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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인 김정은이 지난 28일 열린 당대표자회에 참가한 모습이 북한 조선중앙TV를 통해 공개됐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인 김정은이 지난 28일 열린 당대표자회에 참가한 모습이 북한 조선중앙TV를 통해 공개됐다.
ⓒ 로이터=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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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년생의 어린(?) 청년이, 그 나라 군대의 '대장' 직위와 집권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어머 어마한 권력의 자리에 등극하게 되었다. 그리고 차기 권력을 계승할 사실상의 후계자로 낙점되었다는 소문까지 들린다.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이러한 파격적 승진을 성취한 그 청년은, 제 나라 최고 권력자의 아들이라고 한다. 한 술 더 떠, 현재의 최고 권력자도 자신의 권력을 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 한다.  

어떤가? 이런 상황을 접하게 된 정상적 근대국가의 시민이라면, 아마도 "사우디 아라비아나 부탄같은 같은 전제군주정의 요소가 짙은 왕국"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누가 그런 권력에 대해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프랑스 혁명의 성취 이후, 세계인류는 국가 권력의 정당성은 시민에게서 나온다는 정치적 이론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와 다른 나라가 이러한 객관적 조건을 깨는 행위를 3대에 걸쳐 행하고 있다면,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의 범주'일 것이다.

문제는, 그 나라가 하필이면 우리와 같은 민족이 세운 나라인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이라는 것이다. 남북문제의 복잡한 함수 관계를 생각한다면, 섣불리 뭐라 그러기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 될 수도 있겠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민주노동당은, 절대 권력의 권력세습을 부정적으로 인식해야 하는 '보편적 상식'의 측면보다, 평화통일을 지향해야 하는 남북문제의 특수한 상황을 좀 더 고려한 것 같다. 민주노동당의 평당원으로서, 이러한 당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도 아니다. 이정희 당 대표의 표현처럼 (남북협력을 위해) "말을 꾹 누르는"것이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한 정치적 행위가 될 수도 있겠다. 

<경향신문>의 '오버'

<경향신문>은 사설을 통해 민주노동당의 태도를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경향신문>이 보기에(아니 대다수의 합리적 지성인들이 보기에), "북한의 3대 세습은 민주주의는 물론 사회주의와도 아무런 인연이 없다, 북한의 가족 통치는 사회주의 이념을 배반하고, 사회주의적 가치를 훼손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3대 세습을 공식화한 북한에 대한 "당대표자회의가 긴장 완화와 평화통일에 긍정적 영향으로 작용하기를 희망한다"는 민주노동당의 논평이, "북한은 무조건 감싸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라면 그야말로 냉전적 사고의 잔재이다, 한국의 진보세력이 그렇게 냉전시대에 갇혀 있는 한 냉전적 보수 세력의 발호를 차단하는 것도 어려워진다"는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지적하였다.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한 민주노동당의 논평에 대해, <경향신문>은 가혹한 메스를 들이댄 것이다. 안 그래도 진보진영을 '종북'으로 낙인찍어 버리는데 공을 들이는 수구언론에게, 좋은 먹잇감을 진보언론이 선물로 준 격이 되고 말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논란의 확산

당연히 진보진영 일부에서 강력한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민주노동당 일부 지역당은 '경향신문 절독'선언을 하기에 이르렀고, 이대근 논설위원(경향신문 사설 집필자)과 민주노동당간 논쟁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논쟁에 김기협(프레시안), 유시민, 진중권, 유창선까지 가세하면서 진보진영 내부의 공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상황이다.

유창선은 "나는 이번 <경향>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비판을 '진보판 색깔론'이라고 규정한다"며 "민주노동당이 북한의 3대 세습을 옹호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북주의' 취급을 당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고 했다.

