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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을 조성한 지가 벌써 1200년 하고도 몇 년이 더 흘렀다. 그동안 몸돌인 비문이 금이 가고 갈라졌지만,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는 온전하게 남아 있다.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7번지 쌍계사 경내에 세워진, 국보 제47호인 '진감선사대공탑비'의 현재 모습이다. 이 탑비는 경내에 웅장하게 서 있는 팔영루와 대웅전 사이에 자리를 하고 있다.

 

진감선사대공탑비는 신라의 정강왕(재위 : 886~887)이, 신라 말의 고승인 진감선사 혜소(774~850)의 높은 도덕과 법력을 앙모하여 세운 것이다. 당시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쓰게 했다고 한다. 이 비가 세워진 것은 진성여왕 원년인 887년의 일이다. 비문인 몸돌이 손상이 되어, 쇠로 틀을 만들어 씌어놓은 진감선사대공탑비. 그 탑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진감선사는 속성이 '최씨'이다. 어려서 조실부모한 선사는, 신라 애장왕 5년인 804년에 출가하였다. 불도를 닦으러 당나라로 들어간 선사는 신감대사 밑에서 문하로 들어갔다. 선사는 헌강왕 2년인 810년에 중국의 숭산 소림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다시 종남산에 들어가 3년간을 더 도를 닦았다.

 

신라 흥덕왕 5년인 830년에 귀국한 선사는 상주 모악산 장백사에서 선을 가르쳤다. 그 후 지리산 화개곡으로 들어가 옥천사를 짓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대사는 불교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대중화시킨 주인공이다. '범패(梵唄)'는 절에서 재를 올릴 때 불리는 불교음악이다. 이 범패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한국 불교음악을 총칭하는 것이다.

 

이 범패는 일명 '범음', 혹은 '인도소리', 또는 '어산'이라고도 한다. 범패의 종류로는 안채비소리, 홑소리, 짓소리, 화청 등이 있고, 작법이라는 무용을 곁들인다. 작법에는 나비춤, 바라춤, 법고춤 등의 무용이 있다. 오늘날 범패의 효시가 바로 진감선사이다. 선사는 이 범패의 소리로 많은 대중을 교화하는 데 힘썼다. 불교음악으로 많은 사람들을 교화시킨 진감선사는, 77세의 나이로 옥천사(현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조각예술의 결정판

 

진감선사의 대공탑비는 한마디로 통일신라시대의 탑비 중에서 조각예술의 결정판이라고 할 만하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수수한 가운데 범접치 못할 위엄이 느껴진다. 몸돌인 비가 금이 가는 등 많은 손상이 되기는 하였지만, 최치원의 뛰어난 서체 하나만 갖고도 최고라는 찬사를 들을 만하다.

 

비는 아래로는 받침돌인 귀부를, 위로는 여의주를 다투는 용을 새겨놓았다. 통일신라 후기의 비를 보면 거북의 몸에 용머리를 갖는다. 진공선사대공탑비도 이 시대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등에는 6각형의 귀갑문의 문양을 새겼으며, 등의 중앙 부분에는 비를 세울 수 있도록 비좌를 만들었다. 이 비좌에도 구름무늬를 새겨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머릿돌인 이수에는 중앙을 네모나게 파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으며, 양편으로는 용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 용들은 서로 불을 뿜어내고 있는 형상이다. 이 뿜어낸 불꽃에서 꽃이 만들어지는 이채로움을 더했다. 머릿돌의 상단에는 솟은 연꽃무늬 위로 구슬모양의 머리장식을 놓았다.

 

아마도 당대에 최고의 대우를 받았던 진감선사이니만큼, 그 비 하나에도 정성을 다한 듯하다. 볼 때마다 새로움을 느끼게 해주는 진감선사대공탑비. 지난 3월 2일 쌍계사 답사를 하면서, 이 비 앞에서 꽤나 오랜 시간을 멈춰 있었다. 무엇인가 더 많은 것이 보일 듯해서이다.

 


태그:#진감선사대공탑비, #하동 쌍계사, #통일신라, #국보 제47호,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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