) 때의 일이다. 경덕왕은 한화(漢化)정책을 썼는데, 그 결과 우리말 지명을 한자식으로 바꾸었다. 중국식으로 바꾸는 것이 옳다고 여겼던 것이다. (문경 '새재'는 鳥嶺(새조, 고개령)이 되고, 충남 공주의 '곰나루'는 熊津(곰웅, 나루진)이 되는 것이 한화(漢化)이다. 충북 '길동'은 永同(길영)이 되고, 경기도 '벌말'은 坪村(넓은땅평, 마을촌)이 된다.)

 

대구(大丘)는 다시 대구(大邱)로 바뀐다. 그렇게 바뀐 때는 1780년 무렵이다. 1750년(영조 26) 대구의 유생 이양채(李亮采)가 임금에게 상소를 놀려 대구(大丘)를 대구(大邱)로 바꾸어야 옳다고 주장한다. 구(丘)가 공자님의 이름(孔丘)에 쓰이는 글자이니 지명으로 써서는 안 된다는 요지였다. 그러나 다른 지명에도 구(丘)를 쓰는 곳이 많고, 이미 삼백년씩이나 써온 것을 구태여 바꿀 필요가 없다는 중론에 밀려 임금의 윤허를 얻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하여 대구(大丘)와 대구(大邱)가 섞여서 사용되던 중 1780년 정조 초기 무렵부터 대구(大邱)가 쓰이게 되었다. 추로지향(鄒魯之鄕, 맹자의 출생지인 추나라와 공자의 출생지인 노나라에서 유래한 말로 유학자가 많이 배출된 지방을 일컫는 성어임)인 대구지역의 성리학적 분위기가 결국 지명을 바꾸게 된 셈이다.

 

그 이후, 1949년 7월 지방자치법이 개정되면서 대구시로, 1981년 7월 1일에는 대구직할시로, 1995년 1월부터는 대구광역시로 대구는 그 이름이 바뀌게 된다. 그러나 '대구시'든 '대구직할시'든, '대구광역시'든 그것은 매한가지이니 오늘날의 이름 대구(大邱)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결국 조선 정조 때부터인 것이다.


태그:#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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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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