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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체제의 질곡은 남북의 민족 구성원에게 족쇄를 채웠다. 그 구성원의 일부인 학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6·25전쟁 이후에 행방불명되거나 북쪽에 납치된 인사들에 대해 연구를 기피하고 외면했다.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일제시기 독립운동가이면서 국어학자였던 신영철 선생도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반세기도 넘은 이 시기에도 애국지사들을 방치하는 것은 선열에 대한 후대의 예의가 아니다.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에 가장 악질적인 조선민족말살 통치를 자행했다. 그들은 우리 민족을 자신들의 전쟁터에 내몰았고, 우리 민족의 말글과 역사를 없애고 일본의 말글과 역사를 강요했다. 그렇게 우리 민족을 없애 일본 천황에게 절대 충성하는 일본 국민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에 맞서 국내외 애국지사들은 우리의 말글과 역사를 유지하고 보급하여 한국민족을 유지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민족주의 학술단체인 조선어학회도 일제 탄압을 피할 수는 없었다.

 

조선어학회의 기관지인 <한글>에 가장 신랄하게 일제를 비판한 글을 여러 편을 보내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은 인사가 강원도 춘천 출신의 신영철이다.

 

총각 나이 23세, 형의 죽음...그리고 감화받은 신영철

 

신영철(申瑛澈, 1917. 8. 5. -? 호는 위정(爲正))은 강원도 춘천군 신북면 용산리 5통 1호에서 아버지 신구현(1889-)와 어머니 이승자 사이에 4남으로 태어났다. 춘천에서 공립보통학교를 마친 뒤, 1930년 4월 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35년 4월 10일에 춘천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춘천고보 재학시절 민족주의가 농후한 셋째 형 신유철의 감화를 받아 민족의식이 싹텄다. 신유철(1915-1937)이 1935년 연초에 보낸 연하장의 내용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다. 연하장 속에 '조선아 일어나라. 화살을 날리어라. 조선혼 잠긴 그 살, 돌인들 두려우랴. 시위를 당겨 쏴라. 동방을 향하여!'라는 글귀가 담겨 있었다. 조선민족이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일본 천황이 있는 곳을 향해 쏘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신유철은 그해 정월에 춘천경찰서에 끌려갔다. 두 달 동안 경찰서 유치장에서 잡혀 있다가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살쪘던 몸은 깡마른 채로 나왔다. 경찰서에서의 악독한 고문 때문에 귀에 물이 들어가 치료되지 않은 채, 귓병이 생겼다. 그 뒤 그는 만주로 갔다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철원으로 가 운전수가 됐다. 실직 후 조선어학회를 1936년 가을에 방문했다.

 

이후 그는 <조선어학회 방문기>를 기고하여 가난한 조선어학회의 처지를 알리고 조선어학회가 추진하고 있는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에 일반인이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에게 불행이 닥쳤다. 1937년 12월 일제의 고문 후유증 때문에 물이 고인 귀가 중이염이 되고, 다시 뇌막염이 돼 죽었다. 총각으로 그의 나이 23세였다.

 

신영철은 형 신유철의 영향과 춘천고보 재학 중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많은 서적을 탐독하여 강렬한 민족주의 사상을 품기에 이르렀다. 1932년에 나온 <한글>지의 구독을 통해 민족의식을 확립하였다. 춘천고보 재학시절인 1934년에 <「鮮語」를 「조선어」로>(<한글>16, 1934, 9.), <언어의 독립>(<한글>17, 1934, 10.) 등을 기고하여 일제가 조선어를 '선어'로, 조선의 글자를 '언문'으로 즐겨 부르는 것을 비꼬며, 일본어는 '본어'인가라고 비판하였다. 여기서 그는 일제가 우리글을 비하하여 사용하는 '언문'이라는 말을 자전에서 뽑아내버리고, '한글'로 일제히 고치자고 주장했다.

 

1933년 한글날에 발표된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의거하여 우리글의 철자법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글인 <축사>(<한글>19, 1934, 12)를 발표했다. 우리말사전 편찬에 관심을 촉구하는 글인 <우리의 문화를 빛내자-사전 편찬에 협조하라->(<한글>27, 1935, 10), <조선어사전 촉진론>(<한글>41, 1937, 1.)을 발표하였다. 문맹 타파를 역설하고자 <글장님을 없애자>(<한글>33, 1936, 4)는 글을 게재했다.

 

신영철은 1935 4월 춘천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 근처에서 면서기로 잠시 근무했다. 1936년 8월부터 그는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고보동창생들인 이홍채, 박우홍, 이종식과 회합을 갖기 시작했고, 이 무렵 조선어학회에서 일하겠다고 혈서까지 보냈다.

