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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선비들이 많이 살아 '대감마을'이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진 산운마을
▲ '대감마을'로 알려진 산운마을 훌륭한 선비들이 많이 살아 '대감마을'이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진 산운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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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금성산 아래에 산운(山雲)마을이 있다. 마을 이름이 이렇게 멋있는 까닭은, 현지에 가본 이라면 누구에게 묻지 않고도 바로 알 수 있다. 수정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금성산 계곡의 바로 앞자락에 있는 마을이니 그 정도 이름을 얻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정말 산운마을은 산에 걸쳐진 하얀 구름처럼 평화롭고 조용하고 멋이 넘치는 마을이다. 영천이씨 집성촌인 선운마을에는 '대감 마을'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와 중요민속자료 237호인 소우당, 지방유형문화재 242호인 학록정사, 문화재자료 374호인 운곡당, 문화재자료 375호인 점우당 등 전통 고가옥 30여 채가 위풍당당하게 품위를 자랑하고 있는 광경을 확인하면 왜 산운마을을 '대감마을'이라 부르는지 대뜸 깨닫게 된다.

소우당, 운곡당, 점우당, 학록정사와 같은 전통 고가옥들을 둘러볼 때에는 대문이 닫혀 있는 때가 종종 있으므로, 마음가짐을 꼭 여미고 답사를 해야 한다. 그럴 때에는 두 발 뒤꿈치를 한껏 높여들고 담장 너머로라도 눈을 집어넣어야 한다. 닫힌 대문 틈으로 렌즈를 들이밀어서라도 기어이 멋진 '작품' 한 장을 만들어내어야 한다.

산운마을의 소우당(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237호)
▲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산운마을의 소우당(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2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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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산과 비봉산 아래 전통가옥 30여 채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고택들 위로 금성산과 비봉산의 시원한 산자락이 그림처럼 하늘에 걸려 있다. 기와 지붕과 산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치 푸른 산들이 고택들의 뒷담처럼 여겨지는 풍경이다.

높고 낮은 차이 없이 가지런히 골목을 이루고 있는 고풍스런 담장들에는 그 이름에 어울리게 담쟁이가 곱게 타오른다. 가끔은 휘영청 늘어진 감들이 황토로 만든 과일처럼 다소곳이 고개를 내밀고 있기도 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골목을 거니노라면, 조용한 집을 방문했을 때에 문을 두드리는 것이 좋을지 소리 없이 미는 것이 좋을지 헷갈렸다는 중국 시인 한유(韓愈)의 옛일이 저절로 떠오르면서, 이 마을의 선조들이 어째서 여기에다 터를 잡고 이처럼 살았는지가 바로 헤아려진다. '구름에 달 가듯이' 시간이 흘러가는 마을, 산운마을은 바로 그런 '고향'이기 때문이다.

산운마을 영천이씨 입향조 이광준 선생을 기려 건립된 집으로, 금성면 소재지에서 가음면 소재지로 가는 도로에서 볼 때 산운마을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 학록정사 산운마을 영천이씨 입향조 이광준 선생을 기려 건립된 집으로, 금성면 소재지에서 가음면 소재지로 가는 도로에서 볼 때 산운마을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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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운마을에서 도로에 가장 가깝게 있는 집은 유형문화재 242호인 학록정사(鶴麓精舍)이다. 영천이씨가 이 마을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학동 이광준(1531~1609) 선생부터인데, 학록정사는 입향조[入鄕祖]인 이광준 선생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750년(영조 26)경에  건립하였다.

산운마을을 개척한 이광준, 꼿꼿한 선비

이광준(李光俊)은 1592년 봄 강릉부사(江陵府使)가 되어 바닷가의 왜구들을 크게 물리쳤다. 조정에서 승진시키려 하였으나 강원도의 병권(兵權)을 가진 자가 거짓 보고를 올려 모함하는 바람에 오히려 벼슬에서 쫓겨났다.

중화군(평안남도 中和郡)은 임진왜란 때 왜적들로부터 특별히 혹독한 피해를 입었다. 과거 왜구들을 적극적으로 물리친 주민들에 대한 보복 만행이었다. 조정에서는 이광준을 보내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이광준이 부임해보니 고을은 온통 잿더미뿐이었고, 창고에는 한 말의 곡식도 없었다. 게다가 흉년과 질병으로 죽은 시체가 널려 있었다.

이광준은 밤낮으로 돌아다니면서 부상당한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굶주린 자들을 구휼하였다. 스스로는 음식도 줄였고, 옷도 새로 장만하는 법이 없었다. 농민들에게 농기구들을 마련해주었고, 병사들을 훈련시켰으며, 모든 일들을 조리있게 처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갔던 자들이 모두 돌아와서 백성과 물건이 번성해졌고, 황무지를 남김없이 개간하여 창고도 가득찼다. 조정은 그에게 상을 주고 3년 동안 더 일을 맡겼다. 공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고 그 고을 백성들이 송덕비 아래에 모여 울면서 제사를 지낸 이야기는 그의 인품을 잘 증명해주는 일이다.

이광준은 강직하여 권력가에게 굽히지 않았다. 젊어서 심의겸(沈義謙)과 함께 급제하여 교분이 매우 두터웠는데 뒷날 심의겸이 큰 권력을 잡고 공을 요직에 앉히려 했다. 공은 심의겸과 교분을 끊고 왕래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낮은 자리를 헤맸지만 결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공은 고을마다 백성을 편하게 했고, 관리들과 호족들이 엉뚱한 짓을 못하게 철저히 단속했다. 공은 가는 곳마다 백성들로부터 선정의 대명사로 칭송을 들었다.

