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좀 쓸쓸하게 보낸 아이 생일입니다. 생일을 맞은 현경이는 어떨지 몰라도 아빠인 제가 생각하기엔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애 엄마가 일이 있어 멀리 출타 중이라 그렇게 생각되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미역국도 못 얻어먹고, 엄마, 아빠로부터 변변한 선물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현경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컸다는 증거입니다. 제가 12일 딸 생일날 한 것은 아침에 학교 갈 때, 운동회 티 값 등 학교에 낼 돈에 조금 남는 짜투리를 생일이니까 그냥 쓰라며 준 것이 전부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인 딸 현경이는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학교로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잊고 보냈습니다. 설교 준비 하랴 14일 결혼식 주례 준비하랴 저로서도 분주하게 보낸 시간이었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중간 중간 볼일 보러 서울 간 아내로부터 애들 들어오면 잘해주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속으로 '그럼, 잘해주지 않고, 내가 아이들 잡기라도 한단 말인가'라고 군시렁거리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오후 10시 가까이 되었습니다. 둘째 딸 윤경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정희 언니가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현경이 언니 생일 선물로 준비했는데, 그것을 받아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좀 늦는다는 전화였습니다. 정희는 제가 목사로 있는 교회 학생회 부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현경이하고는 친구가 되는 학생입니다. 학교도 같고, 사는 곳도 서로 인근이라 가까이 지내고 있습니다. 처음엔 친구 보고 교회 나오는 것 같더니만 지금은 믿음도 바로 서 가고 있는 듯해 내심 기쁘게 생각하고 있는 아이입니다.

오후 11시가 다 되어서 조촐한 생일 파티가 저희 집 거실에서 열렸습니다. 저는 우리 세 사람뿐인데 무슨 파티람, 하는 마음으로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윤경이 혼자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급히 나가서 축하 노래에 합류했습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현경이 생일 축하합니다."

촛불을 끄고 폭죽은 준비되긴 했지만 터뜨리기를 생략했습니다.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벌써 녹으려고 했습니다. 현경이가 "이 케이크 비싼 것인데, 정희가 돈이 어디 있다고 이런 것을 사서 보낸담" 하면서도 좋아했습니다. 좋은 친구란 이런 데서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학교에서도 친구들이 생일 파티를 열어 주었다며 노트를 한 권 내밀었습니다. 빈 노트가 아니었습니다. 사진과 함께 순수하고 감성 넘치는 글도 정갈하게 써 넣고 캐릭터 스티커까지 오밀조밀 붙여 만든 선물이었습니다.

딸 생일에 정성 담아 '생일 문집' 만들어 선물한 아이들

장녀(당사자는 큰딸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함) 현경이의 16회 생일날, 친구 소연이와 가영이가 밤을 새며 만들어준 생일 기념 문집 <우리들의 이야기>
▲ 생일 문집 <우리들의 이야기> 장녀(당사자는 큰딸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함) 현경이의 16회 생일날, 친구 소연이와 가영이가 밤을 새며 만들어준 생일 기념 문집 <우리들의 이야기>
ⓒ 이명재

관련사진보기


표지에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생일을 맞은 현경이를 가운데 하고 왼쪽에 소연이 그리고 오른쪽에 가영이의 사진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특징이 도드라지는 사진이어서 그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고 또 무슨 생각으로 미래를 꿈꾸고 있는지까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일 문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선물을 만드느라 하룻밤을 꼬박새웠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친구 사랑 그리고 열정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표지를 넘기니 '이 책을 이현경님에게만 바칩니다. -신 자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른인 저는 이것을 공책으로 봤는데, 청소년인 그들은 손수 만든 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헌정의 말을 첫 쪽에 붙인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책을 만든 이들로 '신 자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 소연이와 가영이가 같은 '신씨'여서 그런 친근한 표현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이들의 정성이 대단합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예전에 군대 제대할 때 동료 후배 군인들이 '전역'을 축하한다며 만들어준 추억 앨범을 연상케 합니다.

아이들의 글도 맵시가 있습니다. 그들의 우정을 다짐하는 글들이 페이지마다 수 놓여 있습니다. 어디서 오려왔는지 요람 위에 귀저기 찬 아이 사진을 붙여놓고 그 밑에 '우리는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것도 아니고… .' 다음 장엔 한반도 지도를 붙여놓고 '같은 지역 사람도 아니고….'라는 글귀를 달아놓았습니다. 지도를 자세히 보니 서울과 김천 그리고 대구에 빨간 글씨로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아마 서울에서 태어난 현경이, 김천에서 태어난 소연이 그리고 대구에서 태어난 가영이의 출생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어서 세 아이들을 나타내는 캐릭터 사진 밑에 '생각하는 것도 다르지만… .' 페이지를 달리하여 '촌팸으로 하나 됐지!!'라는 글귀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촌팸'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중요하다는 표시로 글자 위에 두 개의 꽃무늬 스티커까지 붙여 놓았습니다. 촌에서 살고 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촌에 있는 초등학교를 나왔다는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촌'과 관계가 있는 말임엔 분명한 것 같습니다.

본론 격으로 세 아이의 자기소개를 자세하게 기술하며 서로의 다름을 강조하고 있지만, 영화와 연예인 그리고 운동선수 등 함께 좋아하는 것들을 소개하며 어깨동무한 사진 밑에 '서로 상처 주는 말도 많이 하고 서로 간에 자잘한 갈등과 오해도 있었지만… .' '힘들 때는 서로 위로해 주고 잘 되는 일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고민 있으면 터놓고 이야기하자'며 끈끈한 우정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반 아이들이 생일을 맞이한 현경이에게 주는 예쁜 글씨의 축하 글들이 몇 페이지에 걸쳐 빼곡히 붙여져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정은 날개 없는 사랑이다. -바이런-' '-THE END-'로 저술(?)은 막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현경이의 생일을 맞이해서 친구들이 정성껏 마련해 준 문집을 보면서 저는 엉뚱한 상념에 젖었습니다. 이 사회가 각박하고 이기적이고 무한 경쟁에 내몰려 있다는 한탄의 소리가 많이 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른들의 생각과 세계이지 아이들은 순수함과 천진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의 관점이라면 한 친구를 위하여 밤을 새며 순수하면서도 아름다운 꿈을 담은 문집을 만들어 이튿날 전해 주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현경이의 이번 생일이 좀 쓸쓸했다고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형식만 따지는 아빠의 마음이었지 아이들에겐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꾸민 생일잔치가 난무하는 가운데, 아이들의 정성과 사랑이 담긴 생일을 생각하니 갑자기 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우리는 늘 내용이 형식을 규정하기보다 형식이 내용을 이끄는 모습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베풀며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에 관심을 두기보다 결과에만 연연하는 우리 어른들이었습니다.

현경이 친구들이 밤을 새워 만든 문집 말미에 '아가씨 되어서 카페에 모여 수다 떨고 … 아줌마 되면 애들 데리고 다 같이 밥 먹고 … 늙어서도 끝까지 함께 가자~'고 한 세 소녀의 다짐은 인생의 전 과정을 잘 담고 있는 글귀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 답습니다. 어른 흉내나 내는 아이들은 이렇게 다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출세해서 너를 생각하고 내가 잘 되어서 너를 돕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식의 약속이 앞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 자매(현경, 소연, 가영)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우정이 변치 않고 이어지기를 세 자매의 한 아빠로서 또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바라고 기도합니다.


태그:#생일 기념 문집, #우리들의 이야기, #친구, #우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