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수양대군 잠저시절 북문이었다
▲ 덕수궁 후문 수양대군 잠저시절 북문이었다
ⓒ 이정근

관련사진보기


수양이 사저 북문을 나섰다. 사람들이 별로 왕래하지 않은 길이라 수풀이 무성했다. 정동에 있는 수양의 집에서 돈의문 밖 김종서의 집으로 가는 길은 서소문을 나와 만초천을 타고 가는 길이 지름길이다. 하지만 그 길엔 잡범을 처형하는 형장(刑場)이 있다. 당연 사대부들이 꺼리는 길이다. 그렇다고 가마타고 다니던 새문안길로 가기위해 광통교로 돌아 갈수도 없다. 지금은 시간이 급박하다.

얼마가지 않아 잘 생긴 금강송이 곳곳에 서있다. 소나무 사이로 언덕길에 이르자 말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숲속에 듬성듬성 잔디가 깔려있고 웅덩이가 패어있다.

"이곳이 어떤 곳이기에 이다지도 음기가 강열하느냐?"
"파묘지입니다."
무사들을 이끌고 뒤따라 온 한명회가 답했다.

"누구의 묘이냐?"
도성 안에 묘지가 있었다면 그 주인공은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다.

"태조대왕 후비 강씨의 묘였는데 지금은 파묘되어 사초지만 남아있습니다."
"으음!"
수양이 괴로운 신음을 토해냈다.

"40여 년 전,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기 7년 전. 증조부님께서 정성을 다해 가꾸었던 능침을 헐어내어 다리를 만들어 버린 할아버지의 심정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신덕왕후의 정릉을 헐어내어 축조한 광통교(좌). 신장석의 무늬가 선명하다(우)복개된 청계천에 묻혀있었으나 복원으로 햇빛을 보게 되었다.
▲ 광통교 신덕왕후의 정릉을 헐어내어 축조한 광통교(좌). 신장석의 무늬가 선명하다(우)복개된 청계천에 묻혀있었으나 복원으로 햇빛을 보게 되었다.
ⓒ 이정근

관련사진보기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계비 신덕왕후가 죽자 정동에 왕후릉을 조영했다. 자주 찾아보기 위해서다. 왕릉은 '도성 밖 백리 이내'라는 규정을 어긴 파격이었다. 이복동생 방석의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정동에 있던 신덕왕후릉을 파헤쳐 동소문 밖 사한리로 이장하라 명하고 장대석과 병풍석 등 석물은 광통교를 만드는 데 사용하라 지시했다.

"태조께서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언감생심 신권(臣權)을 앞세워 왕권(王權)을 넘보다니, 나라가 있어야 신권이 있는 것이지 나라 없는 신권이 무슨 소용이더냐? 어린 세자를 감싸고돌며 증조부의 총기를 흐리게 한 놈, 네놈이 나쁜 놈이었어. 네놈은 할아버지 손에 주살을 당해도 싼 놈이야, 내가 할아버지라도 그리했을 것이다."

오솔길을 천천히 걸어가는 마상(馬上)에서 짧지만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수양의 뇌리에 환영이 스쳤다. 백악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삼청동을 지나 청계천으로 흘러가면서 잠시 쉬어가는 계곡. 솔향기 그윽한 송현 아래 남은의 애첩 송월이의 취월당. 신권에 방해가 되는 왕자들을 제거할 거사일을 정해놓고 심효생, 남은, 정지화의 졸개들을 불러 단합대회를 벌이다 이숙번의 기습을 받고 자신의 집으로 도망친 개국공신. 추격대에 붙잡혀 '예전에도 공이 나를 살렸으니 한번만 더 살려주시오'라고 이방원에게 애걸하던 정도전. 그의 모습이 그림처럼 스쳐지나갔다. 돈의문에 이르렀다.

"권언·권경·한서구·한명진은 내성 위에 잠복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한명회가 눈동자를 굴렸다.

"그렇게 하라."

김종서의 옛 집터에는 농업박물관이 들어서 있다(좌) 표지석(우)
▲ 집터 김종서의 옛 집터에는 농업박물관이 들어서 있다(좌) 표지석(우)
ⓒ 이정근

관련사진보기


김종서 집 앞에 다다른 수양, "좌상을 뵈러 왔네"

권람을 앞세운 수양이 김종서의 집 동구에 이르렀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 고래등 같은 저택이 시야에 들어왔다. 길 건너 경기감영보다도 규모가 커보였다. 변방을 평정한 김종서는 함길도 관찰사시절부터 북방 왕래가 잦았다. 때문에 도성 안에 집을 갖는 것보다 돈의문 밖에 집을 장만하는 것이 편리하여 고마동에 거처를 마련한 것이다.

집 가까이 다가가자 솟을대문 앞에 무장을 갖춘 30여 명의 무사가 서성이고 있었다. 마구간을 나온 여러 필의 말도 보였다. 여차하면 뛸 수 있는 기병이다. 본채 바깥에 자리 잡은 김종서의 맏아들 김승규의 집 앞에도 군장을 갖춘 무사 세 사람이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누구냐?"
수양이 김종서의 집 앞에 이르자 무사들이 그를 에워쌌다.