또 민주노동당 '새세상 연구소'는 논평을 통해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지 않는다고 하여 '북한추종' 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또 하나의 '오리엔탈리즘'에 불과하다"며 "에드워드 사이드는 유럽 사회의 오리엔탈리즘이 결국 19세기와 20세기 유럽열강의 아시아 침략의 정당성을 부여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이 북한 정권이 되었건 민주노동당이 되었건 상대방을 타자화하고 대상화하는 것은 결국 상대방에 대한 패권적 입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경향신문>의 사설은 유감을 넘어 불쾌한 일이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경향신문>의 사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경향의 섣부른 '소영웅주의'적 행동으로 '종북=진보'라는 일부 대중의 편견이 심화되는 것을 우려하는 것 같다. 나도 이런 점에 일정부분 동의한다. 사실, 예전부터 이대근 기자 특유의 '경직되고 극단적인'논조를 좋아하지 않은 터였다.   

정치적 상황의 고려 - 섣부른 악수(惡手)

공문을 기사화 한 <경향신문> 8일자 기사.
 공문을 기사화 한 <경향신문> 8일자 기사.
ⓒ 화면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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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냉정하게 이 문제를 돌이켜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북한의 권력승계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는 이들은 크게 보아 두 부류인 것 같다. 권력세습이 못마땅하나 남북관계에 대한 현실적인 판단에서 침묵하는 이들과, 북한 권력승계의 문제를 보편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안 된다는 '내재적 관점'에 서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전자의 관점은 정치적인 것이다. 북한의 내부문제를 섣불리 비판적으로 접근했다간, '남북관계의 악화'라는 부메랑을 맞을까하는 두려움이 이런 판단을 낳게 한 것 같다. 일견 일리 있어 보이나, 이는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역할을 잘못 판단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생존하는 '공당'이지, 밀실에 모여 정치적 견해를 나누는 '구락부'가 아니다. 한나라당과 같은 극우보수 정당뿐만 아니라 진보적 시민단체들(예를 들면 참여연대 같은)도 북한의 권력세습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공개적으로 내비치고 있다.

실제로, 남북관계의 공식적 협상 파트너인 정부는, 이번 일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북한에 대해 연일 공세적인 입장을 취해 남북관계를 판탄으로 이끈 장본인들이 '이런 호재'에 침묵을 지키는 것은, 현실적 측면을 고려한 결정일 것으로 추측된다. 민주노동당의 논평도 정부의 이런 입장과 결과적으로 맥을 같이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주노동당은 정부가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대중의 지지를 통해 집권을 도모해야 하는 남한의 정당이지 남북외교관계의 협상 주체가 아닌 것이다. 어쩌면, 이번 북한의 상황이 '민주노동당=종북'이라는 대중의 불신과 (진보신당과 같은) 진보진영 일부의 왜곡을 불식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녕 정치적 판단을 고려했다면, 더더욱 북한권력승계에 대해 최소한 '유감'정도의 표명은 했어야 하는 편이 옳다.

두려운 것은, 이번 일로 대중의 불신이 증폭되고, 더 나아가 진보진영 내부의 도전세력에게 공격의 빌미를 허락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피나는 노력으로 민주노동당은 상당한 대중의 지지와 진보진영의 선도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국내적 측면보다 민족적 측면을 고려한 이번 결정으로 그러한 '아성'이 흔들리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내재적 인식의 문제 - 문제는 보편성이다

북한 문제를 민주주의에 대한 보편성의 문제로 바라보아서는 안 되고, 북한 내부의 문제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내재적인 관점은 앞에서 언급한 후자에 해당하는 이들의 입장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들어 북한 권력승계의 '타자화'와 '대상화'를 경계하고 있다.

