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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상경을 결심하는 데 세 가지 걱정이 있었다. 첫째는 길눈 어두운 내가 혼자서 그 복잡하다는 지하철을 헤집고 서울 하고도 변두리(?)라는 상암동을 찾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밖에만 나가면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고 두통이 몰려오는 등 장시간 외출에 따르는 불편한 신체적 장애를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상식이 치러지면 으레 사진도 찍고 그럴 텐데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진을 찍을 일이 여간 걱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시상식에서 나 혼자만 유별나게 사진을 안 찍겠다고 버티면 주최 측과 다른 수상자들에게 예의가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아무런 거부감 없이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하는 일은 두려웠다.

한 달여의 장고 끝에 결국 2월 17일 <오마이뉴스> 창간기념 행사에 참석하기로 마음은 굳혔으면서도 출발에 앞서 다시 예의 그 불안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서울에 사는 후배는 고속버스와 열차의 두 가지 경우에 대비한 서울 지하철 노선도와 나가야 할 출구 번호까지 메일로 자세하게 보내오는가 하면, 아예 자신이 역에 마중 나왔다가 나를 <오마이뉴스> 본사에 데려다주겠다고까지 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거절하기로 했다. 바쁜 사람 오라 가라 하는 것도 미안한 일이고 무엇보다 이번에야말로 장시간 여행에 따르는 갖가지 공황장애를 스스로 극복해보고 싶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밖에만 나가면 아랫배가... 한 달 고민 끝에 결정한 서울행

광주에는 아침부터 싸락눈이 내리고 바람이 심하게 부는 등 무척 추운 날씨였다. 서울에도 한파주의보가 내려져 있다고 했다. KTX 열차 안은 평일 오전인데도 자리가 거의 다 찬 상태였다. 내 옆자리는 다행히 비어 있었다. 지정된 좌석에 착석하고 편한 마음으로 출발했다.

조금 지나 기차가 장성역에 도착하고 휴가를 나온 군인들이 열차 안으로 들어와 빈 좌석들을 채워나갔다. 그때 내 옆으로 다가온 군인 한 명이 멈춰서더니 뭔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무척 미안한 얼굴로 자신의 열차표와 내 좌석 표지번호를 번갈아 확인하더니 쑥스러운 듯 겨우 입을 열었다.

"저기, 이 좌석이…."
"네? 여긴 8호차, A4석인데 왜 그러세요?"

나는 부끄럼 많은 군인 눈앞에 내 열차표를 살짝 흔들어 보이며 확인을 시켜주었다.

"네. 그게요, 아주머니 표는 8호차 A4이고 이 좌석은 7호차 A4석이잖아요. 그러니까 제 좌석이 맞는데…."

어쩐지 출발이 순조롭다 했더니 나는 8호차가 아닌 7호차 남의 좌석에 발을 뻗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에 재빨리 짐을 챙겨 일어서는데, 예의 바른 그 군인은 나를 붙잡더니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내가 가려던 방향 말고 반대로 가야 8호차가 나온다고 알려주었다.

남의 좌석을 내 좌석으로 점유한 사소한(?) 실수를 제외하면 비교적 순조롭게 종착역인  용산역에 내렸다. 이제 그 복잡한 서울지하철 노선도가 나를 시험에 빠지게 할 것이고 나는 그 일차 관문인 지하철을 타고 합정역에 가야 했다. 합정역에서 9번 출구로 나가면 택시가 머잖아 나를 <오마이뉴스> 사무실이 세들어 있다는 '누리꿈스퀘어'에 데려다줄 것이라고 후배가 보내온 문자는 설명하고 있었다.

