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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노조 제1차 정기대의원대회에서의 이승철씨.
 청계노조 제1차 정기대의원대회에서의 이승철씨.
ⓒ 청계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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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에게 마음의 빚을 진 사람들이 많다. '태일이의 친구' 이승철(61)씨도 그 중 한 명이다. 이씨는 만난 지 두 달 만에 죽은 전태일이 "친구들이 부족해서" 그렇게 됐다고 자책했다. 그래서 20대를 누구보다 열심히 청계피복노조(청계노조)를 키워내는 데 힘을 쏟았다.

생업을 찾아 나선 후에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태일이 친구로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40년이 흘렀다. 전태일 40주기를 앞두고 한때 이소선 어머니가 배곯는 청계노조 간부들을 먹이기 위해 우거지를 줍던 중앙시장이 있는 신당역 근처 한 커피숍에서 지난 10일 그를 만났다.

일요일마다 쉴 수 있다는 사실, 충격적이었다

전태일의 친구, 이승철(61) 씨. 만난 지 두 달만에 분신 전태일의 정신을 잇기 위해 청계노조를 키워내면서 20대를 보냈다.
 전태일의 친구, 이승철(61) 씨. 만난 지 두 달만에 분신 전태일의 정신을 잇기 위해 청계노조를 키워내면서 20대를 보냈다.
ⓒ 노동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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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났을 때, 전태일은 바바리에 빵모자를 쓰고 있었어. 먼 친척인 최종인이 '재미있는 애'라고 소개 시켜줬지."

이씨가 전태일을 처음 만난 1970년 9월 중순, 태일은 동양방송국 '시민의 소리' 프로그램에 평화시장의 열악한 근로환경을 고발하러 간다면서 그에게도 함께 가자고 했다. 동양방송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태일은 그에게 근로기준법이 있다고 알려줬다.

"그 사실을 알고 충격 받았지. 일요일마다 쉴 수 있는 법이 있다는 게. 그땐 한 달에 한 번 쉬었거든."

세 명의 재단사가 희망을 안고 찾아간 방송사에서는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게 필요한데 객관적인 게 부족하다"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방송을 거절했다. 낙담한 전태일이 따로 찾아간 노동청에서 만난 기자들이 실태조사를 하라는 조언을 해줬다. 태일과 함께 이씨를 비롯한 삼동친목회(평화, 통일, 동화시장 재단사 모임) 회원들이 나섰다.

7평의 작은 청계노조 사무실에서 열린 '평화교실'에서 늦은 밤에 중등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청계노조 조합원들.
 7평의 작은 청계노조 사무실에서 열린 '평화교실'에서 늦은 밤에 중등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청계노조 조합원들.
ⓒ 청계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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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다들을 몰래 불러다가 이거 쓰면 일요일마다 쉴 수 있다고 얘기해서 설문지를 받았지.  그 전해부터 임현재, 최종인 등과 함께 쉬는 날 등산을 다녔거든.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 거야. 만날 백열등 밑에서 일해서 햇빛도 제대로 못 보다가 산에 가면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지. 한 달에 한 번 가는 것도 좋았는데 일요일마다 쉬면 일요일마다 산에 갈 수 있는 거잖아. 그래서 열심히 설문을 받았지."

사장들 눈을 피해 평화시장 노동자 126명에게서 실태조사서를 받았다. 1970년 10월 7일 <경향신문>에서 그 전날 전태일이 노동청장 앞으로 제출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성서' 내용을 바탕으로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씨는 "그땐 뭐 되는 줄 알았지. 노동부 국장이 다 해준다고 하고…. 그런데 그게 국정감사 때만 막으려고 했던 거야. 10월 24일 하기로 했던 집회도 못 하고…."라면서 분개했다. 가장 앞장섰던 전태일이 느꼈을 분노와 절망감도 함께 전해진다.

11월 13일, 전태일은 몸에 불을 붙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세상에 그 분노를 외쳤다.

"집회라는 게 원래 몰래 준비해야 한다는데 해봤어야지 알지. 우리는 3일 전부터 평화시장에 집회했다고 떠들고 다녔잖아. 본래 사나운 독수리는 발톱을 내놓지 않는다고 하는데 우린 발톱을 내놓고 있었던 거지. 근로기준법 화형식 한다고 100원씩 걷어서 석유도 사고, 각목도 샀었는데 옴짝달싹 못 하게 됐던 거지. 우리가 부족했어."