이 연구소는 "김정은이 후계자의 지위에 가까워진 이유가 단지 '김정일의 아들' 때문인지, '후계자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기 때문인지 여부는 좀 더 많은 시간이 지나야 명확한 판단이 가능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프레시안>의 김기협은 권력세습이 이루어졌던 싱가포르 예를 들어 "'권력세습'에는 비용절감의 효과가 분명히 있다, 비용 절감을 위해 주민의 권리와 자유에 얼마간의 제약을 가하더라도 그 제약이 공평하고 공정한 것이라면 그리 큰 불만을 일으키지 않을 것 같다"며 "권력 세습이 무슨 천인공노할 절대악 이라도 된단 말인가? …… (북한의) 권력세습을 절대악처럼 내거는 것은 북한의 문제를 모두 북한 자체의 책임으로 몰아붙이는 대결주의자들의 프로파간다일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들의 주장처럼 권력세습이 수학공식처럼 '절대 악'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권력세습이 '절대 악'은 아닐지 몰라도 대단히 이례적인 일에는 틀림없다. 그것도 2대가 아닌 3대에 걸쳐서 '이례적인 일'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특수성과 이례성을 떠나 '비상식성'을 담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정일은 권력 승계를 위해 30여 년간의 지도자 수업을 경험했고, 중년의 나이에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았다. 그런데 김정은은 어떠한가? 우리나이로 이제 스물여덟이다. 게다가 아버지와 달리 권력승계를 위한 어떤 책임 있는 직책을 맡아본 적도 없다. 그런데 모든 서열을 무시한 채, 혜성처럼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선거제에 기반한 서구식 민주주의의 상식을 넘어, 정통 사회주의 국가에서도(사실 구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자본주의 국가보다도 권력세습이 구조적으로 더 어렵다)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북한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전제군주국에서나 가능한 일이 이른바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의 권력승계가 "단지 '김정일의 아들' 때문인지, '후계자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기 때문인지 여부는 좀 더 많은 시간이 지나야 명확한 판단"이 가능한 문제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의 '비효율성' 때문에 "권력세습에는 비용절감의 효과가 분명히 있다"라는 말에 동의해야 하는가? 2000만이 넘는 북한 사람들 중에 공직경험이 전무한 28세의 어린 청년보다도 유능한 지도자가 없을 수도 있다는 고민을 해야 되고, '비용절감'의 문제 때문에 민주주의적 가치를 경시해도 된다는 고민을 해야 된다는 말인가?

지난 9월 28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열린 조선노동당대표자회에서 참석자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앞줄 오른쪽 세번째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여동생 김경희.
 지난 9월 28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열린 조선노동당대표자회에서 참석자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앞줄 오른쪽 세번째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여동생 김경희.
ⓒ 로이터=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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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유신체제를 그리워하거나 히틀러를 동경하는 신나치주의자 같은 극우주의자라면 몰라도, 적어도 진보를 지향하는 이들에게 그런 인식이 있다는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세기 이후 인류의 고단한 투쟁 끝에 이룩한 근대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성과를, '지도자의 유능함'의 문제로 '비용절감'의 문제로 무시하는 것은 진보의 자세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선거제도(혹은 이를 대체할 수 있는 형태의 방식으로)를 통해 통치권력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민주주의 체제는, 인류의 오랜 투쟁의 산물로 이루어진 합리적 대명제임을 부정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근대 민주주의가 완전무결한 체제는 아님이 틀림없고, 진보세력이라면 그 이상의 대안을 끈임 없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삼척동자도 아는 '왕조적 봉건 권력'의 부당성에 대해 이상한 방식의 '내재적 접근'을 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시민권력의 정당성을 지지하고 이를 위해 지금도 투쟁하고 있는 세계인류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정치적 특수관계는 외교 당사자의 전술적 선택에 맡기면 되는 것이고, 진보정당은 인류의 보편적 관점에서 이를 평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제국주의적 패권국가 미국이 되었건, 기독교나 이슬람 근본주의가 되었건, 박정희와 같은 개발독재 권력이 되었건 간에 말이다. 보편적 가치를 좀먹는 이들에게 성역이나 예외란 있을 수 없다.  


태그:#북한 권력세습, #경향신문, #민주노동당, #김기협, #이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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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에게 사회와 역사를 가르치며 먹고사는 장똘뱅이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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