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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의 관문인 도청항 전경. '슬로시티' 청산도는 사철, 이방인에게 뉘엿뉘엿 걸으라 한다.
 청산도의 관문인 도청항 전경. '슬로시티' 청산도는 사철, 이방인에게 뉘엿뉘엿 걸으라 한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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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끝자락, 완도의 여객선터미널. 배가 들어올 때마다 섬을 빠져나오는 이들로 붐빈다. 모두가 흐뭇한 표정들이다.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도 북적인다. 기대에 찬 상기된 얼굴들이다. 여객선터미널은 이방인에게 풍류객의 마음이 되라 한다.

이른 아침, 청산도로 가는 배에 올랐다. 여객선의 갑판 위에서 옥빛바다를 바라본다. 밤새 다림질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잔잔하다. 그러나 안개는 자욱하다. 일교차가 큰 요즘 흔한 현상이다. 대형 선풍기라도 틀어 안개를 날려버리고 싶다.

안개 너머 희미한 바다에는 자잘한 섬들이 펼쳐져 있다. 아름답다. 그 바다엔 고깃배들과 해조류를 양식하는 올망졸망한 경계선들이 보인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빗금을 그어 놓았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허물지 못한 빗금들을 바다는 그었다 지웠다 자유로운 영역을 만들고 있다.

청산도 가는 길. 바다엔 고깃배와 해조류 양식장이 올망졸망 떠있다.
 청산도 가는 길. 바다엔 고깃배와 해조류 양식장이 올망졸망 떠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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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다 위를 50분쯤 달렸을까. 해무사이로 청산도가 얼굴을 내민다. 청산도는 늘 가고 싶은 섬이다. 한번 들어가면 또 머물고 싶은 섬이다. 우리나라 영화 사상 처음으로 관객 100만 명을 훌쩍 넘긴 '서편제'를 촬영한 이후 널리 알려진 섬이다. 남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청산도는 언제나 고향 같다.

청산도는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슬로시티'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최첨단을 달리는 시대에 느리게 가는 미학이 주는 매력이 곳곳에 스며있는 곳이다. 만지작거리고 있던 휴대폰을 꺼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초분. 초가로 만든 무덤이다. 사진은 당리 돌담길 주변에 있는 세트 초분이다. 촬영용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초분. 초가로 만든 무덤이다. 사진은 당리 돌담길 주변에 있는 세트 초분이다. 촬영용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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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길을 따라 길을 나선다. '봄의 왈츠' 세트장이 있는 당리를 지나 구장리에 섰다. 몇 달 전에 만든 초분이 저만치 보인다. 초분은 시신을 땅에 묻지 않고 일정기간 초가로 만들어놓은 무덤. 한때는 이해할 수 없는 장례방식이었다. 이방인의 시선엔 비위생적이고 번거로울 뿐이었다.

그러나 청산도 사람들은 초분을 효도의 한 방법으로 여긴다. 고인을 가까이 모셔두고 가끔 찾아볼 수 있는 장점 덕이다. 날송장을 선산에 묻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고도 한다. 살과 물이 다 빠진 깨끗한 뼈로 선산에 가는 게 조상에 대한 예의라는 것이다. 고기잡이를 위해 먼 길을 나간 가족을 기다리는 의미도 담고 있다.

초분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선 지혜로운 장례법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초분 장례 풍습은 바다에 기대 사는 사람들의 특수한 여건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섬 지역 특유의 풍습이고 자랑스런 문화라고.

공동우물. 권덕리 돌담길과 맞닿아 있다.
 공동우물. 권덕리 돌담길과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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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고구마. 권덕리 밭에서 한 할머니가 흰색 고구마를 캐고 있다.
 흰 고구마. 권덕리 밭에서 한 할머니가 흰색 고구마를 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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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분을 지나 닿은 곳은 권덕리. 돌담길이 정겹다. '서편제'로 알려진 당리의 돌담길 못지 않다. 그 길을 따라 들어가니 공동우물이 보인다. 빨래나 목욕 같은 걸 하지 말라는 푯말이 마실 물이라는 걸 대변하고 있다.

돌담으로 경계를 표시한 밭에선 한 할머니가 고구마를 캐고 있다. 하얀 고구마다. 진황색 고구마보다 훨씬 더 달고 맛이 좋단다. 한번 맛을 본 외지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게 할머니의 얘기다. 할머니는 "몇 개 가지고 가서 맛을 보라"고 하신다. 이방인에게 선뜻 고구마를 권하는 마음이 넉넉하다.