대중보다 반 발짝 앞섰던 전태일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대우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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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전태일이 대중운동가적 기질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태일이가 교회에 열심히 다녔어. 회의한다고 평화시장 건너편에 가서 막걸리를 마시곤 했는데 우리가 한잔 하라고 건네면 얼굴 벌게지면서도 마시더라고. 담배도 한 대씩 권하면 피우는 척하고…. 태일이가 그렇게 안 했다면 우리랑 어울리기 힘들었을 거야."

이씨는 전태일로부터 운동가가 갖춰야 할 덕목도 발견했다.

'운동가는 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대중보다 반 발짝만 앞서 가야지 한 발짝 앞서 가면 안 된다.'

사실 이씨도 두 달 만난 전태일을 다 알지는 못했다. 그가 남긴 일기를 보고선 그가 더 크게 다가왔다.

"우린 태일이가 멋도 부릴 줄 알고 재미있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죽은 후에 일기를 보고 많이 감동했지.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고 했던 게 우리 평화시장의 시다들 곁으로 오겠다는 거였잖아. 그것보다 더 인상 깊었던 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공장을 운영하겠다는 거였어. 그러면서 그랬잖아. 투자를 하면 자기 눈 한쪽을 기증하겠다고. 누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어?"

전태일의 친구들은 "우리가 태일이를 죽였다"는 죄책감과 책임감에 청계노조를 세우는데 앞장섰다. 당시 박봉이긴 했지만 10년 차 공무원 봉급에 맞먹는 월 3만 5천 원을 받던 이 씨도 재단사 일을 그만뒀다.

"이소선 어머니가 돈 싫다고 해 받아낸 8개 요구조항엔 정부가 노조 결성을 도와준다는 항목도 있었지.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조항이지만 그땐 워낙 노조활동이 열악했으니까…. 그렇게 해서 세운 게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야. 그런데 우리 도와주러 온 한국노총 간부가 사용자들한테 돈을 받아서 일을 하려고 하는 거야. 그래 우리가 '전태일은 절대 영리를 추구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지."

한국노총에서 파견 온 간부가 돌아가고 태일이의 친구들이 청계노조를 맡았다. 이씨도 1971년 2월부터 노조 상근을 했다. 버는 돈이 없어서 거처도 이소선 어머니댁으로 옮겼다.

"야간노동 단속한다고 유도까지 배웠어"

1980년 4월 임금인상, 퇴직금 10인이상 실시 등의 요구를 관철한 단체협약체결 농성투쟁. 사진은 평화시장 옥상 노조사무실 옆. 이승철씨는 "똑똑한 몇 명이 5개를 얻는 것보다 대중과 함께 1개를 얻는 것이 낫다"는 게 청계노조 시절의 원칙이었다고 밝혔다.
 1980년 4월 임금인상, 퇴직금 10인이상 실시 등의 요구를 관철한 단체협약체결 농성투쟁. 사진은 평화시장 옥상 노조사무실 옆. 이승철씨는 "똑똑한 몇 명이 5개를 얻는 것보다 대중과 함께 1개를 얻는 것이 낫다"는 게 청계노조 시절의 원칙이었다고 밝혔다.
ⓒ 청계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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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청계노조엔 전태일 친구들만 몇 있고, 조합원은 거의 없었다. 평화시장은 사용주만 2천 명이고, 한 사업장 당 보통 10~20명, 많아야 30~40명이 서로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다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청계노조는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간절히 원하지만 차마 용기가 없어 하지 못하는 일들을 대신함으로써 살 길을 찾았다.

우선 떼인 임금을 받아주는 거였다. 평화시장에선 사장들이 대목에는 밤잠 안 재우면서 일을 시키다가 일거리가 떨어지면 가차 없이 노동자들을 자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가운데 밀린 월급을 떼이기도 부지기수였다. 나이 어린 노동자들은 그 돈을 달라는 말도 제대로 못한 채 쫓겨나곤 했다.

그와 함께 일요일 근무와 밤 10시 이후 야간노동을 단속하러 다녔다.

"가서 일하고 있으면 전깃불을 내리기도 하면서 항의를 했지. 그런데 사용자들이 깡패같이 생긴 사람들을 앞세워서 우리를 막는 거야. 그렇게 해서 싸움이 붙은 적도 많아.

덩치 좋은 사람들 상대한다고 내가 유도도 배웠잖아. 우리가 사용주들하고 싸우고 오면 나중에 전화가 와. '너무 고맙다'고. 통행금지에 걸려서 집에 못 가고 숱하게 사무실에서 잤지."

