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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미디어렙'은 방송사를 대신해 광고주에게 광고시간을 판매하고 수수료를 받는 방송광고 판매대행사다. 방송사가 직접 광고를 판매하지 못하게 하고 미디어렙을 통해 판매하게 하는 것은 방송프로그램이 광고의 직접적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시청자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광고주의 요구에 의해 프로그램이 변질되거나, 광고를 유치하기 위해 방송사가 광고주의 입맛에 맞게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을 막아보려는 취지다. 현재 지상파 방송광고 판매는 한국방송광고공사(코바코)가 독점적으로 대행하고 있다.

 

그동안 광고주협회 등은 코바코 독점체제가 시장원리에 맞지 않아 광고자원 배분이 왜곡된다고 주장하면서 미디어렙시장에 완전 경쟁을 도입하라고 요구했다. 특히 인기 있는 방송사의 광고시간과 비인기방송사의 광고시간을 연계하여 판매하는 것을 '끼워팔기'라며 불공정행위로 제소하기도 하였다. 또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11월 코바코가 지상파 방송 광고를 독점 판매하는 현행 제도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한나라당 한선교 의원이 지난달 15일 '민영 미디어렙' 도입을 핵심 내용으로 한 방송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번 개정안은 공영방송 광고를 대행하는 한국방송광고대행공사를 신설하고 복수의 민영미디어렙을 허용하여 사실상의 완전 경쟁을 도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방송사가 미디어렙 지분의 최대 51%까지 가질 수 있도록 허용하여 방송사들이 미디어렙을 소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이번 법안은 광고주나 메이저 방송사들의 요구대로 방송광고판매에 전면적으로 시장경쟁을 도입하는 내용이다.

 

민영미디어렙 허용, 지역방송·라디오 죽인다

 

시민사회단체와 지역방송 그리고 종교방송 등은 "이 법안이 방송의 공공성을 크게 약화시키고 상업화만 몰고 올 것"이라며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다. 헌재도 인정한 것처럼 미디어렙 제도는 방송의 공공성을 구현하는 매우 중요한 제도이며, 방송광고판매는 방송의 일부이고 방송의 광고 판매 영역인데 방송의 공공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법안이라는 것이다. 미디어렙제도는 광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방송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하며 이는 광고라는 시장과 효율성의 잣대보다는 공공성의 기준이 미디어렙제도의 논의에서 더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현재 코바코는 한 사회의 광고재원을 사회적 필요에 따라 배분하고 있다. 시청률 등 광고효과만이 아니라 방송의 다양성과 공익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광고요금과 판매 등에 반영하고 있다. 특히 연계 판매는 방송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장치로 평가 받기도 한다.

 

방송의 다양성은 우리 사회의 방송이 추구하는 매우 중요한 목표다. 상업적 경쟁으로만 치닫지 않고 풍성한 공익적 프로그램이 제작되고 편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방송광고판매를 시장원리에만 맡기면 당연히 시장경쟁력이 높은 방송사로만 광고재원이 몰리고 지역방송사나 라디오방송사들은 재원부족으로 지역문화를 창달하고 다양한 문화를 생산하는 공익적 역할을 하기 어렵게 된다.

 

헌재가 현 코바코체제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므로 올해 말까지는 미디어렙에 경쟁체제를 도입하여야 한다. 하지만 시장경쟁으로 인한 공공성의 위축을 최소화하고 미디어렙이 공익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방송의 공공성을 약화시키지 않는 범위안에서 제한적으로만 경쟁적 요소를 도입하여 시장의 장점을 높이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시장적 가치인 경쟁원리를 도입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방송의 공공적 가치에 입각한 구조와 운영 방식을 채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미디어렙이 반드시 갖춰야 할 3가지 요건

 

미디어렙이 방송의 공공성 등을 구현하기 위해 다음 세 가지 요건을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이다.

 

첫째, 방송프로그램의 제작과 편성에 광고주의 영향을 배제해야 한다. 방송사가 방송광고를 직접 판매하지 않고 미디어렙을 통해 판매하게 하는 취지도 그러한 우려를 막기 위해서이다. 이는 방송사나 광고주의 압력으로부터 미디어렙이 자유롭고, 방송사도 미디어렙으로부터 자유로워서 프로그램의 제작과 편성이 광고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디어렙은 방송광고를 판매는 하지만 방송프로그램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 이를 위해 미디어렙에 대한  방송사나 광고주의 소유지분 참여는 엄격히 제한해야 할 것이다.

 

둘째, 지나친 시청률 경쟁으로 인해 방송의 공공성이 약화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선 시청률이 곧바로 방송광고요금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시청률이 방송광고요금 결정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면, 이는 필연적으로 시청률 중심의 프로그램 제작과 편성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만 시청률이 낮은 프로그램은 위축될 것이다. 아울러 시청률은 낮지만 공익적인 사회적 프로그램 제작과 편성을 장려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셋째, 방송의 다양성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선 방송사 내에서 다양한 방송프로그램이 편성되어야 한다. 특정 프로그램 양식이나 장르만이 많이 편성되면 다양성을 줄어들고 이는 사회의 다양성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높다. 헌재가 이번에 방송의 공공성 등을 실현하기 위해 내놓은 "특정 장르, 특정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 쿼터제를 도입" 방안도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 또 다양한 방송사들이 존립하도록 하는 것도 방송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방법이다. 소수 매체에 의해 시장이 과도하게 지배될 경우 여론형성이 왜곡돼 궁극적으로 민주주의 위기를 가져올 우려가 크다.