들꽃. 범바위 오르는 산길에서 만난 정겨운 꽃들이다.
 들꽃. 범바위 오르는 산길에서 만난 정겨운 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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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바위 가는 길(왼쪽)과 범바위. 청산도 주변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범바위 가는 길(왼쪽)과 범바위. 청산도 주변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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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탄바위와 범바위 산행에 나선다. 권덕리와 청계리에 걸쳐 있는 말탄바위와 범바위는 청산도에서 전망이 제일 좋은 곳이다. 산길에는 구절초가 많이 피었다. 이름 모를 아름다운 꽃도 많이 피었다. 산머루와 보리똥도 보인다. 몇 개 따서 입에 넣어본다. 달콤한 맛이 어릴 적 동심으로 씹힌다.

범바위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완도의 옥빛바다가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디까지가 바다인지 구별이 쉽지 않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하늘과 마주 닿아있는 것 같다.

전설에 의하면 이 곳에 호랑이가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범바위'란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그 호랑이는 자신의 우는 소리가 범바위에 크게 울려 더 무서운 짐승이 여기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도망쳤다고 한다.

구들장논. 바닥에 평평한 돌을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논을 만들었다.
 구들장논. 바닥에 평평한 돌을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논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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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탄바위와 범바위를 거쳐 내려와 해안도로를 타고 닿은 곳은 양지리. 저만치 구들장논이 보인다. 가파른 산을 깎아 층층이 만든 논들이다. 바닥에 평평한 돌을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었다. 잡초 때문에 잘 보이진 않지만 논 사이에 물이 자연스럽게 아래쪽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배수구도 따로 만들어 놓았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논이다. 말이 논이지 흙을 걷으면 순전히 돌이란다. 물이 귀하고 산과 돌이 많은 지형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논바닥에 구들장을 깐 논들이 수백 년의 세월 속에서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자연을 극복하려는 조상의 슬기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진산리 갯돌밭에선 어민들이 김발에 포자를 이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파도가 몰려갈 때마다 들려주는 청신한 소리는 이방인의 귀에만 신기하게 들려올 뿐, 어민들의 손길은 분주하기만 하다. 지리해변의 은빛모래도 곱다. 백사장을 둘러싼 해송 수백 그루도 운치를 더해준다.

청산도. 범바위 가는 길에 만난 풍광(왼쪽)과 진산리 갯돌밭에서 김발 작업을 하고 있는 어민(오른쪽).
 청산도. 범바위 가는 길에 만난 풍광(왼쪽)과 진산리 갯돌밭에서 김발 작업을 하고 있는 어민(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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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를 떠올리면 영화 '서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아들 동호(김규철)의 북장단에 맞춰 유봉(김명곤)과 딸 송화(오정해)가 어깨에 흥을 얹고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지나던 당리 황톳길은 지금도 여전히 예스럽기 때문이다. 애틋한 그리움도 자극한다.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도 멋스럽다. 소를 이용한 쟁기질 풍경도 만날 수 있다. 당리마을과 맞닿은 도락리 마을의 해안가 풍경도 아름답다. 구장리 쪽의 층층이 논도 한 폭의 그림이다.

돌담과 공동우물, 구들장논, 갯돌, 모래해변, 이름 모를 들꽃 하나까지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는 청산도다.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이곳 사람들의 소박하고 유순한 심성은 슬로시티 청산도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이래저래 멋진 섬이다. 바다도 파랗고, 산도 하늘도 파란 청산도. 꾸미지 않아서 더 아름다운 섬 청산도. 섬 전체를 유채꽃으로 노랗게 물들이는 4월과 보리가 익어 황금색으로 채색되는 5월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늦가을의 청산도도 내게 뉘엿뉘엿 걸으라 한다.

돌담길. 영화 '서편제' 이후 유명세를 타고 있는 당리 돌담길. 저만치 '봄의왈츠' 세트장이 보인다.
 돌담길. 영화 '서편제' 이후 유명세를 타고 있는 당리 돌담길. 저만치 '봄의왈츠' 세트장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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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청산도, #슬로시티, #범바위, #완도, #초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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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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