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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딸이 처음 보신탕 맛을 보았던 식당에서 전골을 맛있게 먹는 모습. 얼굴이 잘려서 마음이 편하지 않은데요. 숙녀 티를 내는 것인지 본인이 고사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20여 년 전 딸이 처음 보신탕 맛을 보았던 식당에서 전골을 맛있게 먹는 모습. 얼굴이 잘려서 마음이 편하지 않은데요. 숙녀 티를 내는 것인지 본인이 고사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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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개월은 달력이 야속할 정도로 세월이 빨리 가는 것 같았습니다. 하루하루가 그만큼 즐거웠다는 얘기도 되겠는데요. 2000년 12월 초에 서울생활을 시작한 딸이 내려와 아내와 함께 황금 같은 20일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가족 셋이 한 집에서 사흘 넘게 지내기는 9년 만이었는데, 먹을거리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없습니다. 부침개와 조기 등 제사 음식이 냉장고에 가득한데도 보신탕집에 가서 아내는 삼계탕을, 딸과 나는 보신탕을 시켜먹기도 했으니까요.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한 딸은 자취와 야근으로 피로가 누적됐는지 몸이 아프다며 지난달 병가를 내고 내려와 쉬면서 병원으로 치료를 받으러 다녔는데요. 열흘쯤 지나니까 원장이 그만 와도 된다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자동차 운전면허를 따놓는 게 좋겠다"는 아내의 제의로 자동차운전학원에도 다녔습니다. 필기시험에 이어 엊그제는 아침 일찍 나가더니 12시쯤 주행에 합격하고 면허증을 발급받았다는 전화를 해왔더군요. 

아내는 기쁜 마음에 "축하헌다! 우리 딸이 최고여!"라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저는 은근히 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떨어지면 재시험을 봐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더 드는데요. 자식과 하루라도 더 있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 금전을 초월했던 것 같습니다.

숙녀가 된 딸과 보신탕 데이트

깻잎을 듬뿍 넣고 끓인 전골과 고기를 집어먹는 모습, 그리고 남은 국물에 비벼놓은 비빔밥. 군침이 넘어가네요.
 깻잎을 듬뿍 넣고 끓인 전골과 고기를 집어먹는 모습, 그리고 남은 국물에 비벼놓은 비빔밥. 군침이 넘어가네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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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아내가 출근하고 딸과 둘이서 집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손가락을 꼽아보니까 딸과 헤어질 날이 며칠 남지 않았고, 초복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보신탕이 생각나더군요. 해서 안방에 있는 딸을 불렀습니다.

"안나야, 오늘은 너하고 나하고 둘이 있으니까, 저녁에 '영신옥'으로 보신탕 먹으러 가자!"
"아유 아빠도, 며칠 전에 먹었는데 또 먹어요?"

"응, 그때는 탕을 먹었으니까, 오늘은 즉석에서 하는 전골을 먹어보자고. 네가 처음 보신탕을 맛있게 먹었던 집이거든. 그 집은 탕보다 즉석을 잘하는데, 고기 인심이 좋으니까 실컷 먹어보자." 
"그럼, 그렇게 하지요."

예전에는 의사를 물을 필요 없이 외식하면 최소한 "잘 먹었습니다."라는 인사는 받았습니다. 그런데 참외나 과자 한 봉지 사먹는 것까지 상의하고 눈치를 봤는데요. 건강하게 커 줬다고 감사해야 할지, 옛날 같지 아니 해서 서운하다고 해야 할지, 지금도 헷갈립니다.  

몸에 좋다는 음식을 자식이 좋아하면 빚을 내서라도 사 먹이고 싶은 게 세상 부모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입니다. 저도 다를 게 없는데요. 집에 있는 동안에 맛있는 음식을 한 가지라도 더 먹이고 싶었습니다. 딸과 함께 있던 스무날 동안 무엇을 먹어야 좋을지 고민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까요.