20대 초반인 청계노조 간부들이 대부분 30~40대인 사장들을 상대하느라 고생도 많았다. 대등하게 협상하기 위해 노동법을 달달 외우기도 했다.

이씨가 일요일에 근무하는 업체 단속하다 경험한 일을 소개했다.

"하루는 사장이 끌고 가서 돈 3만 원을 줘. 그래 내가 그랬지. '당신, 내 인격이 3만 원 짜리야? 내가 이러려고 하는 것 같냐.'고. 몇 년 후에 그 사장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때 자기가 너무 부끄러웠다. 그런 모습 보면서 청계노조는 될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

"개인적으론 착한데 모이면 문제라고..."

1985년 독일 '인간의 대지' 재단으로부터 지원받아 마련한 평화의 집. 한옥을 헐고 현재는 그 자리에 전태일재단 건물이 들어섰다.
 1985년 독일 '인간의 대지' 재단으로부터 지원받아 마련한 평화의 집. 한옥을 헐고 현재는 그 자리에 전태일재단 건물이 들어섰다.
ⓒ 청계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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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농성 같은 건 표시라도 나는데 사람을 조직하고 그들을 바꿔내는 건 표시도 안 나는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전태일의 친구들은 그 표 안 나는 일을 "뼈 빠지게 하면서" 20대를 보냈다. 그러면서 숱한 고초도 겪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을 선포한 후, 70년대 중반은 긴급조치 1호부터 9호까지 발표돼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거의 누릴 수 없던 시절이었다. 최초의 민주노조인 청계노조는 정권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간부들이 수시로 경찰서에서 구류를 살고, 라면 7개를 끓여서 십여 명이 먹을 정도로 배곯던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청계노조는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일을 계속했다.

결국 박정희 시해 후 다시 군부의 힘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1981년 1월, 청계노조 해산명령을 내린다. 청계노조 조합원들은 아시아아메리카자유노동기구(아프리)에서 해산명령에 항의하면서 농성을 하고, 이소선 어머니와 이승철씨는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됐다.

"구속되고 제일 많이 맞았던 게 '노조 해산명령이 내려졌는데도 간부회의를 한 게 불법인 거 알았지?'라고 물어서 '몰랐다'고 대답해서야. 해산명령에도 간부 7명이 회의 세 번 했다고 집시법 위반이래. 그걸 조종했다고 3년 구형을 받았어. 그렇게 받고 보니 더 강력하게 투쟁하지 못한 게 억울하더라고."

이씨가 당시 수사관이 했던 말을 전한다.

"심문으로 나오는 게 별로 없으니까 간부들 집들도 수색했지. 수사관이 갔다 와서 하는 말이 '10년 동안 노동운동 했다면서 집 하나도 못 해 놨냐?'는 거야. 어용노조가 뒷돈 받는 걸 많이 봐왔는데 우리는 죄다 보증금 50만 원에 월세 2~3만 원짜리 집에 살고 있으니 이상했나 봐. 그러면서 그러대. '너희는 개인적으론 착한 애들인데 모이면 문제가 된다, 발가벗고 몇백 명이 모여도 총칼로 다 무너뜨린다'고. 그 얘길 들으니까 정말 막지 못하겠구나 싶더라고."

이씨는 그해 7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당시 그에겐 4살과 막 돌이 지난 두 아들이 있었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봉제공장으로 돌아갔고, 1984년 지퍼 장사를 시작했다. 그 즈음 청계노조 시절부터 인연을 맺고 있던 장기표씨를 통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사회국장을 제안받았지만 이미 시작한 장사를 접을 수 없어서 요청에 응하기 힘들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청계노조는 복구됐다.

"80년대 노래 중에 '아직도 못다 한 내 사랑'이란 노래가 있어. 당시 내가 그 노래를 많이 부르니까 사람들은 내가 못 이룬 첫사랑을 못 잊나보다고 했지만, 나는 못다 한 노동운동에 대한 사랑을 생각하면서 한참 그 노래를 불렀지."

솔개트리오는 '외로움에 지쳐버린 내 마음을 어떻게 말로 다 하나요. 난 몰라요. 이 가슴에 아직도 못다 한 사랑'이라고 노래 불렀다. 전라남도 나주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농사지을 땅도 없어 남 농사를 거들고 품삯을 받던 가난한 부모도 못 본 체하면서 친구 태일이의 뜻을 이어왔던 지난 10년 세월이었다. 노조도 해산당하고,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태일이의 친구들은 생업의 길로 나섰다. 마음 속 가득 미안함을 안고서….

