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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하도 바빠서 올해는 사회활동 안 한다고 했는데 또 안됐어."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학자 이이화씨(73). 사회활동을 하지 않겠다지만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에 '진실과 미래, 국치 100년 사업 공동추진위원회' 공동대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상임 대표까지 역사와 관련된 단체들마다 이 이사장의 이름이 제일 앞에 보인다. 이 단체들은 이름이 길면서 사회적 인정보다는 당위와 책임이 크다는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다.

경술국치 100주년 추진위 이이화 대표
▲ 역사학자 이이화 경술국치 100주년 추진위 이이화 대표
ⓒ 김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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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한다고 해도 자꾸 누가 꼬시면 쉽게 넘어가 어쩔 수 없이 이일저일 맡게 됐다"는 이이화 이사장. 며칠 전 생활, 문화, 주거 등 우리의 생활로 보는 역사서 '문화로 본 한국역사' 1차 원고를 넘겼다. 외국인들을 위한 번역작업과 동시에 올해는 '한국인권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이이화 이사장.

사회문제와 역사에 대해서는 퉁명스럽게 '툭툭' 던지던 그가 개인적인 이야기에는 솔직함과  '장난끼'를 담아 분위기를 풀어준다. 지난 2월 초, 얼음이 녹지 않은 헤이리 예술인마을에서의 이이화 이사장과의 만남은 충분히 의미있고 즐거웠다.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시리즈, 인물로 읽는 한국사 시리즈, 만화한국사 이야기 시리즈, 녹두장군 전봉준…. 이이화 이사장은 매년 1권 이상의 역사서를 써내는 다작으로 유명하다. 대부분 긴 시리즈물인데 저서들에는 그만의 역사관, 민족관이 담겨있다.

왕가와 실록 중심의 기존 역사서와는 달리 그의 글들은 백성들의 자취가 짙게 배인 생활사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 봉건적 질서가 아닌 민중의 삶에 기반한 역사를 이 시대에 전달하기 위한 역사 재평가 작업은 역사서의 마니아층을 만들어내고 있다. 

민중의 삶, 생활사를 역사로

이이화 이사장은 1937년 주역의 대가인 야산 이달 선생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대둔산에 들어가 한학을 배우다가, 부산과 광주 등지에서 혼자 힘으로 학교를 다녔다.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온 그는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우리 역사에 대한 매력을 찾게 된 이 이사장은 작가의 꿈을 접고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알려내는 일에 힘을 쏟아왔다. 역사 속에서 평가받지 못하고 있던 인물들을 오늘의 관점에서 다시 써내려가는 역사인물 연구도 그의 영역이었다. 저술과 사회활동만으로도 바쁘지만 이이화 이사장은 '역사의 대중화'를 위해 작은 도서관의 부모 모임 강의도 마다하지 않는다.

"내가 한번 글을 쓰기 시작하면 10시간씩 일주일을 쉬지 않고 쓰거든. 그리고 잠시 쉴 때는 대화도 하고 싶어. 그럴 때 나를 부르면 가는데 고양시 도서관 엄마 모임에 가서 강의도 자주 하고 그랬지. 역사기행도 다니고."

도서관 모임도 부르면 언제든

어린이용 역사서와 <만화로 보는~> 시리즈물도 역사의 대중화를 위한 작업들로 이 이사장이 공을 들이고 있는 분야다.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더불어 살 수 있다"는 그의 신념 덕분이다. 그런 얘기를 하다가 이 이사장은 버럭 화를 낸다.

"요새 학부모들,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자기 자식 그렇게 키우는 사람 얼마나 돼. 100명중 한명이나 될까. 어떻게든 영어 잘해서 미국 대학 보내고 싶은 거지. 유치원 때부터 좋은 데 보내려고는 줄서면서 우리 역사는 안 가르쳐."

그러고 보니 이 이사장의 집은 파주 영어마을 바로 앞에 있다. 최근 역사가 선택과목으로 바뀌고, 얼마전 역사 교과서 수정 논란까지 떠올리며 "현 정권이 역사의식이 전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반적으로 문화수준이 높아지긴 했다. 그러나 좌우가 대립하고, 사회적인 갈등이 고조되면서 근현대사를 잘 다루지 않으려고 한다. 오히려 고대사를 자꾸 끄집어낸다. 선덕여왕이니 미실이니, 있지도 않았던 이야기에 집착한다. 근현대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른다. 바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다."


고대사 끄집어내기 "걱정돼"

경술국치 100주년 추진위 이이화 대표
▲ 역사학자 이이화 경술국치 100주년 추진위 이이화 대표
ⓒ 김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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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가 역사가 되고, 우리 조상들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일 때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으로의 삶'을 고민할 수 있다고. 답답해하는 이이화 이사장에게 지금의 역사가 혹시 '퇴행'하는 게 아니냐는 우문을 던져보았다.