영신옥은 깻잎을 듬뿍 넣은 톱톱한 육수를 돌그릇에 담아 불판에 올려놓고 끓이다가 고기를 넣어 먹는 전골이 유명합니다. 고기 인심이 넉넉해서 수육을 따로 시킬 필요가 없는데요. 남은 국물에 밥을 한 공기 넣고 들기름을 몇 방울 떨어뜨려 비빔밥을 해먹으면 고소하고 개운한 맛이 그만입니다. 군산에서 소주 한 잔 걸친다고 하면 모르는 분이 없으니까요.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의 하늘. 석양이 반사되어 불게 물든 뭉게구름 두 덩어리가 ‘딸과의 보신탕 데이트’를 축하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의 하늘. 석양이 반사되어 불게 물든 뭉게구름 두 덩어리가 ‘딸과의 보신탕 데이트’를 축하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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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페이퍼코리아 철길을 걸어가는 딸. 처음 와본다면서 여기저기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행복했습니다.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페이퍼코리아 철길을 걸어가는 딸. 처음 와본다면서 여기저기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행복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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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석(전골)을 맛있게 먹고 식당에서 나오니까 석양이 반사되어 불게 물든 뭉게구름 두 덩어리가 '딸과의 보신탕 데이트'를 축하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길거리 자판기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경암동 페이퍼코리아 철길을 걸었는데요. 정겨웠던 공간의 여유를 잃어버린 녹슨 철길에서 딸과 시간여행을 하면서 형언하기 어려운 행복감에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네온 간판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해서야 마트에 들러 필요한 물건을 사서 밤거리 구경도 하면서 버스를 타고 집에 오니까 밤 9시가 넘었더군요. 딸과 데이트는 10여 년 만이었는데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예전의 나를 떠올리게 했던 딸

지난달 18일부터 함께 생활했던 딸은 폭우로 자취하는 방이 걱정된다며 7일 오후에 상경했습니다. 그동안 어머니 제사에도 참석하고, 호박잎에 된장찌개를 끓여 먹기도 했으며, 외식도 하고, 부둣가를 거니는 등 작지만 아름답고 의미 있는 추억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40년 가까이 단골로 다니는 떡갈비 집에서 갈비와 곰탕을 먹기도 하고, 보신탕집에서 아내는 삼계탕, 딸과 나는 보신탕을 먹기도 했는데, 한 달에 두세 번은 쇠고기 로스나 삼겹살을 먹으러 다니던 80-90년대 얘기를 하며 당시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함께 지내면서 놀란 것은 평소 생각하던 옛날의 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방 하나에서 함께 살았는데 그때보다 더 불편하고 부담이 가는 것 같았으니까요. 딸이 잠자는 방에 들어가려면 항상 노크를 해서 허락을 받아야했고, 속옷도 편하게 입지 못하는 등 항상 조심해야 했습니다.  

딸도 불편했겠지만, 저는 사둔 댁 꼬마손님만큼이나 어려웠습니다. 과일을 사먹거나 반찬거리 하나도 물어보고 상의했으니까요. 전화연락이 없을 때는 다시 보기 싫을 정도로 밉다가도 보면 반갑고, 조심스럽고, 더 오래 있고 싶은데요. 천륜은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거리를 거닐면서 "아빠는 어디를 가든지 항상 너를 데리고 다녔지!"라고 하니까, 딸은 "저를 생각해서 데리고 다니셨나요? 아빠가 좋아서 데리고 다니셨지"라고 하기에 "그래도 네가 원해서 함께 다닌 때가 더 많았단다"고 했더니 "그래요?"라고 하더군요.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학교 선택과 공부하는 방식은 물론, 영화관과 프로야구장에도 너랑 엄마랑 함께 갔고, TV 공개방송이나 서커스 공연, 마당놀이에도 함께 가서 즐겼는데, 선택권은 항상 너에게 있었다"고 하니까 웃으면서 "그랬었나요?"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조금은 수긍하는 눈치더군요. 

'어쩌면 그렇게 아빠를 빼닮았느냐!'는 말이 나오려고 해서 참느라 혼났는데요. '자신이 원해서 자식을 낳아놓고 효도하기만 바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을 어렸을 때부터 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날의 나를 떠올리게 하는 대답이어서 조금은 실망스럽기도 하지만, 특별히 서운한 감정은 없습니다. 딸도 저처럼 나이를 먹어 자식을 낳고, 마흔을 넘기고 쉰을 넘기면 지금 기억하지 못하는 추억들이 하나씩 떠오르면서 부모 사랑이 얼마나 깊고 소중한지 깨우칠 것이니까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http://www.shinmoongo.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숙녀, #딸, #보신탕,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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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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