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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과 두분의 집안 어르신이 예초기로 자른 풀을 나 혼자 정리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내 동작에 나도 내심 놀랐다
▲ 예초기로 자른 풀을 정리하는 모습 아버님과 두분의 집안 어르신이 예초기로 자른 풀을 나 혼자 정리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내 동작에 나도 내심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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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에 참여하기 위해 바짝 긴장해 고향으로


평소 같으면 시험준비를 위해 도서관에서 책을 봐야 할 시간인 금요일 오후 5시30분이 되어 차를 타고 고향으로 향했다. 9월에 접어들며 부모님께 '올해 벌초에는 꼭 참석할 테니 알려줘야 한다'고 몇 번이고 당부를 거듭했다. 하지만 나의 거듭된 당부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별로 탐탁해 하지 않으셨고, '내년부터 참석하라'고 오히려 만류하시곤 해 나를 긴장시켰던 것이다.

그래도 고집을 꺾지 않고 강한 의욕을 보이자 이번 주말에 하기로 했다고 수요일에 알려 오셨던 것이다. 고향인 논산으로 차를 운전하고 가며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올 정도로 기분이 상쾌했다. 때맞춰 날씨도 전형적인 가을 날씨를 보이며 차창으로는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 가슴까지 상쾌하게 했다.

운전하며 내 기억은 사고 후 1년이 지난 2006년의 추석을 앞둔 어느 가을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사고 후 80여 일 만에 의식을 회복하고 5개월여 할로배스트를 하고 있다가 제거 하자마자 처음 후송되었던 전북대병원에서 퇴원하여 서울의 영동세브란스와 신촌세브란스, 전주의 온고을 병원을 거쳐 다시 전북대병원에 입원해있던 2006년 추석을 앞둔 가을, 사랑하는 딸 형서와 집사람은 집에서 생활을 하고 나 혼자 입원생활을 하던 때다.

그러면서 막 재활 의욕이 일어 용기를 내어 병원 건물 밖에 나가 재활을 위해 병원구내를 걷기 시작한 때다. 다른 환자들의 문병객들이 벌초를 하고 온 복장으로 벌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으면서 비로소 '아, 내 고향에서도 사촌들까지 모두 모여 벌초를 하겠는데 난 거기 참석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얼른 부지런히 재활해 언젠가는 기어이 벌초에 참여하겠다고 혼자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혼자 결심하고 더욱 재활에 매진해도 별다른 성과가 없어 얼마나 많은 좌절을 겪었던가? 내심 많은 성취를 얻었다고 판단해 병원 뒤의 야트막한 산에 오르려 시도하다가 실패하고는 했던 게 몇 차례던가?

평지에선 자세가 잡혀 벌초에 참석하는 지금에도 그래서 불안했다. '그래, 올해도 실패할 수 있다. 너무 큰 기대는 하지말자. 실패하면 더 노력하면 된다.' 마음을 다잡으며 고향집으로 향했다. 2006년의 그 결심을 3년이 지난 2009년에 달성하려 내심 비장한 심정으로 고향집으로 향하는 것이다.

 밸런스와 코디기능이 망가져 경사를 오르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던것이 전혀 지장이 없었다.
▲ 경사를 오르는 것도 전혀 지장이 없었다. 밸런스와 코디기능이 망가져 경사를 오르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던것이 전혀 지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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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오르고 벌초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어 내심 놀라

2005년 사고 후 지금껏 재활에 몰두하며 '재활은 일상에 돌아가기 위한 몸부림'이란 생각이 들었다. 건강할 때는 사소하고 펑범한 일상들이 장애를 입고는 도전의 대상으로 바뀌더란 것이다. 가령 와이셔츠를 입을 때 작은 단추를 채우는 것, 걷는 게 불안하자 작은 형이 사용하라고 사서 택배로 부친 등산용 스틱 높이를 조절하려 조절 밸브를 돌리기 어려운 경우 등등 사소한 것들이 장애를 입고나자 어렵더란 것이다.

