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박용만
 박용만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국민회에서 발간하던 <신한국보>의 주필로 초빙돼 박용만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건 1912년 12월 9일. 상하(常夏)의 땅이라고 하지만 동지 즈음의 바닷바람은 서늘했다. 부두에는 6백여 명의 동포들이 몰려들었다. 오하우 섬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나온 셈이다. 갑판에서 박용만의 얼굴이 보이자 박수소리가 우레처럼 일어났다.

브리지를 넘자 맨 먼저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박 학사님, 배에서 멀미는 하지 않으셨소? 저는 지방총회장 정철래올씨다." 박용만도 따라서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그의 목에 레이를 걸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레이는 열대성 꽃 특유의 강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부회장 노재호입니다." 그러자 정철래 총회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우리의 영도자 박용만 학사님을 환영하는 뜻에서 다시 한 번 힘찬 박수를 칩시다." 박용만은 순간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군중을 향해 그는 즉각 고개를 꺾었다. 

박용만의 피가 뜨거워지기 시작한 건 따뜻한 하와이의 일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제 갓 서른을 넘긴 그의 열정에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신문부터 손을 봤다. 제호를 <신한국보>에서 <국민보>로 고치고 주간지였던 것을 일주일에 두 번씩 발행했다. 지면도 4면이던 것을 6면이나 8면으로 늘렸다.

문화 교양 난을 새로 만들고 사진도 많이 실어 지면을 화려하게 편집했다.

국민보-1913년 8월 20일자
 국민보-1913년 8월 20일자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제호를 <신한국보>에서 <국민보>로 바꾼 건 미주는 물론 중국과 러시아 등 동포들이 가 있는 지역의 조직들이 모두 '국민회' 이름으로 통합돼 가기 때문이었다.

<국민보>는 다만 하와이의 동포만을 위한 신문이 아니라는 게 박용만의 포부였다. '국민보'는 은밀하게 조국에 보내져 배포됐고 국내에도 '국민회'가 조직되는 계기가 됐다.

1914년 9월 본국에서 하와이에 온 장일환의 경우 박용만과 항일투쟁을 다짐했다. 다음 해 4월 귀국해 '조선국민회'를 비밀리에 조직했다. 전국에 조직을 확산하고 군자금을 모금해서 간도에 농토를 구입했다. 그런 다음 동지들을 이주시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했다. 
  
<국민보> 말고도 박용만이 열정을 쏟은 것은 군사훈련이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네브래스카 주를 떠나 하와이로 온 건 하와이엔 5천여 명의 동포들이 주로 농장에서 노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동시에 군대훈련을 하는 '둔전병제도'는 박용만에게는 신앙과 같은 것이었다. 또 하와이로 건너 온 노동자들 중에는 구한말 군대 출신들이 많았다. 어림잡아 5백 명 이상의 광무군인(光武軍人) 출신들이 이민배에 올랐던 것이다.

구한말 광무군인들(1900년대 초 서울)
 구한말 광무군인들(1900년대 초 서울)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7천2백여 명의 하와이 이민자 중 5백여 명이라는 숫자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다. 한 데 뭉쳐 놓으면 뭔가 보여줄 수도 있는 숫자가 아닌가. 1905년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로 떠난 1033명의 노동이민자들 중에도 2백여 명의 광무군인들이 섞여 있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와이에서 약 2백여 명은 본토로 건너갔다. 네브래스카 주에서 박용만의 소년병학교를 돕던 김장호나 이종철 등은 그들 중 일부였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대규모로 한반도에 진출했다. 1904년 2월 8일 일본함대는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의 극동함대를 공격했다. 다음날에는 제물포에 정박 중인 2 척의 러시아 군함을 공격해 자폭시켰다. 그 사이 약 3천 명의 일본군이 제물포를 통해 서울로 진격했다. 그리고 같은 날 5만 명의 일본군이 인천항에 상륙했다.