용산역 역사 안의 행인 중 가장 선량한 인상의 중년 남자를 붙잡고 길을 물었다. 그 남자는 역사 밖으로 나가 신용산역으로 한 정거장을 간 다음 환승을 하라고 일러주었다. 후배가 일러준 대로 하면 너무 복잡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여차하면 그냥 <오마이뉴스>까지 택시를 타버릴 각오를 했는데 지하철로 무사히 합정역에 도착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한껏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이제 나의 최종 목적지인 <오마이뉴스>와는 지상의 짧은 코스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그제야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속이 쓰려왔다. 출구 밖의 광장 어디를 둘러보아도  식당 간판이 눈에 띄지 않았다. 타지에 가면 전국 체인망을 갖춘 음식점을 이용하는 것이 그나마 보편적인 입맛을 충족시킬 수 있다던 말이 떠올라 광주에서도 체인점이 있는 익숙한 이름의 분식집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빌딩 이름이 그게 뭐야? 난 '놀이꾼 스키'인 줄 알았지"

지난 2월17일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 열린 뉴스게릴라 시상식
 지난 2월17일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 열린 뉴스게릴라 시상식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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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도 남아도는데 서울 구경이나 하고 시간에 맞춰 들어가야지.'

애초 생각은 그랬는데 막상 거리의 세찬 바람에 얼굴을 부비고 보니 당장 따뜻한 실내로 들어가고 싶다는 유혹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서울 구경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그냥 <오마이뉴스>로 가기로 했다.

"기사님, 상암동 누리꿈스퀘어 아시죠? 그리로 가주세요."

나는 광주에서부터 수없이 되뇌었던 행선지를 익숙하게 주문했다.

"이상하네요. 엊그제도 내가 거기 가는 손님을 한 명 태웠는데 말이야, 난 서울에서만 택시 영업 40년 만에 서울에 그런 빌딩 있는 거 그때 처음 알았어요. 긴가민가하면서 손님이 가자는 대로 갔더니 정말로 처음 보는 빌딩이 하나 있더라고요.

근데 이름이 왜 그래? '누리, 꿈, 스퀘어'가 뭐야. 영어도 아니고 한글도 아니고. 난 막 처음 들었을 땐 '놀이꾼 스키' 뭐라는 줄 알았지. 뭔 빌딩 이름을 그렇게 어렵게 지었을까 몰라. 부르기 좋게 지어야지. 앞으로 거기 가시려거든 기사들한테 그냥 상암중학교 맞은편 가자 그러세요. 그럼 기사들은 바로 알아들어. 근데 손님은 거기 자주 가시오? 무슨 일로 가는데요?"

몸이 많이 마르고 70은 넘어 보이는 개인택시 기사님은 계속 빌딩 이름을 갖고 나에게 푸념을 하다가 나중에는 룸미러로 흘끗 내 초라한 행색을 일별하며 살짝 호기심을 내비췄다.

서울 지리에 익숙지 못한 낌새를 조금이라도 들키면 일부 기사들은 일부러 뱅뱅 돌아 바가지요금을 씌우는 경우가 있으니 절대로 촌티 내지 말라던 후배의 당부가 떠올라 나는 무의식적으로 불룩한 배낭을 감추며 지방이 아닌, 갓 파리에서나 날아온 듯한 모습을 연출하느라고 은근히 긴장이 되었다. 사투리를 감추기 위해선 말을 아껴야 했다.

"저도 거기는 처음 가는 길이에요. 글쎄요,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좀, 친한 사람들이 거기 있거든요."
"아하, 친하긴 한데 서로 잘 알지는 못한다. 또, 처음 가보는 길이다? 그럼 앞으로도 거기 '놀이꾼 스키'인가 하는 빌딩에 자주 갈 일 있소? 아무래도 난 그 '누리, 꿈'인가 하는 이름이 영 마땅찮아요."
"기사님. '누리'라는 말이 원래는 좋은 뜻을 지닌 우리말이에요. 그러니까 한나라당도 엄청 고민하고 나서 바꾼 이름이 '새누리당'이잖아요."

