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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
 <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
ⓒ 노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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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제주 해군기지 백지화를 요구하는 집회가 제주에서 열렸다는 뉴스가 TV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란 깃발이 빗속에서 도드라졌고, '해군기지 중단하라!'는 함성이 귀에 와 콱 박혔다. 왠지 반가웠고 아쉬웠다. 1분 42초는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지난달 29일 저녁, 다음 뉴스는 '공교롭게도' 부산세계불꽃축제 소식이었다. "어두운 바탕 위에 광안대교와 바다를 배경으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3분 48초 동안 펼쳐졌다. 현장 리포트가 끝나자 이번에는 스튜디오에 전문가가 등장했다. 다시 18분 42초 동안 축제 해설이 이어졌다.

당시 앵커 표현을 빌리면, "화려함에 넋을 잃은" 뉴스, 물론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치열함에 너무 박하다는 생각만은 떨치기 힘들었다. '강정 마을을 지키는 평화 유배자들'을 떠올리니 더욱 그랬다. 그들에게 '22분 30초'는 참 긴 시간 아니었을까. 저절로 곧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을까.

이 책, 그 맛이 영 달라졌다

<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
 <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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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니다. '유배지'에 관심 없기는 나 또한 매한가지였다. 방금 전 TV 뉴스에서 강한 어조로 말하던 고권일 강정마을 해군기지반대대책위원장,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거나 해군기지 때문에 귀향한 사람으로 여겼으리라. 애초 고향의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돌아온 아들이었음을 몰랐을 것이다.

<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고 알게 됐다. 물론 <오마이뉴스> 독자라면 한 번 쯤 들었을 법한 '노래'다. <오마이뉴스>에 '강정마을 평화유배자들'이란 제목으로 연재됐던 16편의 이야기를 묶은 책이다. 기자 이주빈이 썼다. 사진작가 노순택이 힘을 더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 맛이 영 다르다. 연재됐던 당시보다 그 노래가 훨씬 더 귀에 잘 들어온다. 마디마디로 나뉘었던 노래가 이제야 본디 제 가락을 타는 모양새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수록 '이 책, 구럼비 바위를 쏙 빼 닮았다'는 생각에 빠져든다. 강정마을 해안에 가 본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일단 이 책, '덧싸개'부터 매우 독특하다. 표지 안팎에 모두 열 다섯 개의 사진으로 얼기설기 '수'를 놓았다. 펼쳐 놓으면 어디 붙여 놓고 싶다. 육지 사람들이 가장 경치 좋은 올레 코스라고 격찬했다는 강정마을 해안, 그 아름다움을, 또 그래서 더한 지금의 아픔을 가슴에 새기라는 듯하다.

아름다워 더 아픈 노래 '구럼비의 노래'

<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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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최고의 예술'이라 상찬하는 제주도의 놀라운 풍광은 그가 좋아하는 바람이 비와 파도를 몰고 와 조각한 것이다. 어쩌면 그도 바람이 되고 싶은지 모르겠다 … 중략 … 처음 그 날처럼 선선한 바람은 제주바다에서 느리게 일어나 한라산 능선을 탔다." (작가 고길천 인터뷰 끝 부분)

저자의 풍부한 감수성 또한 컴퓨터 화면보다는 지면과 더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비료로 만들기 위해 발효시킨 생선(액비)를 뒤집어쓰고 용역 경비들과 맞선 강희웅씨와의 첫 만남을 소개하면서 "한 번 씩 슬쩍 흘리는 미소에선 참한 백합꽃이 핀다"고 표현한 대목 역시 비슷한 예 중 하나다.