노동운동을 떠나도 이소선 어머니를 떠날 수는 없었다

지난 10월 30일, 전태일 문화제에서 발언하고 계시는 이소선 어머니.
 지난 10월 30일, 전태일 문화제에서 발언하고 계시는 이소선 어머니.
ⓒ 노동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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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노동운동을 떠나기는 했지만 '전태일의 친구들'이란 사실까지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들에겐 또 다른 어머니인 이소선 어머니가 있었던 게다. 1977년 결혼할 때까지 7년간 이소선 어머니 집에 살았던 이씨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와 얽힌 이야기들도 많다.

"어머니가 중앙시장에서 헌옷을 주워다 수선해서 파셨거든. 그 중 양복 같은 것도 있었지. 그게 알고 보니 죽은 사람들 옷이었어. 부잣집에서 사람 죽으면 태우라고 내놓은 옷이었던 거야. 어머니가 중앙시장에서 창동까지 그걸 메고 와서 싹 빨아서 다려서 파셨는데 우리 청계노조 사람들한테 주기도 하셨어. 그러면 우린 그걸 입고선 '죽은 사람 옷 입는다'고 깔깔대며 웃었지. 그런 옷도 귀했으니까."

전태일 가족이 살았던 창동은 남산 무허가촌에서 불이 나 거기 살던 사람들이 집단 이주했던 곳이다. 간혹 지독한 가난을 못 이기고 목을 매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자살한 사람들이 목을 맸던 줄을 태운 재를 물에 섞어서 먹으면 간질이 낫는다는 속설이 돌았다. 집안에 간질을 앓고 있는 형님이 있어서 이씨가 이소선 어머니께 그 얘기를 전하자 어머니는 교회를 다녀서 미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동네에 누가 또 목을 맸다는 소리를 듣고 그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선 자살한 이가 목을 맸던 줄을 치마 속에 숨겨서 갖고 오셨단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는지 어머니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지. 그때 마신 잿물 때문인지 이후에 간질약을 계속 먹어서 그런지 진짜 형님의 간질이 낫기도 했어."

이씨는 1975년에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교육받을 때 존경하는 사람을 쓰는 란에 '이소선 어머니'를 썼단다. 세상 사람들이 어머니의 삶을 조명하기 전이었다. 강사가 "왜?"냐고 물었을 때 그는 "어머니가 없었으면 전태일이 없었을 거다. 어머니가 태일이만큼 훌륭하다"고 답했다.

이소선 어머니는 또 다른 내 어머니

이소선 어머니와 함께 한 박계현 전태일재단 사무총장과 6년여의 투쟁 끝에 복직 합의한 기륭지부 조합원. 이소선 어머니는 지난 40년 동안 '투쟁하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로 살아오셨다.
 이소선 어머니와 함께 한 박계현 전태일재단 사무총장과 6년여의 투쟁 끝에 복직 합의한 기륭지부 조합원. 이소선 어머니는 지난 40년 동안 '투쟁하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로 살아오셨다.
ⓒ 노동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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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는 지난 40년간 명절 땐 아무리 차가 막혀도 먼저 창동에 들른 후 고향에 내려갔다. 또 어머니가 태일이 친구 중 누가 왔으면 하는 자리는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다. 어머니의 환갑, 칠순도 태일이의 친구들이 주도적으로 챙겼다. "뭘 도와 드렸다기보다는 40년 동안 어머니로 생각하면서 살았다"는 게 이씨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런데 최근 한 기사에 언급된 표현 때문에 어머니를 위한 모금운동 등이 제안되는 걸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슴을 후벼 파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어. 꼭 여든이 넘은 어머니를 추운 옥탑방에서 떨게 하는 것처럼 나왔잖아. 어머니가 창동에 집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럼 사람들이 그럴 거 아냐. '전태일 친구라는 놈들은 그 친구 어머니 하나 간수 못하고 저렇게 사는 게 인간이냐고.' 누가 알든 모르든 우리 스스로 '전태일 친구니까 잘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40년을 살아왔는데, 그 시간을 부정당하는 심정이었지. 우리 어머닌 못 챙겨도 태일이 어머니는 꼭 챙겼었는데…."

