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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쓰다 책표지
ⓒ 한겨레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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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누군가의 자서전을 읽는 심정은 자기개발이나 처세술에 관한 책을 읽는 마음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부와 명예 같은 세속적인 목표가 아닐지라도 우리네 보통 사람들은 동경과 존경의 눈으로, 어떤 이의 자서전에서 답답하고 궁색한 현실의 돌파구를 찾아야 할지도 모르니까.

매순간 눈앞의 손익에 민감하게 반응하길 강요당하면서 우리의 호흡은 갈수록 짧아지고 거칠어진다. 연표와 시대별 왕들의 업적을 순서대로 외우는 게 최상의 목표이고, 역사의식은 독도나 동북공정 앞에서 민족감정에 불이 붙어야만 생겨난다.

이런 때에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학위나 졸업장 없이도 '길 위의 역사학자', '민중사학자'로 불린 이의 자서전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역사학자 이이화는 팔삭둥이 서자로 태어나, 한문만 가르치고 학교에 보내지 않는 아버지 품을 떠나 가출했다. 고아원을 옮겨 다니며 간신히 고등학교를 마쳤다. 문학청년을 꿈꾸며 대학에 입학했지만 보험 사원, 군밤 장사, 웨이터 등을 전전했고 생활고 때문에 피를 팔기도 했다.

대학 졸업장도 없이 20대 후반에 한국사를 공부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직장을 다니며 고전과 역사를 연구했다. 1960년 4월, 1980년 5월, 1987년 6월은 물론 2008년 6월에도 그는 길 위에 있었다. 역사기행·역사강좌를 통해서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동학농민군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10년에 걸쳐 '한국통사' <한국사이야기>(한길사) 22권을 완간했다.

이렇게 역사학자 이이화의 과거를 요약한다고 우리가 선생의 삶을 제대로 실감한다고 할 수는 없다. 500쪽이 넘는 자서전에서, 본격적으로 민중사학자의 길에 들어서기 전, 청년시절까지는 사건을 중심으로 100여 쪽으로 압축했고 1970년대 중반 이후 연구 활동과 역사기행, 한문강좌, 중국유적답사와 저술활동에 관한 일은 선생의 역사관과 함께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기록했다.

어렵고 궁핍한 시절을 버티면서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정진할 수 있는 힘이 궁금한 사람들과 학위나 졸업장 없이 민중사학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느꼈을 갈등과 번민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책 앞부분 100여 쪽은 너무 짧을지도 모른다. 한편, 나처럼 선생의 역사책을 한 권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채 덥석 자서전을 잡은 사람이 나머지 400쪽을 읽는 것은 문제지 없이 해설서를 먼저 읽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

선생의 '한국통사'는 22권을 끝으로 해방 후의 현대사 앞에서 멈추었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하는 이 책이 그 공백을 어느 정도 메우고 있다. 개인의 기록은 조금 덜 보편적이지만 그만큼 구체적이고 치열할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와 계산기를 두드리며 앞으로 나아갈 때도 지나온 길을 다시 살펴보고 어지럽고 왜곡된 발자국들이 제자리를 찾도록 열심히 싸운 이들이 있다는 것을 이 책은 일깨운다.

책 한 권에서 답답한 현실을 타개할 구체적 해답이나 지혜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와 역사가의 삶 앞에서 거칠고 가쁜 숨을 잠시나마 고르며 주위를 돌아보고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볼 여유를 얻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한숨 돌린 후에, '한국통사'를 읽어볼 생각이다.

사족 하나, 책에는 '인명 찾아보기'가 따로 있을 정도로 많은 이름들이 등장하는데 생각지 못한 이름을 찾았다. 바로 민간인 사찰을 고발한 '김종익'씨다. 1980년대 후반 선생의 한문강좌와 역사기행에 참여했다고 한다. 인터넷으로 검색했더니 그이는 요즘, 인도네시아 독립영웅으로 추서된 한국인 '양칠성'의 사연이 담긴 <적도하 조선인 반란>이라는 일본책을 번역하고 있다고 한다. 국가라는 추상적 실체가 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따져보면서.

덧붙이는 글 | <역사를 쓰다>(이이화 씀, 한겨레출판사 펴냄, 2011년, 523쪽, 20000원)



역사를 쓰다 - 이이화 자서전

이이화 지음, 한겨레출판(2011)


태그:#이이화, #한국사, #한겨레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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