"역사는 꾸준히 발전하는데 중간에 역류가 있는 것이지. 역류가 지나가면 다시 역사는 본래의 큰길을 가게 되지. 예전에는 정권이 부정선거도 했지만 지금은 그렇게는 못하잖아."

당연한 정답이지만 이 이사장이 요즘 맡고 있는 일들을 생각하면 답답할 터.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진실과 미래, 국치 100년 사업 공동추진위원회'는 작년 4월 민족문제연구소,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 50여개 단체가 모여 출범했다.

올해가 경술국치 100주년으로 일본의 시민단체들과 함께 과거사 청산을 통해 새로운 한일관계, 미래를 위한 역사를 만들어내기 위한 단체다.

"역사적 진실을 이해하고 이제는 싸우지 말고, 반성할 것은 반성하자는 것이다. 일본의 민주당 정권도 과거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이다.

우리도 부끄러운 역사라고 끄집어내지 않으면 반성은 어떻게 할 수 있겠나. 독도 문제도 일제 침략 후 이뤄진 것이고 분단국가로 남은 것도 1차적 원인은 조선의 식민지화에 있다. 경술국치는 미래를 위해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야할 역사다."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중단 "아쉽다"

이이화 이사장은 지금의 정부는 '근거가 없는' 건국 60주년을 외치며 역사 재조명에는 관심이 없다고 지적했다. 위원회는 일반시민, 청소년들에게 올해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내기 위해 역사발표회, 역사기행 등 대중화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특수법인으로 발족해 자리를 잡게 돼 이사장 자리는 조만간 정리할 생각이다. 그런데 쉽게 정리하기 어려운 일이 남았다.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가 결과가 나오지도 않은 진실규명 작업을 중단하게 됐기 때문이다.

"올해 4월까지 임기인데 고작 3개월 연장시켜준다는 거야. 결과가 뭐야. 반도 못 끝냈는데 무조건 중단하라는 건 진실규명 안 하겠다는 거지."

역사의 진보를 누구보다 굳게 믿는 이이화 이사장이기에 '역사의 역류'를 보며 답답할 수밖에 없나보다. 잘 보이는 곳에 꽂혀진 '세계인권사상사'를 가리키며 한국의 인권사를 정리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역사 이래 우리 역사의 인권유린 문제를 집중 조명해야지. 민주화과정에서, 또 민간인학살 사건도 명백한 인권유린의 역사지."

사회활동을 안 하겠다지만 그러고 보면 이이화 이사장은 2008년 통합민주당 국회의원 공천심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고양시에서 발족한 지방선거 준비 시민연합인 '무지개연대' 행사에도 참여해 축사를 했다.

"민주당에서 하도 죽을 지경이라고 해서 갔는데 공천심사위 맡은 건 지금도 후회해. 정치가 꼭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나라는 문인, 학자들이 정치에 끼면 곱게 보질 않아. 무지개연대는 정치라기보다는 시민들이 모였다고 하기에 갔지. 이번 지방선거에 다들 참여해서 지방자치가 제 길 찾아가게 해야지."

파주 헤이리에 3년 전 이사와

파주 헤이리 이이화선생의 집
▲ 이이화 선생의 집 파주 헤이리 이이화선생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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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이사장은 헤이리에는 3년 전에 이사왔다. 그전까지 아차산 근처에 살았는데 한길사 김언호 대표의 '꼬임'에 넘어갔다고. 아내의 뜻에 따라 옮겨왔다는 헤이리에 대해 이 이사장의 불평이 끝이 없다.

"내가 맥주를 좋아하는데 광화문에서 한 잔 먹고 택시타고 오면 4만원 나와. 주말엔 사진찍는다고 사람들이 많이 와. 처음에는 내가 산다고 사람들이 맥주를 사들고 온단 말이지. 하도 많이와 일을 못하게 돼서 내가 누가 와도 못 들어오고 술만 놓고 가라고 했지. 그러니까 이젠 아무도 안 와."

자신의 '괴팍스러움'을 이야기하는 이 이사장의 표정이 개구쟁이 같다. '투덜거림'과 달리 이 이사장은 민족이 통일을 누구보다 염원하는 자신에게 개성가는 길에 머물게 된 것이 필연처럼 느껴진단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이 이사장의 건강 비결이 궁금했지만 원하는 답은 끝내 얻지 못했다. 이 이사장은 스스로 '제멋대로' 일하고 생활한다고 표현했다. 일은 몰아서 한꺼번에 하고, 잠도 아무 때나 잔다.

아침 6~7시까지 일하고 TV보다가 아침에 잠이 들기도 한다. 그러니 오전 약속은 절대 사절. 담배는 하루 한 갑만 피려고 '노력한다'. 술은 맥주만 마신다. 다음 만남에는 맥주를 사가지고 가 건강 비결을 알아내야 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고양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이화, #역사학자, #경술국치, #민간인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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