도로변에서 바라본 학록정사와 그 배경을 이루고 있는 금성산과 비봉산
 도로변에서 바라본 학록정사와 그 배경을 이루고 있는 금성산과 비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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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버지에 그 아들, 이민성

이광준의 둘째아들 이민성(李民宬, 1570∼1629)도 꼿꼿한 충신으로 이름이 알려진 선비이다. 광해군 때, 권세가인 이이첨(李爾瞻)이 흉악한 간신들을 부추겨 인목대비를 가두려 하였다. 공이 매우 엄하게 꾸짖었다. 이덕형(李德馨)이 영창대군을 구하려다가 도리어 탄핵을 받게 되었을 때 공이 나서서 변론하였다. 모두들 눈치만 보여 웅크리고 있었지만 그는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명나라 조정에는 우리나라를 이간질하려는 자가 있었다. 이민성은 정사, 부사와 함께 인조반정의 거사를 극력 변론하여 명나라 조정의 의심을 풀었다. 그의 뛰어난 문장력이 나라의 어려움을 해결한 것이었다.

1627년, 여진족이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갈 지경이 되었다. 공은 경상좌도 의병대장에 추천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전주로 황급히 달려간 뒤였다. 거기 머물고 있는 왕세자를 위해 군대의 일을 돕고, 오랑캐를 막을 대책을 세우고, 흩어진 백성들을 모을 방법을 찾았다.  그 후 강화도로 가서 임금의 수레를 호위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청렴성과 유능함으로 이름을 떨친 이희발 선생이 지은 집
▲ 운곡당 청렴성과 유능함으로 이름을 떨친 이희발 선생이 지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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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관오리를 주눅들게 한 9세 소년의 눈빛

문화재자료 374호인 운곡당(雲谷堂)은 의성군 홈페이지가 소개하는 '의성의 인물'에 나오는 이희발(李羲發, 1768∼1849) 선생이 1800년 초에 세운 집이다. 안채 일부는 약 60여 년 전에 다시 지었다.

선생이 9세 때의 일이다. 어떤 탐관오리가 백성들에게 매우 혹독하게 세금을 거둬들이려 했다. 이희발이 엄정하고 매서운 눈초리로 관리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관리는 두려워 자기도 모르게 엎드렸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이 그를 공경하거나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잘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이희발이 어렸을 때 어머니가 심한 부스럼 병을 앓았다. 그는 옷도 벗지 않은 채 몇 달 동안 곁에서 간호를 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식사를 올릴 때에는 꼭 어린 아우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동생이 어머니의 식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희발이 벼슬을 하게 되어 대궐로 가니 임금이 그에게 술과 음식을 하사하며 뛰어난 재주를 칭찬하였다. 그러나 그는 술과 음식을 고향의 어머니에게 보냈다. 고향에서는 임금의 술과 음식을 받게 되자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희발은 1816년 영해부사(寧海府使)가 되었다. 영해부는 관원의 가혹한 수탈이 오랫동안 계속된 곳이라 백성들의 삶이 매우 어려웠다. 이희발은 정해진 세금 외에는 아무 것도 거두지 않았고, 학교를 새로 수리하여 재주 있는 선비들이 모이게 만들었다.

1826년에 영월부사(寧越府使)로 일할 때에도 선정은 계속되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백성을 병들게 하는 6가지 문제점을 모두 없앴고, 자신의 봉급으로 선비를 길렀다. 백성들이 모두 그를 칭송하며 잘 따랐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자 백성들은 스스로 공덕비를 세워 그를 잊지 않으려 했다.

국보 77호로, 분황사탑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모전석탑이다.
▲ 탑리5층석탑 국보 77호로, 분황사탑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모전석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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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5층석탑, 산운마을 인근에 있고

산운마을을 나와 금성면 소재지로 들어가면 의성의 으뜸가는 문화재인 탑리5층석탑을 볼 수 있다. 경주 분황사 석탑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지어진 이 모전석탑은 의성 지역이 신라에서 차지했던 지리적 중요성을 말해주는 유적이다. '불교 국가'라고 지나치지 않을 만큼 왕들이 불교를 숭상했던 나라에서, 서울인 경주에 이어 두 번째로 이곳에 대표급 모전석탑을 세웠다는 것은 그만큼 정치적 의미가 엿보이는 국가 사업인 까닭이다.

석탑 일대는 잔디밭과 야트막한 언덕이 인상적인 소공원이다. 잘 배치된 소나무와 알맞게 웅장한 석탑에 힘입은 덕분인지, 이곳은 조용한 날이면 울타리 너머 중학교에서 건너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도 '깔깔' 들려올 만큼 평온한 이미지가 넘쳐나는 곳이다. 특히 노을이 질 무렵을 골라 소공원 입구에 서면, 붉게 물들며 산을 넘어가는 황혼의 기운이 왼쪽 울타리 너머에 있는 교회의 주황빛 지붕에 반사되어 탑의 온몸을 비쳐주는 황홀경을 구경할 수 있다. 자연의 아름다운 빛이 기독교회의 지붕을 거쳐 다시 신라 고탑(古塔)에 닿아 빛나는 이 정경은, 이보다 더 평화로운 풍경이 또 있을까 싶어 저절로 마음이 따스해지도록 만든다. 그러면 답사자는 자신도 모르게 향나무 고목 아래로 들어가 그 모든 것들이 다 나오는 사진 한 장이 찍고 싶어진다. 답사여행의 참된 맛 가운데 한 가지가 멋진 사진 한 장을 남기는 데 있다는 진리를 되뇌이면서.

국보 77호 석탑의 '불교'와 붉은 지붕의 '기독교'가 한 지붕 아래 나란히 서 있다.
▲ 탑리5층석탑이 있는 풍경 국보 77호 석탑의 '불교'와 붉은 지붕의 '기독교'가 한 지붕 아래 나란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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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의성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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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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