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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와 유럽, 북아프리카 등에는 6만기 정도의 고인돌이 분포한다. 숫자상으로 한국에는 남·북한을 합쳐 4만기 정도로 가장 많은 양이 남아있다. 고인돌의 세워진 연대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유럽과 아프리카는 기원전 5천년 ~ 기원전 4천년 정도로 추정하며, 동아시아는 기원전 2,500년 ~ 기원전 수백 년 전후로 추정된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다. 고인돌은 그 생긴 형태에 따라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으로 구분한다.

 

탁자식이란 굄돌을 지상에 세워서 먼저 돌방을 만든다. 그리고 그 위에 덮개석을 올리는 형태를 말한다. 바둑판식이란 무덤방이 땅 속에 있고, 받침돌에 덮개돌을 올린 것이다. 이와는 달리 맨 땅 위에 덮개돌이 놓인 것을 개석식이라 부른다. 이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 고인돌은 우리나라에서는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많은 고인돌이 남아있다.

 

도심 안에 남아있는 고인돌

 

용인시 모현면에는 주변 아파트 단지 안에 고인돌이 있다. 용인에서 경기도 광주로 올라가다가, 모현 외국어대학 입구 쪽으로 들어가는 길에 '모현 고인돌'이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을 볼 수 있다. 외국어대학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우측으로 다시 안내판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아파트가 보이고, 그 한편에 고인돌이 있다.

 

용인 모현 고인돌은 두 기가 남아있다. 주변에 굄돌로 보이는 돌들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이곳에도 몇 기가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한강의 지류인 경안천 주변이다. 구릉이 발달한 이곳에는 선사시대 인류가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물이 있고 사냥을 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덮개석을 보다

 

2월 6일, 설 연휴의 끝에 찾아간 모현. 연휴 내내 날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여기저기 남아있는 눈으로 인해 길이 미끄럽다. 구제역으로 인해 문화재 답사를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가는 곳마다 길을 막아 놓았기 때문이다. 답사를 나왔으니 몇 군데라도 돌아보아야 할 판이다. 마침 이곳을 지나는 길이라, 주저 없이 모현 고인돌이 있는 곳을 찾아갔다.

 

모현 고인돌은 쉽게 찾을 수가 있다. 보호철책 안에는 거대한 고인돌 2기와 여기저기 굄돌로 사용한 것 같은 돌들이 흩어져 있다. 앞쪽으로는 굄돌이 거대한 덮개돌을 받치고 있다. 한편은 막음돌이 막혀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 덮개돌은 길이가 각각 4.5m, 5,5m에 두께가 1m나 되는 거대한 돌이다. 굄돌은 덮개돌과는 달리 높이가 80c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적인 모습으로 볼 때 웅장한 느낌을 준다.

 

수평을 맞추기 위해 쐐기돌을 사용한 지혜

 

그 뒤편에 있는 고인돌은 앞에 있는 것보다는 조금 작아 보인다. 굄돌의 한편이 사라져 덮개돌이 비스듬히 쓰러져 있다. 덮개돌 위에는 하얀 눈이 가득 쌓여져 있어, 윗면을 정확히 볼 수가 없어 안타깝다. 그렇다고 고인돌 위에 올라가 눈을 치울 수도 없는 일이고. 돌방을 자세히 보기 위해 들여다보니, 굄돌과 덮개돌 사이에는 쐐기돌이 박혀있다.

 

이 쐐기돌은 덮개돌의 수평을 유지하기 위해 끼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고인돌의 거대한 덮개석을 올릴 때는 대개 흙을 높게 쌓아 굄돌 위에 올려놓고, 덮개석을 올린 다음에 흙을 치웠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고인돌 주변에 흙을 쌓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쐐기돌은 흙을 치운 다음에 어떻게 박아 넣은 것일까?

 

그 당시에 이렇게 건축이나 역학에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답사 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문화재들. 그리고 그 문화재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깨닫는 선조들의 지혜. 그런 것들을 그냥 묻어만 두고 있는 요즘의 교육이 잘된 것인지? 그저 이 나이에도 다닐 수 있음이 감사하고, 배워갈 수 있음이 감사한 날이다.


태그:#고인돌, #지석묘, #용인, #모현,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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