'새누리당'이라는 한마디에 기사 아저씨는 갑자기 잠잠해졌다. 운전 경력 40년차라는 노회한 기사 아저씨는 '새누리당' 당명에 어떠한 동요의 표정도 들키지 않음으로써 승객과의 불필요한 정치적 불화를 애초에 차단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무표정한 아저씨의 표정 어디에도 그가 좌·우파적 성향 중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짐작케 하는 어떠한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서로가 침묵하는 가운데 한참을 더 가던 아저씨는 이윽고 대로변에 나를 내려주더니 오른쪽의 큰 빌딩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면서 저기가 바로 '놀이꾼 스키'인가 뭔가 하는 곳이니 알아서 잘 찾아가보라고 했다. <오마이뉴스> 본사가 입주해 있는 누리꿈스퀘어는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크고 웅장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친근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건물치고는 너무 세련되고 으리으리해서 나는 순간 주눅이 들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친근한 사람들'과 반가운 만남

지난 17일 오마이뉴스 강당에서 2011년 뉴스게릴라 시상식이 열렸습니다.
 지난 17일 오마이뉴스 강당에서 2011년 뉴스게릴라 시상식이 열렸습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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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보다 일찍 도착했다. 18층 <오마이뉴스> 사무실은 고층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했다. 상기된 표정으로 기웃거리는 나를 편집부 기자들이 먼저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동안 전화 통화를 했거나 광주전라 지역투어에서 만난 기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친한 사람들'의 환대로 나는 금방 긴장이 풀리고 편한 마음이 되었다.

사무실 한쪽에 배낭을 놔두고 지하 쇼핑몰로 내려가보았다. 쇼핑몰에는 다행히 내게 꼭 필요한 약국이 입점해 있었다. 집 떠나오면 괜히 이유 없이 배가 살살 아파오고 소화도 잘 안되고 바뀐 잠자리로 인해 아침까지 뒤척이고 잠 못 드는 등의 제반 증상을 달래기 위해 상비약을 구비해야 했다. 내려간 김에 쇼핑몰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나서 18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사무실에 가보니 어느새 다른 시민기자분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서로 안면이 있는 시민기자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그동안 밀린 대화들을 나누는데 나는 한쪽에 앉아서 그분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고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자님. 저번 기사에 걸린 소송 건은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좀 복잡하겠던데요?"
"네, 뭐, 아직도 그 상태로 계류 중에 있죠. 그러는 기자님은 내용증명 수령하셨습니까?"
"예, 각오했던 거니까요, 뭐. 우리가 이런 일 어디 한두 번 겪습니까? 쓰는 기사마다 말도 안 되는 트집 잡아 억지 쓰는 사람들인데.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그렇지만 그 고충이 오죽하겠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지만요. 그렇지만 맞아요. 그런 것 일일이 신경 쓰다 보면 절대 기사 못 쓰죠."

법조인들의 모임도 아니련만, 시민기자들 대화 내용이라는 것이 언뜻 들어선 살벌한 법률용어가 대부분이었다. 내가 읽고 나서 순간 통쾌함을 느끼고 비분강개하고 또는 눈물 흘렸던 한 편의 기사들이 저렇듯 개인적인 불이익과 위험을 감수하면서 쓴 고통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본격적인 시민기자 활동에 전념하겠다는 의지로 명함까지 신청해 놓고선, 그 명함을 딸한테 한 장 뿌리고 나선 책상 어딘가에 쑤셔 박아 놓은 채 여태까지 구미에 맞는 소재가 없다는 이유로 단 한편의 기사도 올리지 않고 있는 나의 게으른 집필태도가 떠올랐다.

그들이 소송과 벌금을 감수하면서 기사를 쓰는 동안 나는 즐겨찾기에 걸어놓은 이상한 할리우드 배우들 파파라치 컷 모음 사이트에 들어가서 제시카 알바와 미란다 커, 패리스 힐튼의 사생활이나 엿보고 있었다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었다. 이런 나에게 상이라니(나는 이번에 '2월22일상'을 받았다). 너무 과분하고 민망할 일이었다. 명함은 뭐한다고 신청을 했던가 부끄러운 심정이었다.