물론 아름다운 시적 표현만 있지는 않다. 구럼비가 쪼개지는 현장을 목도한 그로서는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다. "믿고 의지할 데라곤 서로뿐인" 섬사람들이 해군기지 문제로 쪼개지는 아픔을 "그렇게 서로 섬 안에서 섬이 되어 버린 것", "바다는 갈라지지 않았는데 바다 속에 사는 사람들은 갈렸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 자신 '섬놈' 출신이면서도 저자는 분노를 한사코 아낀다. "저항은, 그렇게 누구나 꿈꾸는 평온한 일상을 침탈 받은 이들이 할 수밖에 없는 당연한 몸짓"이라거나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할 줄 아는 이가 청년이다. 그리고 분노의 밑천은 자유로운 영혼"이란 성찰을 내비치는 것으로 대신할 뿐이다.

평화 유배자들 '조각조각 삶'은 곧 구럼비 바위

<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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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가장 큰 미덕 또한 그러하다. 설익은 분노를 쏟아내는 일은 없다. 강정마을의 평화를 지키자고 목소리를 애써 높이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사람들, 그들이 어떻게 강정마을에 오게 됐는지, 그 다양한 삶을 담담하게 전하려고 노력한다.

나이 서른 둘에 '안동 김씨' 대신 '강정 김씨'를 택한 김민수, 커리어우먼 대신 평화운동가로서 길을 택하고 '구럼비의 노래'를 만든 대만의 왕 에밀리, "이제는 세상과 춤추고 있는" 전문 무용가 출신 '날라리' 김세리, 강정마을로 신혼 여행을 온 박중구·이선미 부부 등 16편의 '삶'.

저자는 이들 다양한 삶을 관통하는 것이 "우연의 뒤에 숨은 인생의 필연"이었음을 밝힌다. 어떤 '당위' 때문이라기보다는, 평화를 사랑하는 삶이 그들을 자연스레 구럼비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저자로 하여금 "유배를 자처했다"는 표현을 내보이게 만든 고유기씨 표현을 빌리자면 "'정의'니 평화니 하는 가치들이 손에 잡히는 공간이 바로 강정"이기 때문에.

따라서 이들의 이야기는 구럼비 바위 그 자체다. "흘러내린 용암 한 판이 굳어버려 그 길이가 무려 1.2킬로미터에 이르는 단일 바위", 언뜻 "조각조각 한 덩어리"의 '삶'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한 몸'의 삶인, 평화를 절실히 원하는 인류가 곧 구럼비 바위란 것을 이 책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평화의 숨비 소리, 구럼비 노래에 답하라

지난 5월 강제철거에 맞선 송강호 박사 모습. 비닐 하우스 철골에 매인 쇠사슬이 송 박사의 목을 감고 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극단적인 상황을 막기 위해 그의 두 다리를 꽉 붙들고 있는 두 남자의 모습. 처절한 구럼비의 지금, '구럼비의 숨비 소리'를 상징한다
 지난 5월 강제철거에 맞선 송강호 박사 모습. 비닐 하우스 철골에 매인 쇠사슬이 송 박사의 목을 감고 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극단적인 상황을 막기 위해 그의 두 다리를 꽉 붙들고 있는 두 남자의 모습. 처절한 구럼비의 지금, '구럼비의 숨비 소리'를 상징한다
ⓒ 강정마을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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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텅텅∼ 텅텅텅∼ 굴착기에 매단 정이 발가락 마디를 짓뭉개고 손가락을 으깨고 정수리를 뚫었어요. 하얀 살이 터져 포말처럼 강정바다에 흩뿌려졌어요. 까만 피가 쏟아져 구름처럼 제주 하늘에 흘렀어요 … 중략 … 이봐요, 이봐요, 거기 누구 없어요? 제발 이 미친 짓 그만두라고 말해주세요!" (에필로그, 구럼비의 노래 중)

그래서 구럼비의 '숨비 소리'는 매우 아프게 가슴을 울린다. 제주 해녀들이 "목숨이 끊어질 정도까지 참았다가 내뱉는 숨소리"를 내며, 지금 구럼비 바위는 "이봐요, 거기 누구 없냐"고 묻고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우리가 해야 한다"고 말이다.

