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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변호사라고 하면 날카로운 이미지, 딱딱하고 세련된 양복 등을 떠올린다. 법정에서 논리적인 변론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인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거제 사람, 김한주>를 쓴 김한주 변호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런 이미지와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저자는 대학 시절 대개의 386세대들이 그러했듯 강의실보다 거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두 번의 옥살이 끝에 <거제신문>의 기자가 된다.

 

기자 생활을 거쳐 변호사가 되었다는 그의 특이한 이력은 '시골 변호사'라는 그의 별칭과 어울린다. 좌충우돌 시대를 고민하며 백수 시절을 보내고, 사법 시험 합격 후 서울에서 법률 사무소를 운영하다 뜻한 바가 있어 고향 거제로 돌아왔다는 김 변호사. 그가 전하는 시골 변호사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변호사 선임 비용만 해도 거제와 서울은 많이 다르다. 서울의 경우 대부분 사무장이 계약을 하고, 변호사는 보고만 받는 체계다. 처음 고향에 왔을 때 나도 그런 체계로 운영했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직접 상담하다 보면 깎아달라는 어르신들도 많고, 사무장이 계약한 경우에도 계약한 후에 따로 찾아와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며 부탁하는 분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어찌어찌하다 보면 다 아는 사이니 뻔히 사정을 알면서 억지로 비싼 선임료를 받아내기도 어려운 게 시골 변호사의 현실. 저자는 "그래도 시골 변호사로 일하며 뿌듯한 점이 많다"고 얘기한다.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 어리바리한 동네 건달의 변호를 성공리에 마치거나,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도울 때가 그런 경우다. 

 

책에는 시골 변호사의 일상만 그려진 게 아니라 법조인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함께 담겨 있다. 2007년 민중대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일을 두고 '원천 봉쇄'는 군부 독재 시절 이후 낯선 단어라고 꼬집어 말한다. 폭력 시위가 우려된다는 경찰의 판단이 헌법과 법률보다 위에 있는 세태에 대한 통탄은 누구나 공감할 내용일 것이다.

 

저자의 날카로운 시각은 커피 한 잔, 축구공 하나에서도 의미를 찾는다. 한적한 오후에 여유로이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주말에는 동호회에서 축구를 즐기는 현대인들. 그 커피 한 잔과 축구공 속에 노동 착취에 시달리는 빈곤한 국가 어린이들의 피와 땀이 어려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지낸다.

 

"재물은 분뇨와 같아서 한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저자는 경주 최부자 집안의 금언을 인용하면서 요즘 부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부재를 이야기한다.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며 만석이 넘으면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에는 남의 땅을 사지 마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와 같은 최부자 집의 가훈은 가진 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재산을 정당하게 모으는 법을 강조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며, 재산을 통해 부와 권력을 함께 추구하지도 않으려 했다는 최부자 집의 모습은 현대인들에게도 모범이 된다.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은 상해 임시 정부에 재산의 많은 부분을 독립 자금으로 내놓았고 살던 집을 비롯한 나머지 재산도 대구대학과 계림학숙을 세우는 데 썼다고 한다.

 

이로써 최부잣집의 부는 없어졌지만 그 부는 가난한 사람들과 조국 독립, 현대 교육의 밑거름이 되었다. 해방 후 김구 선생이 사람을 보내 최준을 찾았으나 최준은 '새로운 조국 건설에 바쁠 터인데 나까지 시간을 뺏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거듭되는 청에 둘의 만남은 성사되었는데 이때 김구 선생이 책 한 권을 선물했고 그 내용은 바로 최준이 보낸 독립 운동 자금의 사용처와 영수증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지금의 대한민국 부자들의 모습에 대해 비판한다.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만들고 자신들의 자식에게는 온갖 편법으로 재산을 물려주면서 그 기업을 만든 노동자에게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부자들. 막대한 자본으로 언론을 소유해 여론을 조작하는 재벌들도 있고, 돈으로 권력을 사는 사람들도 흔한 세상에서 현대판 최 부자를 기대하기란 꿈만 같은 일인가!

 

책에는 저자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도 나타나 있다. 진정으로 권력이 바뀌기 위해서는 그동안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소외되어온 이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혁신적이다. 기존의 사회 질서와 질적으로 다른 질서를 만들고 기존의 낡은 가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는 권력을 창출해야 한다는 생각 또한 변화에 대한 절실한 촉구가 엿보인다.

 

자신을 전형적인 386세대로 규정하는 저자는 요즘 매스컴에서 386세대를 비판하는 걸 보며 '나도 저렇게 비판받을 짓을 하고 사는가?' 하고 존재와 정체성을 고민한다고 한다. 80년대를 살아오면서 독재에 항거하고 민주적 소양을 갖추어온 이들이 현재 혼란을 겪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시대와 역사는 386세대에게 많은 것을 주문하고 있다. 저자는 2000년대의 386세대가 가야할 길을 이렇게 말한다. 자신들이 사회의 진보와 정의를 스스로 만들고 만든 것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말이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정치 모리배들 뒤나 따라다니며 구태를 답습하는 일부 386 정치인들을 보면 답답한 마음이 든다.

 

도시의 뻔한 일상과 고급 로펌 생활을 접고 시골로 내려간 만큼 책의 저자는 자기 나름의 가치관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저자의 말처럼 현재의 우리는 여전히 민주적이지 못한 채 가진 자 중심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뭔가 변화가 필요한 현실에서 저자와 같이 올바른 생각을 가진 지식인의 목소리가 좀더 크게 울리길 기대한다.


거제 사람, 김한주 - 시골 변호사의 세상 이야기

김한주 지음, 리더스&리더스(Readers&Leaders)(2009)


태그:#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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