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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유적과 함께 하는 '2011 겨울 만주기행' 다섯째 날(1월 14일). 아침에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를 둘러보고 마을로 내려오니 그때까지 굴뚝에서 연기가 솟는 집이 있었다. 아침밥 시간은 넘었고, 날이 추워 군불을 지피는 모양이었다. 

 

마당에서는 아저씨 서넛이 산에서 베어온 나무를 전기톱으로 자르고 있었다. 여름에 왔을 때도 구석에 장작이 쌓여 있더니, 1년 내내 불을 지펴 밥을 해먹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집 안으로 들어가도 누구냐고 묻지 않았고, 이곳저곳 사진을 찍어도 제지하지 않았다.

 

세월에 할퀴고 씻겨나간 자국이 뚜렷한 대문, 겨울임에도 흙냄새 풍기는 마당, 집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판자 울타리, 낯선 사람이 집에 들어왔는데도 짖지 않는 누렁이 등은 1960년대 초 고향 동네 변두리 판잣집 한 채를 옮겨놓은 듯했다. 

 

편한 자세로 엎드려 뭔가에 시선을 모으고 있는 누렁이가 발길을 멈추게 했다. 위용이 넘치는 목 주위 털들이 사자의 갈기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도톰한 발목에 어깨가 쩍 벌어지고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힘도 세고 집도 잘 지킬 것 같았다.

 

한가로운 농촌 들녘, 알고 보니 격전지

 

버스에 올라 대종교(大倧敎) 3대종사(三大倧師) 묘역으로 이동했다. 시계는 오전 10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박영희 시인은 "청산리전투 승리의 밑바탕에는 우리가 지금 찾아가는 대종교 정신이 깔려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한얼님'을 숭배하는 대종교는 1920년대 사회주의가 들어오기까지 민족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다졌으며 청산리전투에 참가한 북로군정서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고 한다. 당시 종교활동은 단순한 종교적 차원을 넘어 일제에 저항하는 다양한 방법의 민족운동이었단다.

 

버스는 눈 쌓인 겨울 들녘과 완만한 곡선으로 이어진 산등성이를 좌우로 가르며 달렸다. 포근하고 한가로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박 시인 설명에 따르면 연길을 중심으로 반경 100km까지는 독립군과 일본군의 격전지로, 항일투사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간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화룡시 청파호(청호촌) 나지막한 구릉에 자리한 대종교 3대종사 묘역으로 가려면 버스에서 내려서 소달구지나 다닐만한 좁은 들길을 걸어가야 했다. 6개월 전에는 무성한 잡초와 코를 찌르는 풀냄새가 반기더니 겨울에는 거름 냄새가 섞인 퀴퀴한 흙냄새가 우리를 맞이했다.

 

묘역으로 가는 길목에는 독립군이 야산에 토굴을 파서 사용하던 무기창고가 두 개 남아 있었다. 무기고가 있는 마을의 옛 이름은 '청파호'로 무장투쟁에 앞장섰던 대종교 본부가 있었으며 주민 대부분이 신도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풀로 덮어놓으면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붉은 벽돌을 쌓은 돌출된 부분은 없었다고. 지금까지 형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무기고들은 항일 무장투쟁이 가장 치열했던 곳임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대종교 3대종사 묘역... 작년에도 올해도 초라하게 느껴져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3대종사 묘역은 중국 화룡시 인민정부가 1991년 9월 1일 '화룡시문화유물보호단위'로 공포하고 비와 안내문을 세웠다. 한국으로 치면 '지방문화재'급임에도 작년에도 올해도 초라하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묘역을 알리는 안내문과 비문은 '항일지사'가 아니라 '반일지사··'로 시작하고 있었다. 지하에 잠든 세 대종사도 '항일(抗日)'보다 '반일(反日)'을 더 반길지는 의문이었다. 비록 남의 나라 땅에 묻혔지만, 세 분이 함께 잠들어 있으니 영혼이나마 서로 위안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세 묘비에는 '대종교(大倧敎)'라 표기하고 있었고 특히 나철 대종사 비에는 '대종교 대종사(大倧敎 大倧師)'라 새겨놓았지만 안내문에는 '대종교'라는 말이 빠져 있어 의아스러웠다. 박 시인은 문화유물 관리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중국 공산당이 개입하기 때문에 어투가 다르고 비문이 바뀔 수밖에 없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나란히 묻힌 나철(1863-1916), 서일(1881-1921), 김교헌(1868-1923)은 대종교 3대종사로 20세기 전반기에 만주 동북지구에서 화룡시 청파호를 기지로 항일 계몽운동과 교육활동을 전개하고, 청산리전투 선봉에서 활약한 분들이다.

 

특히 대한군정서 총재였던 서일 장군은 '흑하사변'으로 동지들을 잃자 대종교의 폐기법(廢氣法)으로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단다.

 

조선 동포들의 충혼이 담긴 혁명열사기념비

 

3대종사 묘역을 참배하고 내려와 용정에 있는 식당으로 이동했다. 오후 일정이 빡빡해서 한가로이 보낼 시간이 없었다.

 

연변 조선족자치주에서는 콘크리트로 된 '혁명열사 기념비'가 자주 눈에 띄었다. 숲이 우거지지 않은 겨울이어서 더 쉽게, 더 많이 발견되는 것 같았다. 버스 승객의 눈길과 쉽게 마주치는 언덕이나 산 중턱에는 어김없이 세워져 있었다.

 

문득 작년 여름(8월)에 안내했던 여성 가이드가 생각났다. 가을 상수리처럼 암팡지게 생긴 그녀는 탱글탱글한 목소리로 "산에 산마다 진달래요, 촌에 촌마다 열사기념비라네!"라고 노래하며 연변과 연길을 안내했기 때문이었다.

 

여성 가이드는 "기념비는 중국 남방보다 동북방에 많다"며 "중국 산둥성 출신 시인 허징즈[賀敬之]가 연변 산하를 돌아보며 읊은 시"라고 말했다. 그녀의 설명을 따르면 연변조선족자치주 학교, 공원, 마을 등에 5백 개가 넘는 혁명열사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혁명열사기념비는 항일무장 투쟁, 중국 내 해방전쟁(국공전쟁), 한국전쟁 때 희생된 2만여 명의 중국동포들의 넋을 기리고 있었다. 항일 무장투쟁과 두 차례 전쟁을 통해 중국동포들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특히 전쟁에 참전한 길림성 전체 혁명열사 중 41%가 연변지역 출신이란다. 그중 92%가 중국동포라고. 그럼 그들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을까? 결국 1952년에 지정된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조선 백성의 피와 땀으로 세운 땅이라는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조선족자치주, #혁명열사기념비, #대종교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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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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