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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에는 천왕봉이라고 적혀있고,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천황봉으로 한문 표기 되어있다. 현재는 지명변경이 되어 천왕봉으로 옛 이름을 되찾았으나 아직도 천황봉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 속리산 국립공원의 천왕봉 대동여지도에는 천왕봉이라고 적혀있고,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천황봉으로 한문 표기 되어있다. 현재는 지명변경이 되어 천왕봉으로 옛 이름을 되찾았으나 아직도 천황봉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 녹색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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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라 하면, 향긋한 꽃 냄새,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 두근거리는 입학식과 새 학기 그리고 3월의 첫 날인 3·1절도 떠오른다. 일제강점기가 65년 이상 지난 지금 정부와 지자체에서는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시민단체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 중 일제 강점기에 창지개명(創地改名)된 지명을 바로잡는 활동은 진행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일제 잔재라고 하면 한 걸음에 달려가 산에 박힌 말뚝도 뽑는데 왜 일제 강점기에 변경된 지명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을까?

우리의 민족정신과 정체성을 없애기 위해 강제로 성(姓)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것을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의 지명(산·봉우리·마을 등)을 일본식으로 바꾼 것이 창지개명이다.

창지개명의 대표적인 사례는 왕(王)이 들어가는 지명을 일본의 왕을 뜻하는 '왕(旺, 日+王)'으로 바꾸어 표기하거나, 왕 대신 일본 천황을 뜻하는 황(皇)을 넣거나 구(龜·나라이름 구, 거북 구)와 같이 복잡한 한자를 단순한 한자인 구(九·아홉 구)로 바꾸는 것이다.

백두대간 인접 23개 지역 중 13개만 변경

녹색연합은 백두대간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를 없애기 위해 지난 2005년부터 '백두대간 우리 이름 바로 찾기 운동'을 진행했다. 이 속에서 창지개명된 백두대간의 본래 이름을 되찾기 위해 '바로 잡아야 할 백두대간 우리 이름 조사보고서(2005년)'를 발행하였다.

2005년 녹색연합 자체 조사 이후에 지명이 변경된 곳은 9곳이다. 사회적으로 창지개명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뤄진지 약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일본식으로 개명된 19곳 중 9곳만 지명이 변경되었다.

지명변경은 "측량·수로조사 및 지적에 관한 법률"의 규정에 의해 위원들이 임명되고 변경 절차를 진행하게 된다. 국가 지명을 변경하려면 먼저 지명변경요청을 한다. 지명변경요청을 하면 각 지자체 별로 꾸려진 지방지명위원회에서 지명변경요청 근거를 바탕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하지만 모든 지자체가 지방지명위원회를 꾸리고 있지 않다.

지방지명위원회에서 승인이 나면 국토해양부 소속의 중앙지명위원회로 넘어간다. 중앙지명위원회에서 논의를 한 후 승인이 나면 국토지리정보원에서 고시 하고 이후 이정표, 안내도 등의 지명을 개정한다.

국가의 지명을 변경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자료와 근거, 그리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서 논의하는 것은 옳다. 하지만 지명과 관련한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가 지자체 별로 모두 다르고, 중앙정부마저 지명의 종류에 따라 국토해양부, 행정안전부, 국방부 등 부처가 나뉘어져있어 국가적인 차원의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현재 지도와 지명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국토지리정보원에서는 중앙지명위원회에서 승인한 지명을 고시하는 역할만 하고 있을 뿐 일제강점기 지명 변경과 관련된 사업계획이 없다. 

일제강점기의 잔재는 지명변경 외에도 행정구역체제에도 남아있다. 우리나라 행정체제는 1914년 일제가 편리한 통치와 자원수탈을 위해 진행한 행정체제 강제 개편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 개편은 백두대간 산줄기와 물줄기를 통해 형성된 자연스런 마을 생활권과 문화권을 바탕으로 한 기존의 행정구역 체계를 무시하는 형태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아직도 이 행정구역 체계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지역주민의 생활권을 고려하지 않은 체계이기 때문에 큰 산줄기를 사이에 두고 하나의 '군'을 만들어 산줄기가 '면'과 '면'의 장벽을 형성해 생활의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환경 분쟁이 발생하고, 생활권과 문화권이 불편한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이후 우리나라는 경제성장과정에서 많은 국토의 변화가 있었다. 도로, 댐 등 대형 토건사업을 통해 원래 지형의 모습이 사라져 일제강점기 이전의 행정구역 체제 등으로 변경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개발하기 전 그 지역에 관한 인문지리, 자연지리적인 조사가 필요하며 그 내용을 남기는 작업을 해야 한다.

태백산맥에서 백두대간으로, 천황봉에서 천왕봉으로

지금도 몇몇 사람들은 우리나라 지형을 이야기할 때 태백산맥, 소백산맥으로 이야기한다. '산맥'지형은 일본이 우리나라의 광물자원을 조사할 때 그려진 지도의 모습으로 실제 우리나라의 지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당시 우리나라의 지도에는 백두대간 개념이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었는데도 '산맥'으로 바꿔 지도에 표기한 것 또한 일제 잔재이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마치 호랑이의 강인한 등허리를 떠올리게 하는 백두대간은 산이 물을 가르지 않고 물이 산을 넘지 않고 백두대간 마루금(능선)이 한 번도 끊이지 않고 여유롭게 흘러가는 모양을 담고 있다.

사람에게 이름이 중요하듯, 지명은 나라와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의 유산을 상징하고, 사회 구성원의 얼이자 정신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백 년 이어온 지명은 단순한 표기가 아니라 역사와 문화의 표현이자 흔적이다.

우리나라는 섬세하고 정확한 대동여지도와 산경표 등을 비롯한 지리인식에서 독특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왜곡되고 뒤틀린 지명이 등장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일본식으로 표기되고 불리고 있다.

일제 잔재와 관련하여 지자체에 문의하던 중, 지명 담당자의 '우리 산에 있던 말뚝은 다 뽑았는데요?'라는 대답을 먼저 들었다. 그만큼 일제 잔재는 민감한 내용이고 정부에서도 어서 털어내야 할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국토해양부나 국토지리정보원은 일제 잔재인 창지개명을 청산하는 일과 관련하여 사업을 계획하지 않고 있다.

해방이후 국가지도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된 현지 조사나 지역주민들에게 탐문조사만 벌였어도 이런 식의 오기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라도 정부는 우리 땅 이름을 제대로 사용 할 수 있도록 전면적인 조사와 수정 작업을 해야 한다.

태백산맥에서 백두대간으로, 천황봉(天皇峰)이 천왕봉(天王峰)으로 일제 잔재를 털고 원래 이름을 찾아가는 물결은 앞으로 계속 되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자희 기자는 녹색연합 자연생태국 활동가입니다.



태그:#지명, #일제강점기, #천황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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