고향집에 가니 연로하신 부모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맞아 주셨다. 대전에 사시는 둘째형은 아침 일찍 벌초를 할 선산으로 온다 하고 학교에 근무하시는 큰형님은 학교 행사로 올해 참석이 어렵다고 하신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 기척에 깨니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어머니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계셨다. 가만히 들으니 사고로 장애를 입은 나에 관한 기도였다. 그 끔찍한 사고에서 80여일 만에 의식을 되찾고, 재활에 많은 성취를 얻게 된 게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된 게 아니고 저렇게 새벽마다 날 위해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기도 때문이라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왔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저녁에 예초기를 비롯한 벌초에 필요한 장비를 실은 내 차를 운전해 오늘 벌초를 도와주실 두 분 집안 어른을 모시러 갔다. 직장 때문에 아침에 벌초현장으로 와야 하는 형으로 인해 연로하신 아버님이 경운기로 8km이상 되는 거리를 예초기 등과 벌초를 함께할 친척 분을 태우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참여해 무쏘 스포츠인 내 애마(愛馬)가 그 위력을 발휘해 적재함에 넉넉히 싣고 모두를 태울 수 있었다. 사고 후 집안 식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시 운전을 시작한 내 결정이 옳았음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벌초를 위해 이동할때는 내 애마의 널찍한 적재함에 장비를 싣고 이동해 사고 후 운전을 강행한 내 결정이 옳았음을 다시 확인했다.
▲ 내 애마의 널찍한 적재함에 예초기등 벌초장비를 싣고 있다 벌초를 위해 이동할때는 내 애마의 널찍한 적재함에 장비를 싣고 이동해 사고 후 운전을 강행한 내 결정이 옳았음을 다시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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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오전에 벌초를 할 선산에 도착해 예초기를 메신 아버님과 집안 어른들이 먼저 올라가시고, 나는 둘째형이 나를 위해 준비해준 등산용 스틱을 짚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초기에 평지에서도 사용하다가 어느 정도 자세가 잡히자 일체 사용을 하지 않고 좀 어려운 곳에서 사용하려고 차에 싣고 다녔던 것이다.

2007년 추석에는 형들에게 성묘를 같이 가겠다 고집을 부려 따라나섰다가 두 형들에게 양쪽 어깨를 맡기고 질질 끌려 다닌 경험이 있던지라 이번에도 속으로 내심 상당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밸런스와 코디 기능이 망가진 나는 오르막에서는 균형을 유지하기가 더 어려웠던 것이다. 스틱을 짚고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하자 2년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스틱에 많이 의지하지 않고 그저 짚어 주는 것만으로도 오르막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오르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내심 걱정이 되어 먼저 오르시다가 기다리시던 아버님도 내가 오르는 것을 보시고는 안심이 되시는지 올라가셨다. 그렇게 벌초할 묘까지 올라 벌초를 시작하고, 난 갈퀴로 예초기로 자른 풀들을 모아 묘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친척 어른 두 분과 아버님까지 세 분이서 예초기로 베고 나 혼자 갈퀴로 뒷정리를 하는데도 거의 보조를 맞출 정도로 내 행동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간 열심히 재활에 임한 효과가 뚜렷하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는 사이 둘째형이 오고 둘째 큰댁의 사촌형과 내 또래 정호 사촌 장형과 사촌형, 조카가 속속 도착했다. 동갑내기 사촌인 정호와 사촌형들은 나의 참석을 생각지도 않다가 참석한 나를 보고 연신 놀라워했다. 더욱이 자기들에 비해 큰 차이 없이 일하는 나를 보고는 다들 감탄 해댔다. 어깨가 으쓱 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마음을 다 잡아도 사랑하는 딸 형서와 집사람과 떨어져 전주에서 혼자생활 하는 데서 오는 외로움은 날 힘들게 했다. 그럴 때마다 오늘 같은 상황을 상상하며 나태해지려는 마음을 다 잡곤 했다. 2007년 10월에 생활을 위해 사랑하는 딸과 집사람은 서울로 옮겨 생활을 시작했고 난 혼자 전주에서 생활하며 처절한 외로움에 시달리며 재활을 하며, 완전한 재기를 위해 끊임없이 모색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시간들이 힘들고 외로웠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철저하게 나를 돌아보게 되고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까지 재활을 염두에 두고 동작하는 집중력이 생기더란 것이다. 그때는 힘들고 외로웠지만 그런 상황들이 오히려 재활에 매진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생각한다.
시골의 대지주였던 할아버지가 애착을 가지시고 가꾸셔서 6.25때는 인민군의 훈련장으로 쓰였다는 '앞산'은 으레 넓게 벌초를 한다.
 시골의 대지주였던 할아버지가 애착을 가지시고 가꾸셔서 6.25때는 인민군의 훈련장으로 쓰였다는 '앞산'은 으레 넓게 벌초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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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동란시 인민군의 훈련장이었다는 '앞산' 벌초는 으레 넓게

