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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들어가는 길

다산초당 가는 길
 다산초당 가는 길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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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는 산길로 걸어서 20분이지만, 차를 타고 왔으니 돌아갈 수밖에 없다. 다산초당은 만덕리 귤동 마을을 지나 산으로 한참 올라가야 한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돌담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로 들어서 다산초당을 찾으려고 하나 안내판 하나 없고 기와집만 여기 저기 보인다. 우선 길 왼쪽에 괜찮은 기와집으로 들어선다.

넓은 정원 뒤로 두 채의 기와집이 ㄱ자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가까이 가 보니 방마다 추사체로 쓴 현판이 걸려 있고, 방 안에서는 독경 소리가 들려온다. 이 집이 다산초당일까? 그렇지야 않겠지! 귀양을 와서 이렇게 큰집에 살았을까? 집을 나와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니 다산명가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한옥과 양옥이 공존하는 민박집 겸 식당이다.

정다산 유적 안내판
 정다산 유적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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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을 지나 조금 더 산길로 올라가니 정다산 유적(사적 제107호)이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안내판에는 유적에 대한 설명과 다산초당 지도가 나온다. 다산은 1801년 신유사옥과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이곳 강진으로 유배된다. 그는 사의재, 고성사 보은산방 등을 거쳐 1808년부터 이곳 귤동 마을에 거처를 정한다. 이곳에서 다산은 유배가 풀리는 1818년까지 글 일기와 집필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 결과 나온 책들이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이다.

뿌리의 길과 돌의 길

뿌리의 길
 뿌리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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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에 이르는 길은 산 속으로 나 있는 오솔길이고 등산길이다. 처음에는 비교적 완만한 오름길이다. 초입에는 대나무가 보이고 차츰 올라가면서 참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하다. 길에는 돌부리도 많아 조금은 조심해야 한다. 산길을 절반쯤 올라갔을까? 뿌리의 길과 돌길이 나타난다.

뿌리의 길은 소나무 뿌리들이 밖으로 드러난 채로 뒤엉켜 만들어진 길이다. 시인 정호승은 '뿌리의 길'에서 세월의 흔적뿐 아니라 다산의 숨결을 느낀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구절에서는, 글로써 자신의 의지를 표현한  다산의 삶을 보는 듯도 하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달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할
길이 되어 눕는다. 

돌의 길
 돌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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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의 길을 지나면 돌의 길이 나타난다. 돌의 길은 뿌리의 길보다도 더 불편하다. 돌이 울퉁불퉁할 뿐만 아니라 돌이 길을 다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산은 이 돌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처럼 불편해 했을까? '겨울에 내를 건너듯 조심'했던 다산으로서는 오히려 돌길에 감사했을지도 모르겠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또 어둡고 음습해 산책로나 등산로로는 그렇게 좋지 않은 편이다. 이렇게 어렵고 음습한 길을 올라야 다산초당에 이를 수 있다. 초당에 이르는 마지막 길은 최근에 돌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계단을 오르니 평지에 다산초당이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1958년에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다산초당

다산초당
 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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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유적지는 현재 네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다산초당을 중심으로 서암과 동암 그리고 천일각이다. 이들 건물은 모두 기와를 얹은 모습인데 모두 근세에 다시 지어졌기 때문이다. 동암과 서암은 1976년에, 천일각은 1975년에 지어졌다. 다산초당도 말 그대로 초가였을 테지만 현재는 기와집으로 변해 있다.

다산의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을 통해 우리는 당시 이곳 다산의 옛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다.

정석(丁石)
 정석(丁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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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년(1808, 순조 8) 봄에 다산(茶山)으로 옮겨 대(臺)를 쌓고 못을 파서 꽃나무(花木)를 벌여 심고 물을 끌어들여 비류폭포(飛流瀑布)를 만들었다. 그리고 동암(東庵)과 서암(西庵) 두 집을 수리해 1천여 권이나 장서하고 글을 지으면서 스스로 즐겼다. 다산은 만덕사(萬德寺) 서쪽에 있는데, 처사(處士) 윤박(尹博)의 산정(山亭)이었다. 석벽(石壁)에 정석(丁石) 2자를 새겨 표지하였다."

현재 다산초당 자리 동쪽에 못을 파고 연지석가산을 만들었을 것이고, 비류폭포 물이 이 연못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다산 초당 뒤로 가면 석벽이 있는데, 이곳에 자신의 성인 정(丁)자를 써 정석이라고 새겨 넣었다. 초당의 바로 서쪽에는 서암이, 산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동암이 있는데, 이들 건물은 응접실 또는 서재로 사용했을 것이다.

다조(茶?)
 다조(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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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이들 외에 초당 앞마당에 다조(茶竈)가 있다. 다조란 차를 달이는 부뚜막을 말한다. 다산은 아침에 이곳에서 차를 달여 마시고, 저녁에는 서재에서 홑이불을 덮고 잤다고 쓰고 있다. 한마디로 청빈하면서도 절제된 삶이다. 현재 다산초당은 툇마루에 세 칸짜리 방이 있고, 그 위에 기와지붕을 얹어 옛날의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을 것이다.

동암과 천일각

다산초당에서 동쪽 산길을 따라 오르면 동암이 나타난다. 동암은 송풍루(松風樓)라고도 하는데, 일종의 집필실로 쓰였던 것 같다. 다산은 칠언율시로 된 16편의 '송풍루 잡시(雜詩)'를 썼는데, 이곳에서 자신의 유배생활을 산중처사에 비유하고 있다. 다음은 그 중 첫 번째 시이다.

산에 사노라니 만사가 한적하기만 해            山居無事不蕭閒
새로 지은 띳집이 딱 두 칸이라네.                新縛茅庵只二間
방은 겨우 병든 몸 기거할 정도이고              製室僅堪容病骨
들창은 청산을 대할 만큼 냈다네.                 鑿窓聊可對靑山
소나무 바람소리 피리이자 거문고요             四時笙瑟松風響
푸르른 바위들이 병풍이요 장막이지.            一面屛帷石翠班
이천 권 서책이 가득 쌓여 있기에                 爲有縹緗二千卷
언제나 문에 들어 기쁜 얼굴로 그를 본다네.   入門相見每歡顔

동암
 동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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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동암에는 현재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하나는 다산의 글씨를 집자해 만든 다산동암으로 건물의 한가운데 있다. 그리고 그 왼쪽으로는 추사의 친필을 모각해 만든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보정산방이란 보배로운 정씨가 살던 산속의 방이라는 뜻이다.

이곳 동암을 지나 능선쪽으로 오르면 앞이 탁 트이는 곳에 누각이 하나 나타난다. 이것이 천일각(天一閣)이다. 천일각은 '하늘 끝 한 모퉁이에 있는 누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을 줄인 말이다. 이 누각은 다산의 귀양 시절에는 없던 것이나, 1975년 강진군에서 새로 세웠다고 한다.

천일각에서 내려다 본 구강포 풍경
 천일각에서 내려다 본 구강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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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누각을 세운 이유는 다산 선생이 바다를 보고 싶을 때나 흑산도에 유배 중인 형 약전이 생각날 때 올랐을 것이기 때문이란다. 이 누각에 올라 구강포 쪽을 내려다보면 정말 속이 탁 트인다. 그것은 다산초당과 동ㆍ서암이 울창한 숲속에 자리잡아 조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곳 천일각에서 동북쪽으로 산길을 800m쯤 따라가면, 혜장선사가 주석하던 백련사에 이를 수 있다.


태그:#다산초당, #뿌리의 길과 돌길, #정석과 다조, #동암과 서암, #천일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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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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