"평화를 위해 싸우는 일이 몽상가나 하는 짓이라고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저는 평화를 위해 일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몽상가로 보여요. 왜냐면 전 세계 70억명 가운데 대다수는 평화를 절실하게 원하고 있기 때문이죠." (프랑스인 '평화 유배자' 뱅자맹 모네)

구럼비를 꼭 닮은 책, <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언제까지 평화를 '유배'시킬 것이냐고. 이제는 강정 마을을 지키는 그들에게서 '유배'란 딱지를 떼어 낼 차례라고. 평화의 숨비 소리에 귀를 기울여, 구럼비의 노래에 답할 차례라고 말이다.


[에필로그] "섬놈이 섬놈 얘기 썼을 뿐"이란 친구 이야기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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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든 생각은 단 하나였습니다. 이 책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아니, 사람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고요. 일단 명분은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 인세와 판매 수익금은 모두 강정 마을의 평화를 지키는데 쓰이게 됩니다. <오마이북>의 첫 번째 도네이션 북입니다.

하지만 그전에 정말 좋은 책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주고 싶은 책을 만난다는 것, 사실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마음이 이래서 더욱 기사 쓰기가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이주빈 기자는 회사 동료이자 친구를 트고 지내는 사이니까요.

그래서 더욱 '거리조절'을 하며 몇 번이나 퇴고를 거듭해야 됐습니다. 물론 그 결과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입니다. 그래도 이런 관계까지 굳이 밝히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우선은 이렇게 하는 게 독자의 객관적인 판단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입니다.

그 다음은 기사에서 차마 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남아서입니다. 책을 읽으며 사실 몇 번 눈물이 고였었습니다. 이 책을 쓰며 '친구'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섬놈'으로서 구럼비의 아름다움이 깨지는 아픔을 얼마나 진하게 느꼈을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이 갔기 때문입니다.

"섬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안다. 스치는 눈길 한 번에도 얼마나 마음이 울렁대는지, 누군가의 관심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하고 열정적인 기쁨인가를. 외로움을 천형처럼 지고 태어나서 그렇다. 섬에서 태어난 순간 이미 고독은 떼어낼 수 없는 멍에인 것이다.

그래서 섬마을엔 여러 갈래의 모임이 많다. 나이 같다고 갑장회를 만들고 초등학교라도 같이 다녔다 치면 동창회를 만든다. 부모님 장례 치러주는 상여계도 있고, 동생 결혼식 밑천 모으는 장가모임도 있다. 외로워서 그렇다. 믿고 의지할 데라곤 서로뿐이어서 그렇다." (본문 중에서)

그런데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문제가 불거지면서 2백여 개나 되는 각종 친목 모임이 대부분 깨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런 '팩트'가 친구에게는 아마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분노는 더욱 컸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를 애써 갈무리하는 모습이 행간에서 느껴졌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 친구, 무지하게 마음 여린 놈이거든요. 일요일 밤에 전화를 걸었더랬습니다. "구럼비야, 이렇게라도 널 볼 수 있어 다행이다. 이 눈물 그치는 날, 기어코 너를 다시 안으마. 울지 마라, 구럼비"라고 페이스북에 적은 글을 봤거든요.

이제까지 육로를 이용해 구럼비를 왕래했는데, 배를 타고 나온 건 뭐 처음이라나요? '아이'마냥 이야기하다 '울었냐?'고 물었더니 "좀 그랬다"는 말로 대신하더군요. 그러다 기사 관련 인터뷰 운운하자, 대뜸 단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섬놈이 섬놈 얘기 썼을 뿐이야."

아, 무안하게스리. 이런 놈입니다. 그러니 인세??? 아마 그로서는 당연한 결정이었을 겁니다. 모쪼록 이 책을 많이 나눴으면 합니다. 꼭 평화 비행기를 타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구럼비의 노래'를 아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연스레 그 '답가' 또한 바람을 타고 강정마을로 갈 것이 분명하니까요.


태그:#강정마을, #제주, #구럼비, #해군,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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