 

1936년 9월 서울로 상경한 그는 조선어학회 <한글> 주필인 이윤재 선생의 신당동 집에 기거하기 시작했고 1937년 6월까지 머물렀다. 이윤재도 자택에 그를 유숙시켜 조선어학회에 붙들어 두려고 하였다. 조선어학회의 간사장인 이극로 박사도 그를 신문사의 주필감이라 극찬하였다고 한다. 이윤재로부터 우리말과 글의 중요성을 체험적으로 익혔다. 조선어학회에 계속 머물 형편이 못되자, 1937년 6월에 고향 춘천으로 돌아갔다. 이후 사법서사인 아버지의 조수로 근무하면서 민족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1936년 8월부터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신영철은 이홍채, 박우홍, 이종식과 회합을 지속하였고, 이들 4인이 1938년 9월 24일에는 춘천군 신북면 우두산에서 회합하여 춘천중학교 생도 7명(독서회원)에게 조선의 독립을 역설하는 연설을 했다. 특히 신영철은 참석자들에게 조선의 독립 달성은 민족문화의 재건에 있는데, 그 방법은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이들 4인은 같은 해 10월 중순까지 활동했다. 박우홍이 단체의 이름과 회칙을 지어 활동하자고 했으나, 나머지 사람들이 반대해 채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활동을 파악한 춘천경찰서의 형사들은 신영철의 집을 수색하였다. 경찰은 집에서 신영철과 조선어학회에서 사무를 보던 이석린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도 발견하고는 이석린도 연루지어 체포했다. 이석린은 3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일제는 1938년 10월 19일에 신영철 등 4인을 춘천중학교 맹휴의 배후로 판단하여 '비밀결사 무명그룹사건'으로 규정, 이들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했다. 이들은 1939년 4월 19일 일제의 검찰에 송치되었고, 5월 1일 기소됐다.

 

1940년 1월 17일 신영철은 징역 1년 6개월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판결 소화 14년 刑公제659호-1940, 1, 17 이홍채·신영철 등 판결문,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 있음]). 그러다가 1940년 봄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고 그 뒤 3년간의 집행 유예(1940년 1월 18일에서 1943년 1월 17일까지)를 치렀다. 이후 춘천에서 칩거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뒤 춘천중학교 국어교사로 있다가, 1946년 4월부터 조선어학회의 <한글> 잡지 편집과 사전 편찬 업무를 담당했다. 같은 해 7월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입회했다. 1947년 조선어학회가 지은 <조선말큰사전>1권이 나오는데 기여했다.

 

1948년 3월부로 신영철은 조선어학회의 <한글> 편집과 사전 편찬 위원 활동을 마무리하고 중앙대학교의 국문학과 주임 교수로 부임하였다. 1949년 4월 조선어학회의 자매단체인 한글문화보급회의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명예위원장으로 안재홍, 설의식이 맡았다.

 

한글 전용정책 정착하도록 노력

 

해방에서 6·25전쟁 이전까지 그는 수많은 글을 신문과 잡지에 투고하여 한글 전용 정책이 정착되기를 주장했다. "인류에게 평화와 행복 발전과 향상을 줄 수 있는 위대한 사상이 한글로 적혀져야 할 것이다. 민족문화 수립의 의의 여기에 있고 한글 발전의 길이 여기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애국선열의 사상과 정신이 계승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1943년 일제의 고문으로 함흥형무소에서 옥사한 국어학자 환산 이윤재(1888-1943)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올바르게 평가하였다.

 

"조선이 영원한 암흑의 길로 굴러 들어갈제, 조선 인민이 나날이 쇠망의 구렁으로 기울어 갈제, 오직 조국을 근심하고 민생을 걱정하여 전전반측 오매불망하시던 선생! 동분서주 남선북마하시며, 민족 혁명의 기본공작으로 한글 통일운동을 역설 실천하시어 사생활을 희생시키신 선생! "오직 혈(血)과 성(誠)이 있을 뿐이다!" 하신 선생은 정말 혈성을 조국 광복의 터에 뿌리시고 가셨다. (중략) 오늘날에 "애국지사" 많거니와 조국 오천년사 중 국어를 위하여 순도(殉道)한 이 환산 선생으로 첫손을 꼽나니, 기릴진져 평생을 임리한 신고(辛苦) 속 일편 사심 없는 순결숭고한 지조로 위로 오천년의 국혼(國魂)을 체현하고 아래로 만겁의 정로(正路)를 개척하신 무관의 제왕! 무의의 진인!"(「영릉봉심기」, <한글>98, 1946, 11, 35쪽.)

 

저서로 <고시조신석>(연학사, 1946.), <고문신석>(동방문화사, 1947), <신문장강화>(동방문화사, 1950.) 등을 남겼다.

 

6·25전쟁기간 중앙대학교 국문학과 주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가 인민군에 납치되었다(여동생 신제철의 증언). 자료에는 그가 6·25전쟁 전에 경찰 전문학교에서 국어 강의를 담당하였기에 화근이 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최호연, <조선어학회, 청진동 시절>(상), 진명문화사, 1992, 48면) .

 

신영철의 동생인 신기철(1922-2003. 독립유공자로 선정)이 생전에 북측의 인사에게 형의 안부를 묻자 "북에 오지 않았다"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조재수 겨레말큰사전편찬위원장의 2011.07.21.오후 3시30분에서 5시 30분 사이에 말한 증언). 아울러 인터넷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 납북자 명단에 한글문화보급회 위원장이고 대학교수인 신영철이 1950년 8월 16일에 북측에 의해 납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컨대 신영철은 6·25전쟁기간 중에 명백히 납북되었고, 그 기간에 사망하였다고 판단된다. 일제시기에는 독립운동 전선에 참여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해방 뒤에 다시 독립국가의 토대를 세우고자 국어운동에 앞장섰던 그. 올바른 국어 교육을 확립하고자 했던 신영철에 대해 이제라도 우리는 정당한 예우를 해 줘야 한다.


태그:#신영철, #국어학자, #조선어학회, #독립유공자, #이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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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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