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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역 사거리는 작년 9월 집중호우때도 이랬던 곳이었다
 대치역 사거리는 작년 9월 집중호우때도 이랬던 곳이었다
ⓒ 이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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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운동하는 습관 때문에 승용차가 무사했다.

27일 오전 5시 천둥소리에 평소보다 30분 먼저 눈을 떴다. 오전 5시 50분쯤 체육관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는데 주차장까지 가는 동안에 이미 옷이 다 젖을 만큼 비가 거셌다. 참고로 나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은마아파트에 산다.

아파트 정문 앞 도로로 나서니 물이 찰랑찰랑해질 기미가 보였다. 순간 작년 9월의 악몽이 떠올랐다. 불과 몇 시간의 비에 차가 둥둥 떠다녔기 때문이다. 난 끔찍했던 악몽을 떠올리며 체육관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사무실로 출근했다.

아이들 데리고 친정으로 떠난 아내

폭우로 전기와 물 공급이 끊긴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28일 오후 발전기가 투입됐지만 오후 늦은 시간까지 정상화되지 않고 있다. 강남구청은 단전, 단수로 인한 아파트 주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임시 발전기 8대와 식수를 지원했다고 밝혔다.
 폭우로 전기와 물 공급이 끊긴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28일 오후 발전기가 투입됐지만 오후 늦은 시간까지 정상화되지 않고 있다. 강남구청은 단전, 단수로 인한 아파트 주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임시 발전기 8대와 식수를 지원했다고 밝혔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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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출근해서 몇 시간 뒤 뉴스로 전해지는 대치역 사거리는 작년보다 더 심각했다. 대치동 침수지역 바로 앞 아파트에 살기 때문에 남일 같지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파트 앞 도로가 침수돼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고 한다.

아내가 전화로 상가 지하를 비롯해서 아파트마저도 물과 전기가 끊겼다고 전해왔다. 애들을 데리고 친정 집으로 떠나는 길이니 오늘 밤은 집에 오지 말고 모텔에서 자고 오란다.

사무실 직원 중엔 아내에게 모텔에서의 외박을 정식으로 허락 받았으니 좋겠다는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지만, 난 집에 가보기로 했다. 1층이라 혹시 집까지 물이 들어오진 않았을까 걱정이 돼서였다.

지하철 분당선으로 수서까지는 갈 수 있지만, 수서에서 선릉역은 운행하지 않는다는 뉴스를 들었기에, 걸어서라도 집에 갈 각오를 했다. 다행히 물이 빠지면서 지하철이 운행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서현역에서 햄버거로 대충 저녁을 해결하고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도착했다.

아파트 단지를 걸어오는 동안 아파트 동마다의 불빛을 살폈다. 불 꺼진 동도 있었는데 다행히 내가 사는 동은 불빛이 보였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집에 도착해서 수도꼭지를 틀어보니 물이 나오지 않았다. 냉장고에 있던 생수로 세수와 양치는 했지만, 화장실 변기는 난감했다. 다행히 대안은 있었다. 마루에 있던 어항이었다. 어항 물을 떠다 변기에 부어서 해결했다. 금붕어들은 물이 줄어 거의 움직이지도 못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악몽 같은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다시 출근을 했다.

김치통에 물을 길어 나르는 주민
 김치통에 물을 길어 나르는 주민
ⓒ 이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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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째 물이 나오지 않는다... 맥이 풀렸다

이틀째 날, 퇴근을 하면서 물이 나올까 기대를 했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섰는데 주민들이 물통을 들고 물이 나오는 아파트 동 앞에 줄을 서고 있었다. 맥이 풀렸다. 관리실에 전화해보니, 지하실로 물을 퍼내려 내려갔던 청소용역 아주머니가 감전으로 죽었기 때문에 단전·단수 수리는 며칠 뒤부터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물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 그렇게 서 있으니 눈앞에는 기막힌 광경이 펼쳐진다. 물통을 들고 줄을 선 사람을 뒤로하고 수도꼭지 앞에서 머리를 감는 아주머니가 있는가 하면, 쌀과 상추를 씻어가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줄을 선 주민들은 대부분 이번 집중호우 대응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다. 작년과 똑같은 상황이 발생해 같은 장소에서 침수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1년 사이에 하수관 정비나 침수방지에 대한 대책은 전혀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물통을 들고 줄을 선 누군가는 "나랏돈은 죄다 4대강에 퍼붓고 정작 매년 일어나는 시내 정비는 할 겨를도 돈도 없나 보다"고 말했다.

물 받으러 줄을 선 은마아파트 주민들
 물 받으러 줄을 선 은마아파트 주민들
ⓒ 이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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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엔 큰 물통도 마땅히 없어서 생수병을 두 개 가져갔다. 한 통으로는 잠들기 전 대충 씻는 데 사용했고 남은 한 통은 다음날 아침에 세수와 양치질을 하기 위해 남겨 두었다. 이젠 어항에 물도 더이상 없어 화장실은 이용하지도 못하게 됐다. 급한 대로 관리실에 있는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3일째 되는 29일 오전, 샤워라도 하기 위해 운동을 하러가는 체육관으로 갔다. 샌드백을 실컷 두드리고 나니 찝찝한 몸과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체육관의 허름한 샤워장까지도 사뭇 감격스러웠다. 집에 언제 물이 다시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물과 전기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게 돼 감사하다.


태그:#대치동, #은마아파트, #집중호우피해, #서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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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선수협의회 제1회 명예기자 가나안농군학교 전임강사 <저서>면접잔혹사(2012), 아프니까 격투기다(2012),사이버공간에서만난아버지(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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