1904년 2월 한 겨울의 서울에 침입한 일본군
 1904년 2월 한 겨울의 서울에 침입한 일본군
ⓒ P.F.Collier & Son(제작권 해제)

관련사진보기


일본군의 대규모 진주는 한국을 그들의 발톱 아래 두는 것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겠다는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재정궁핍을 구실로 한국 군대를 절반으로 줄이라고 한국정부를 강압했다. 그렇게 해서 군복을 벗게 된 광무군인들이 어쩔 수 없이 이민배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들의 치욕은 여느 노동자들과는 달랐다. 1910년 끝내 나라가 망하자 조국을 지키지 못했다는 원한이 더욱 끓어올랐다. 외지에서 한인들이 행여 군사훈련을 벌일 양이면 기를 쓰고 참여하거나 자기의 기량을 아낌없이 내놓는 것도 그런 연유였다.

1914년 2월 호놀룰루에서는 '알로하 카니발'이 거창하게 벌어졌다. 2월 14일서부터 25일까지 계속되는 행사였다. 하와이 전 도민이 참여했고 하와이 주둔 미군 가운데 6천 명이 동원됐다. 2월 22일은 워싱턴 대통령 탄생기념 국경일인 만큼 의당 축하행사를 치러야 하지만 실제 속내는 본토의 관광객을 하와이에 유치하는 게 목적이었다.

2월 14일 오후 7시 반 정박해 있는 배들이 일제히 고동을 울리자 보병 제 25연대 군악대의 주악으로 모아나 호텔에서 밤 12시까지 무도회가 열림으로 카니발은 막을 올렸다. 매일 여기저기에서 음악회 아니면 무도회가 열렸다. 펀취볼에는 가짜 화산을 만들어 놓고 불을 뿜어내게 했다. 수영대회, 야구대회, 연극이 다투어 관객들을 끌어갔다. 마침내 2월 21일 토요일에는 관병식과 꽃차행진이 벌어졌다.

한인사회에서는 광무군인 2백 명이 목총을 메고 행진에 참가했다. 모두가 흰 군복으로 통일하고 누른 전대에 '알로하'라고 푸른 글자를 새긴 것을 어깨에 둘렀다. 다음날 호놀룰루의 영자신문들은 한인들의 행진을 대서특필했다. '금년 꽃차행진에서 사람의 눈을 놀랜 것은 오직 한인의 육해군 군대와 중앙학원 학도대의 행진'이라고 극찬했다. 신문 전 지면에 한인의 군대행진과 꽃차 장식을 10여 곳에 올렸다.

국민회 창립기념일에 행진하는 광무군인들. '알로하 카니발'에서도 유사한 행진. 다만 흰색 군복에 누른 전대를 어깨에 둘렀다.
 국민회 창립기념일에 행진하는 광무군인들. '알로하 카니발'에서도 유사한 행진. 다만 흰색 군복에 누른 전대를 어깨에 둘렀다.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한편 <국민보>는 그 정황을 다음과 같이 기사화했다.

"21일 아침에는 우리가 하와이 산천이 남의 나라 땅인 줄을 잊어버리고 의연히 대한제국 옛 천지를 보던 것이라. 중앙학원 고요한 공기에 취군 나팔이 동하는 곳에 2백 명 조선 사나이들이 총을 메고 들어서서 1중대의 해군과 3중대의 육군으로 1대대를 편제하고 그 외에 또 중앙학원 학도대 1중대와 구세군 1분대는 육해군의 뒤를 따르니 장교 이하 일반 군인의 총액이 대개 3백여 명이라.

3백여 명 한 대대는 대차를 정하고 검사를 행한 후에 연병장 한 모퉁이에 연꽃으로 단장한 자동차 하나가 나오며 그 위에는 사모옥대와 쌍학흉배를 붙인 문관 한 사람과 녹의홍상에 칠보화관을 단장한 소년 부인 세 사람이 현출하고 자동차 앞에는 전립전복으로 무관 두 사람이 마(馬)상에 앉았으니 이는 당일 하와이 한인이 부모국의 광채를 드러내고 외국인의 갈채를 받는 것이요.

또는 그 뿐 아니라 우리 중앙학원 학도들은 자기들 손으로 자동차 하나를 단장하여 전일 한양 궁궐의 취향정을 꾸며 연꽃 자동차를 따르니 이도 또한 특수한 광색이라. 자동차 두 채와 3백 명 군대가 가로 상으로 행진할 때에 이것을 환영치 않는 자는 오직 일본 친구들뿐인 듯. (하략)" *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태그:#박용만 평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