"무엄하구나. 이분은 수양대군 나리이시다. 어서 길을 비켜라."
권람의 목소리에 놀란 무사들이 길을 열었다.

"어서오시지요. 대군 나으리."
집 앞에서 윤광은, 신사면과 담소를 나누던 김승규가 정중하게 수양을 맞이했다.

"좌상 영감님을 뵈러 왔네. 어서 고하시게."
사헌부 지평과 형조정랑을 지내고 정삼품 병조참의에 있는 당상관이지만 수양에게는 하대의 대상이었다.

"수양대군이 아버님을 뵙자고 합니다."

"찾아온 사람이 적으면 나아가 접할 것이고 많으면 쏘라 할 것이다."
12척 담 뒤에는 시위를 겨냥한 궁사들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적습니다."
담 위에서 수양 일행의 행동을 살피던 가노가 승규를 뒤따라와 아뢰었다.

"알았다. 의관을 정제하고 나갈테니 잘 모시도록 하라."
가노의 보고에 안심이 된 듯 김종서가 뽑아 든 칼을 벽에 걸어 놓고 나왔다.

"안으로 드시지요."
김종서가 예를 다해 맞이했다.

"드릴 청이 있어 찾아 왔습니다만 해가 저물어 결례가 될까봐 저어됩니다."
수양은 움직이지 않았다. 김종서가 두세 번 들어오기를 청하였으나 수양이 사양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시지요."
마지못해 김종서가 뜰 앞으로 나왔다. 정조(停潮)와도 같은 정막이 흘렀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할 때 바닷물이 멈춘 듯이 보이지만 수면아래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전개된다. 썰물은 밀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밀물은 쓸리지 않으려고 안감 힘을 쓴다. 하지만 썰물 때가 되면 밀물은 밀리고 밀물 때가 되면 썰물은 쓸린다. 순리다.

"사모뿔을 빌릴 수 있겠습니까?"

뜻밖이었다. 허를 찔린 것이다. 김종서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활을 당길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시위가 끊어져 버린 느낌이었다. 김종서가 수양의 사모를 쳐다보았다. 한쪽 뿔이 없다. 난감한 일이지만 공연한 청도 아니다. 수양의 사모뿔은 말 타고 달려오면서 떨어져버린 것이다.

사모뿔은 사모 좌우에 달린 잠자리 날개 모양의 뿔이다. 그것이 없는 사모는 쭉지 빠진 장끼처럼 몰골이 사납다. 김종서가 창황히 사모뿔을 빼어 주었다. 굴욕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그가 아니다.

"사모엔 관대가 제격인데 갑주는 썩 어울리지 않습니다."
회심의 일격이다. 역시 노회한 재상이다.

 우포도청 표지석
▲ 표지석 우포도청 표지석
ⓒ 이정근

관련사진보기

"굶주린 백성이 도적질하는 것은 눈감아줄 수 있지만 배에 기름 낀 자들이 나라를 도적질 하려는 것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찬바람이 서늘했다.

"도둑은 포청에서 잡아들이지 않습니까?"

도적(盜賊)과 도적(徒賊)을 구분 못하는 김종서가 아니다. 그가 세종의 명을 받고 6진을 개척할 때. 두만강을 넘어와 노략질을 일삼던 여진족과 말갈족은 그를 백두산 호랑이와 같은 장군이라고 두려워했지만 실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대언으로 출사한 문신 출신이다.

"그자들이 포청을 잡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김종서의 입가에 냉소가 흘렀다. 좌포청과 우포청에 내 사람을 좀 심었기로서니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래, 대군께서 나셔서 몇 놈이나 잡으셨습니까?"

날선 공방이 이어졌다. 이들의 모습을 주시하던 임어을운이 앞으로 나섰다. 거의 동시에 윤광은과 신사면이 김종서를 에워쌌다.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물럿거라."
수양이 호통쳤다. 임어을운이 머쓱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김종서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말이 없었다. 그를 에워싼 호위무사들을 노려보던 수양이 입을 열었다.

"내밀한 청이 있으니 너희들은 물러가라."
윤광은과 신사면이 김종서의 눈치를 살피며 뒤로 물러났다.

"편지가 있습니다."
수양이 데리고 온 하인을 불러 편지를 가져오게 했다. 편지를 받아든 김종서가 달빛에 비춰 보았다. 영응대군 부인 탄핵이라고 쓰여있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눈 가까이 살피려는 순간, 임어을운의 철퇴가 별빛에 번득였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김종서가 쓰러졌다. 깜짝 놀란 승규가 김종서를 감싸며 엎드렸다. 그 순간, 양정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솟구친 선혈이 수양의 옷자락을 적셨다.


태그:#수양대군, #김종서, #한명회, #계유정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