 

방송의 다양성, 문화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서 지역방송이나 종교방송 등에 대한 재원마련 방안이 고민돼야 한다. 사회적 약자들도 자기의 사상, 신념, 의견을 형성할 수 있는 정보를 제대로 접하고 그들의 의견이 여론에 반영될 수 있는 통로를 가져야 한다. 지역방송을 활성화하고 방송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매체구조이며 건강한 민주주의와 지역 균형발전을 위한 사회적 토대이다.

 

공공성·다양성 고민 빠져있는 한선교 법안

 

이번에 한선교 의원이 제출한 법안에는 방송의 공공성과 다양성에 대한 고려가 거의 없다.오로지 시장에 의한 효율성만을 담고 있다. 이 법안은 방송사의 미디어렙 소유 허용, 민영미디어렙에 의한 완전경쟁, 취약매체에 대한 지원 미흡으로 방송의 공공성과 다양성이 심각하게 위협할 것으로 보인다.

 

방송사의 미디어렙소유는 사실상 방송사가 직접 광고를 판매하는 효과를 가져와 방송제작 편성과 광고판매를 분리하여 방송프로그램이 광고 등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는 미디어렙 제도 자체를 무의미하게 할 것이다. 또 완전경쟁은 언론매체의 다양성과 균형발전을 훼손하고 여론의 독과점을 초래할 것이다. 미디어렙을 통해 방송사 간 전면적인 가격·비가격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며 공공성의 논리보다는 산업적 논리로 방송이 운영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방송광고가격은 수요·공급이라는 시장논리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될 것이다. 경쟁적인 방송광고판매시장은 공익적 목적으로 광고요금을 조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할 것이며 판매회사들은 시청률에 따라 광고요금을 책정하게 되므로 방송사 간의 시청률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방송사는 광고를 유치하기 위해 좀 더 흥미있고 자극적인 프로그램을 제작, 편성하게 될 것이다.

 

방송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한 연계 판매는 폐지될 것이며 오로지 시장의 논리에 의한 판매가 이루질 것이다. 서울에 기반을 둔 방송3사를 중심으로 한 방송광고독점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이며 방송의 다양성이라는 가치는 훼손된다. 지역방송과 종교방송은 광고판매의 부진으로 방송사의 운영은 심각한 위기에 부딪칠 것이며 지역민들의 여론을 선도하고 지역문화를 발굴하며 문화적 다양성을 만들어가는 지역방송, 사회적으로 공익적 역할을 하는 라디오 방송사들은 존립자체가 위태롭게 될 것이다.

 

시청률 높을수록 더 공익적 프로그램?

 

시청률의 논리가 지배하게 되면 방송사내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의 편성은 크게 제약된다. 시청률이 낮거나 광고판매 가능성이 낮은 프로그램은 폐지되거나 줄어들 것이며 변두리 시간대로 밀려나게 된다. 오락프로그램은 늘어나는 반면에 시사 토론 프로그램이나 사회적 소수자 프로그램은 줄어들 것이다. 이미 온갖 불륜과 자극적 내용으로 점철되어 막장 방송이라고 비난 받고 있는 방송사의 막장화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어떤 이는 시청률이 높을수록 시청자들의 많은 선택을 받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더 공익적 프로그램이라는 억지 논리를 내세우기도 한다. 그렇다면 시청률이 높은 막장드라마가 감동과 교양이 있지만 시청률이 낮은 프로그램보다 더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말인가?

 

방송광고판매제도는 한 사회의 매체구조를 만들고 정착시키는 경제적 기반이다. 광고자원의 배분은 그 사회의 매체산업 구조를 결정한다. 따라서 이를 시장에만 맡길 수는 없다. 시장 원리에 맡기면 사회적으로 덜 필요하나 광고가치가 높은 매체는 번창하지만, 사회적으로 필요하나 광고매체로서 경쟁력이 약한 매체는 쇠퇴할 우려가 있다. 때문에 바람직한 문화 교양의 생산 유통 중심통로로서 매체산업구조가 왜곡될 수 있다.

 

시장이 가진 장점을 일부 받아들이긴 하지만 시장 경쟁에 따라서만 매체간 광고자원이 배분되어서는 안 되고 그 사회의 역사적 사회적 필요에 따라 매체 산업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광고제도는 그러한 매체산업구조를 형성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디어렙 법안, 당장 밀실에서 끌어내라

 

시장만능주의나 신자유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실패한 이론으로 비판을 받고 있으며 시장에 대한 적절한 규제와 사회적 개입이 세계적 흐름이다. 오로지 사적이익을 앞세우고 시장효율성을 강조하면서 방송마저 시장의 영역으로 내몰려는 논리는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방송은 우리 사회의 여론과 문화, 의식과 가치를 만들고 이끌어가는 중심제도이다. 또 그 재원이 되는 광고판매제도는 방송구조와 내용을 결정한다. 그만큼 미디어렙제도는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며 사회적 논의와 합의를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안을 일부 의원이 사회적 공론화 과정 없이 덜컥 성급하게 법안부터 제출해버렸고, 소모적인 갈등만 불러오게 되었다. 오로지 일부 방송사와 광고주 등 사업자의 이익만 대변하고 있다는 비판을 벗어나기 어렵다. 지금이라도 법안을 철회하거나 처리를 멈추고 사회적으로 공론화하여 여론을 수렴하여야 할 것이다.

 

학계와 정부, 시민사회에서는 제한적 경쟁과 완전경쟁, 방송 다양성을 위한 사회적 장치 등 미디어렙 체제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므로 이를 통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다수 의석을 이용하여 여론을 무시하고 밀실에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논의한 다음에 국민의 뜻을 받들어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이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절차다.

덧붙이는 글 | 정연우 기자는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이자 세명대학교 광고홍보학과 교수입니다. 


태그:#민영미디어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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