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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때

돌아 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 나태주 '행복' 전문

 

<돌아갈 수 없기에 그리운 보랏빛>(푸른길 펴냄)은 나태주 시인의 산문집이다.

 

나태주(64) 시인은 2007년 3월 췌장암 진단과 함께 '1주일 내 사망 선고'를 받았다. 이미 장지까지 마련할 만큼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렇게 몇날 며칠 사경을 헤매던 시인은 기적처럼 죽음을 떨쳐낸다.

 

'행복'이란 이 시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란 글에 있다. 시인의 투병에 대해 알고 있었던지라 '혹시 병원에서 쓴 글이 아닐까' 어림짐작, 먼저 찾아 읽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이다.

 

…수술 받는 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알고 찾아온 이곳 병원에서는 수술해도 살기 어렵고 수술하지 않아도 살기 어렵노라는 말을 의사로부터 들었다. 또 암보다도 탈출하기 어려운 병이란 말을 듣기도 했다. 내가 생각해 보아도 오늘날 이렇게 숨쉬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하겠다. 아니, 기적 바로 그것이다. 그런 마당에 무엇을 더 바라고 욕심내고 바라겠나.

 

이렇게 생각을 고쳐 갖기도 해 보지만 나도 모르게 은근하게 솟아오르는 느낌과도 같은 것,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공주로 돌아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의 산이며 들판, 강물을 둘러보아야지. 공주 사람들을 만나고 공주의 거리를 천천히 걸어 보아야지. 하마터면 만나보지 못할 뻔 한 것들. 그리운 것들…. -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 병원에서 쓴 글' 중에서

 

죽음을 떨친 시인은 이후 7개월에 걸친 투병을 한다. 역시나 그렇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란 글은 105일 동안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하고 링거액에 의지하던 시인이 간신히 물을 마시게 되면서 병원에서 쓴 글이란다.

 

여러 날 동안 혼수상태로 죽음과 싸우다 이제 막 살아난 한 생명이 삶의 희망을 다시 끌어 잡으며 썼을 터라, '행복'이란 시는 특별하게 와 닿았다. '그동안 나는 너무나 행복과 희망에 겸손했구나. 이젠 좀 더 많이, 뻔뻔하게 욕심내고 가져봐야지'란 생각과 함께.

 

이어지는 글은 '집으로 돌아오다'. "퇴원해도 좋다"고 담당의사는 말했지만, 그래도 혹시 발목을 잡는 일이 다시 생기고 그리하여 퇴원이 또 미뤄지면 어쩌나. 퇴원 직전까지 노심초사하던 시인은 자신을 태운 아들의 차가 집을 향하자 집으로 돌아가는 행복과 감사에 휩싸인다. 퇴원 후 집에서 맞는 첫날밤의 감회와 행복이 글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아들 내외도 돌아가고 부부만 남자 둘은 이미 약속이라도 했었던 듯 큰 소리로 기도한다. 그와 함께 큰 눈물을 쏟고 만다. 그리고 그동안 얼마나 돌아오고 싶었던 집이면 제자리에 걸려있는 벽시계가 고맙고 싱크대 위에 널린 자잘한 살림살이들마저 고마울까.

 

그 고마움에 시인은 오죽하면 '모든 게 제자리에 있다는 것은 하나의 미덕이다. 그것은 편안함이고 질서이고 한 아름다움이기도 하다'고 감탄한다.

 

하마터면 영영 다시는 보지도 만나지 못할 것들, 건강할 때는 소중한지도 아름다운지도 전혀 몰랐던 것들에 대한 사랑과 감탄이 산문집의 글 곳곳에 절절하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아마도 나처럼 책을 읽다가 주변을 자꾸 기웃거리리라. 어제까지는 지루한 적도 있지만 어제처럼 변함없는 일상, 그 새삼스런 소중함 때문에.

 

 

이외에도 삶의 진정한 목적과 가치를 묻는 '정말 정상에는 휴식이 있는 걸까', 유치원생 꼬마와의 작은 우정을 그린 '사람 꽃송이 하나', 수십 년간의 교직생활과 시인으로서의 생활, 그간 만났던 사람들을 돌아보는 글들이 실려 있다. 

 

나눔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차 나누는 사이', 아름다운 인연의 향기에 가슴이 훈훈해지는 '쑥 개떡'은 그립기도 하고 미안해지기도 하는 내 삶의 인연들을 떠올리면서 조금 특별한 심정으로 읽었지 싶다.

 

책의 제목이 된 글은 시인으로 등단하게 된 시 '대숲 아래서'는 그 숨은 이야기들이다. 누구에게나 떠올리고 싶지 않고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은 있기 마련인가 보다. 시인은 오랫동안 아내가 아프고, 동료와 술 한 잔 나누지 못할 만큼 옹색했던 셋방살이의 신혼을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로 손꼽는다.

 

"속아 사는 인생조차 아름답다."

"이만큼이라도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시인은 이처럼 우리들의 삶을 위로한다. 이미 죽음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긴 사람의 말이라 그럴까. 책을 통해 만나는 삶의 소중함도 지친 삶을 위로하는 말들도 뼛속 깊이 오롯하게 와 닿는다. 감동도 울림도 그만큼 크고 깊다.

 

<돌아갈 수 없기에 그리운 보랏빛>은 몸에 찾아든 병마와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싶은 책이다.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싶은 책이다. 나태주 시인의 희망과 격려가 불치병까지 이겨낼 수 있는 건강한 바이러스가 되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나이 예순을 넘기고 교직에서도 물러나고, 한동안 목숨을 내놓고 앓고 나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나 살아가는 태도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다분히 염세적인 사람, 불평이 많은 사람이 변하여 낙천적이고 불평 거리가 별로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현재의 생각은 '이만큼이라도 얼마나 고마우냐'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고 보니 점점 더 감사한 일이 생기고, 세상에 대한 욕심이나 불평이 별로 없으니 자연히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살아오면서 나는 무엇인가 성취하는 것만이 행복이요, 보람이라고만 여겼었는데, 그저 멍하니 앉아 있는 것도 행복한 일이고, 앞산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도 고마운 일이고, 새들의 울음소리에 귀를 팔고 있는 것도 꽤나 기쁜 일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 책머리에

덧붙이는 글 | <돌아갈 수 없기에 그리운 보랏빛>|나태주 (지은이)|푸른길|2010-07-12|값:12,000원 


돌아갈 수 없기에 그리운 보랏빛

나태주 지음, 푸른길(2010)


태그:#나태주, #산문집, #공주문화원, #대숲 아래서, #푸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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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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