노동자 집회 현장을 찾아 연설하시는 이소선 여사
 노동자 집회 현장을 찾아 연설하시는 이소선 여사
ⓒ 영화 '어머니' 제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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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환갑을 넘기고 손자까지 본 이씨는 이소선 어머니를 보면서 "돈이 많은 게 행복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어머니로 칭송받는 어머니는 참 행복하시겠다, 나도 말년을 어머니처럼 맞고 싶다"고 생각해 왔단다. 그런 어머니가 불쌍하게 그려지는 걸 불편해 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의 건강에 대한 걱정은 여전하다.

"올해 초에 어머니가 두 번째 입원하셨을 때 병문안 갔었는데 갑자기 너무 늙으신 거야. 친구들 하고 '어머니도 40년이 흐르니까 늙네. 그러니까 태일이도 늙은 것 같다. 젊은 전태일로 살릴 수 있는 분은 어머니인데….'라고 얘기했지. 어머니가 아프시니까 전태일도 사라지는 건 아닌가 걱정되더라고. 누가 어머니만큼 전태일을 잘 살릴 수 있겠어? 그런데 이번 노동자대회 때 발언하시는 거 보니까 정정하시더라고. 이번 추도식 때 어머니 뵈면 '어머니 아프다는 거 거짓말이지?'라고 말하려고…."

40년 동안 딱 한 번 빠진 추도식, 전태일에서 벗어날 수 없더라

전태일 열사 1주기 추도식. 맨 아래쪽 왼쪽에서 두번째 가방을 들고 있는 이가 당시 회계를 맡았던 이승철씨. 이씨는 "노동조합 결성한 이후 수많은 깡패들속에서 그래도 버틸수 있었던 것은 1주기추도식에 참석한 친구들 덕이었다"고 한다.
 전태일 열사 1주기 추도식. 맨 아래쪽 왼쪽에서 두번째 가방을 들고 있는 이가 당시 회계를 맡았던 이승철씨. 이씨는 "노동조합 결성한 이후 수많은 깡패들속에서 그래도 버틸수 있었던 것은 1주기추도식에 참석한 친구들 덕이었다"고 한다.
ⓒ 청계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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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현역에 있지 않다는 미안함에 20년 전부터는 추도식 때 추도사하는 것도 거절했단다. 40년 동안 추도식에 딱 한 번 빠졌다.

"그때 다른 일이 있어서 삼동친목회 회원들이 거의 다 빠졌었어. 해방된 것 같더라고. 항상 가슴에 태일이가 있어서 잘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는데 추도식에 안 가게 되니까 전태일에서 벗어나는 것 같았지. 그런데 추도식 끝나고 또 그게 아니더라고. 가슴이 답답해 오고…. 그때 우린 전태일 친구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지."

전태일의 친구, 이승철씨가 "우리는 역사의 증인일 뿐 지금 투사는 아니지만 70년대 삶을 참고하라고 얘기할 수는 있다"면서 털어놓았던 긴 이야기를 몇 년 전 하도 부탁해서 했던 추도사의 한 대목으로 마쳤다.

"많은 사람들이 전태일을 살리려고 하는데 자넬 사적으로 이용하려는 곳엔 가지 말았으면 좋겠네."

말만 '전태일'을 얘기하면서 실천은 안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단다.

영화배우가 꿈이었던 재단사, 전태일 40주기 행사 꾸려와

박계현 전태일재단 사무총장
 박계현 전태일재단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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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현(52)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열여덟에 서울에 올라와 재단사가 되어 꿈이었던 '영화배우' 대신 가장으로 살았다. 꿈이 사라진 그에게 청계노조 탈춤반은 다시 사람 같은 삶을 선물했다. 젊은 시절 열심히 노조활동을 하다가 그 역시 한 때 생업을 찾아 떠났다가 3년 전쯤 전태일기념사업회로 돌아왔다.

40주기 행사위원회 조직과 재정을 맡아서 정신없이 1년을 보낸 그를 지난 10일, 전태일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에 공문을 보내 허락을 받아서 전태일다리 밑 산책로에 설치했던 '전태일 40주기 작품전시 무단 철거'에 대한 대책회의를 하고 오는 길이었다. 400~500명 참석할 것으로 보이는 전태일 40주기 추도식 준비로도 분주했다.

-전태일 40주기 행사위원회 활동을 평가한다면?
"'광장사업'이라고 불렀던 연대활동에 대한 평가들이 좋다. 지난 6월부터 매달 투쟁사업장을 찾아다니면서 문화제를 진행해 왔는데 전태일의 정신을 현재 재현한다는 의미가 있다. 40주기가 끝난 후에도 광장사업을 계속 이어갈 계획이다.