그렇게 모든 가족들이 합류하여 선산에 있는 묘를 벌초하자 오전이 다 지났고, 점심식사를 위해 고향마을의 큰집으로 향했다. 아버님 3형제가 고향마을에서 사시다가 73년에 오토바이 사고로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 어머니 혼자서 커다란 집을 지키시며 사시는데 벌초를 위해 사촌 형수들과 어머니가 모여서 점심을 준비하신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시골 마을 대지주였던 탓에 널찍한 큰집마당에 들어서니 8순이 넘으신 큰어머니가 허둥지둥 뛰어나오시며 '올해는 조상님들이 치식이 너를 무지 반가워 하시겠다! 장하다'하시며 연신 손을 쓸어 대셨다.

그렇게 나의 재활 이야기가 화두에 오른 가운데 점심식사를 마치고 널찍한 마루에서 1시간 가량 휴식을 취하고는 바로 앞의 '앞산'에 있는 묘를 벌초하기 시작했다. 시골의 대지주였던 할아버지는 가뭄이 지면 앞산 바로 앞에 파놓은 못에 물을 퍼다 나르실 정도로 애착을 가지시며 가꾸셨다 한다. 편평하고 푹신한 잔디가 잘 가꾸어져 있어 온 동네 아이들과 곧잘 뛰어놀던 곳이다.

사촌 형들도 모두 앞산에는 향수가 서려있어 묘뿐만 편평한 곳은 벌초를 당연히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6·25전쟁 때는 북한군이 들어와 이 면을 관장하는 인민군 부대가 큰집을 강제로 접수해 본부로 사용하며 이곳 앞산을 그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거의 마무리가 되어갈 무렵 사촌형수가 새참을 내와 벌초가 되어 깔끔해진 곳에 둘러앉아 집안 대부인(부여서씨 집성촌인 이곳은 동네가 거의 한 일가로 이루어져 있다) 서달선(73· 논산시 가야곡면)씨의 6·25전쟁 체험담을 들었다.

이곳이 6.25때는 인민군의 훈련소로 쓰였다는 이야기를 집안 어르신인 서달선(73. 논산 가야곡면)씨에게 듣고 있다.
 이곳이 6.25때는 인민군의 훈련소로 쓰였다는 이야기를 집안 어르신인 서달선(73. 논산 가야곡면)씨에게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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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를 마쳐 말끔해진 앞산처럼 내 재활도 깔끔하게 완성하리라 다짐

그렇게 모든 벌초를 마무리 하고 고향집에 오니 오후 5시였다. 흘린 땀을 시원한 지하수로 샤워를 하고 나니 날아갈듯 상쾌했다. 푹 쉬고 저녁을 먹고 다시 전주로 오려고 나서니 어머니가 따라 나오시며, 사고 후 집사람을 붙들고 우시며 '힘들어도 참으면서 기도하자! 그러면 반드시 이 때를 옛말로 하는 날이 올게다'하셨다며, 네가 이렇게 벌초를 능히 하는걸 보니 정말 그때가 옛날이 되었다 하시며 흡족해 하셨다.

동네를 빠져 나오며 돌아보니 말끔하게 정리되어 시원하게 펼쳐진 앞산처럼 이제 곧 내 재활도 완성되리란 기대감이 밀려왔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게재 후 '다음 view'에 게재 합니다.



태그:#벌초, #5년만에 벌초참여, #재활, #뇌병변2급, #서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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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병변2급 장애를 가진 전주시 공무원으로 하프마라톤 완주를 재활의 목표로 만18년째 가열찬 재활 중. 이번 휠체어 사이클 국토종단애 이어 장애를 얻고 '무섭고 외로워'오마이뉴스에 연재하는 "휠체어에서 마라톤까지"시즌Ⅱ로 필자의 마라톤을 마치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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