'버들다리'를 '전태일 다리'로 바꾸자는 1인 시위도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서울시에서 병행표기한다고 해서 1인 시위를 그만둔다고 밝혔는데도 꼭 해야 한다면서 하고 간 팀들도 있다.

'시민들이 힘 합쳐서 하면 된다'는 걸 보여준 소중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KEC 문제로 분신한 김준일 금속노조 구미지부장이나 6년 넘게 투쟁한 기륭전자지부 동지들을 보면서 전태일이 분신했던 70년 상황과 마찬가지여서 막막했다. 앞으로 싸움을 한들 누가 기륭만큼 길게 싸우고, 누가 쌍용차 동지들만큼 강하게 투쟁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답답하더라. 그런데 시민들이 참여하면 가능하다는 희망을 보여준 것 아닌가. 그게 기뻤다."

-앞으로 전태일재단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나?
"지금까지는 전태일 노동상과 문학상을 선정해 왔다. 재원이 부족해서 전태일 노동상을 국내 부분에만 한정했었는데 앞으로는 외국으로 그 대상을 넓히려고 한다. 기업은 벌써부터 다국적화돼 아프리카에도 들어가는데 노동상도 국제화할 필요가 있지 않겠나.

특히 전태일 기념사업회가 1985년 독일의 지원을 받아서 설립됐던 역사가 있다. 소설 <어린왕자>를 쓴 생텍쥐페리를 기념해 만든 '인간의 대지'라는 자선 단체에서 가난한 나라의 소년·소녀들을 위해 기금을 줬는데 청계노조가 평화시장의 어린 시다들을 위해 일한다고 기금을 보내왔었다. 거기엔 독일로 갔던 광부와 간호사들이 전태일 관련 연극도 하고, 모금운동도 했던 것이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우리가 받았던 것처럼 우리의 작은 정성이 어려운 나라들에는 큰 보탬이 될 것이다."

-전태일 기념사업과 관련해 바람이 있다면….
"전태일 기념관을 건립해 많은 노동자들이 아무 때나 편하게 와서 쉬고 공부할 수 있는 쉼터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장기적인 사업으론 전태일과 관련해서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에 한 줄 정도로 설명돼 있는데 전태일 정신을 온전히 살릴 수 있도록 교과서 개정운동도 하고 싶다. 이런 사업들은 대대적인 호응 속에 전 국민운동이 벌어질 때 가능할 것이다.

30주기 때부터 전태일 기념관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하고 있는데 아직 너무 미약하다. 전태일재단 사무실 건물도 85년에 받은 기금으로 마련한 건데 지금은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사무공간을 빼놓고 다 임대해 준 상태다.

원래 매년 500~600명의 중고등학생들이 이곳에 찾아와서 같이 전태일 관련 동영상도 보고 태일이형이 분신했던 곳 등도 순례했는데 지금은 강당이 없어서 학생들이 오면 주변 공간을 빌려서 동영상을 보고 있다.

봉사활동을 이걸로 대치해서 많이 왔던 건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그 수가 확 줄었다. 올봄도 70명 정도 오고 말았다. 선생님들이 교감 선생님이 "봉사활동 할 데 많은데 하필 전태일이냐?"고 뭐라고 해서 눈치 봐야 한다고 하더라. 우리의 희망인 청소년들의 발길이 끊어지는 게 큰 걱정이다."

- 전태일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태일이형이 분신하고 11월 25일 신구 합동예배에서 김재준 목사가 이런 말을 했다. "오늘 우리가 모인 것은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기 모인 기독교인들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다."고.

이 나라 정치인, 지식인,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오늘날 깊이 성찰해 볼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우리 안에 나태와 안일, 위선이 있는 건 아닌지….

최근에 <너는 나다>란 책도 나왔는데 전태일은 개인 전태일로 규정한 적이 없다. '전체의 일부인 나'로 이야기 하면서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라고 불렀다. '나를 아는 모든 나'란 평화시장에서 혹사당하고 착취당하던 어린 시다들, 혹은 바보회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그 수는 많지 않다. '나를 모르는 모든 나'란 내가 모르는 곳 어딘가에서 장시간 노동과 비인간적인 대우로 착취당하는 사람, 혹은 전태일 동지처럼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사람이다. 그들이 바로 오늘날의 전태일일 것이다."


태그:#전태일, #전태일재단, #이승철, #박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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