지면으로만 뵈었던 쟁쟁한 기자분들과 오늘 행사를 축하해주기 위해 오신 내빈들의 입장으로 식장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었다.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역임하셨고 현재는 시민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열심히 기사를 올리시는 정운현 기자님. 빗어올린 흰머리가 인상적인 도시농업의 선구자 오창균 기자님. 공무원 신분으로 기사를 쓰면서 고향을 홍보하는 데 열심인 강원도 화천의 신광태 기자님. 그리고 한 지역신문에서 불과 근무기간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해직되었다는 아무개 청년 기자님.

그리고 완전 '훈남' 최병성 기자님. 최병성 기자님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소탈하고 다정한 분이었다. 그분의 날카롭고 예리한 기사 때문이었을까. 나는 최병성 기자님에 대해 왠지 차갑고 어려운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과 큰 소리로 인사를 나누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먼저 명함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모습에서 그 기자님을 향해 품었던 막연한 선입견이 얼마나 그릇된 것이었던가를 깨달았다.

사인 받고 싶던 최병성 기자님... 이렇게 뵙다니

드디어 창간 12주년 기념행사가 시작되었다. 오늘의 <오마이뉴스>를 탄생시킨 오연호 대표의 인사말에 이어 이 자리를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축사들이 간략하게 이어졌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오마이뉴스>만의 독특한 시민저널리즘을 확실하게 뿌리 내리기까지의 그동안 기울인 고통과 노력의 시간들을 함께 다독이며 미래를 축복하는 훈훈한 시간이었다.

행사의 꽃, 시상식은 그 어느 해보다 풍성했다. '올해의 뉴스게릴라상', '특별상', '올해의 기사상', '시민기자 명예의 전당', '2월22일상' 등 다양한 상이 한 해 동안 활약한 시민기자들에게 주어졌다.

각 수상자들에게 차례로 부상이 전달되고 각자 수상소감을 한마디씩 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 많은 수상자들이 모두 한마디씩 하게 되리라고는 예상 못했던 일이었다. 상을 받는 일도 나는 불편하고 부끄러운데 수상 소감을 준비할 마음의 여유는 더욱 없었다.

앞선 수상자들은 차분하게 자신들의 수상소감을 말했다. 진솔한 그들의 수상소감에 나도 조금 용기를 얻었다. 몇 번째 앞에서 수상소감을 말하던 대학생 시민기자는 기사를 쓰던 순간의 외로움과 고통이 밀려오는지 나중엔 급기야 울먹이기까지 했는데, 그의 얘기를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콘택트렌즈를 착용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주먹으로 마구 눈물을 훔쳤다. 그러다 단순하게 눈물 때문만은 아닌 답답한 시야를 느끼고 나서야 나는 오른쪽 눈에 착용한 렌즈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급한 김에 옆에 서 있는 최병성 기자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부터 최병성 기자님은 내 렌즈를 찾아주겠다고 엎드려서 바닥을 살피기 시작했다.

난 렌즈는 어차피 일회용이라 잃어버려도 괜찮은데 혹시 렌즈가 아직 내 눈동자 한쪽에 걸쳐져 있거나 얼굴 어디에 들러붙어 있는가를 살펴달라며 기자님 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눈동자를 껌벅였다. 정말 민망했다. 기자님은 내 눈을 자세히 살피더니 얼굴 어디에도 렌즈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적당한 기회를 봐서 사인이라도 한 장 받고 말을 걸어보리라 벼르고 있었던 최병성 기자님이었는데, 잃어버린 렌즈나 찾아달라고 벌겋게 충혈된 눈을 들이밀었으니 나로선 무척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4대강 현장의 눈가림식 교묘한 봉합도, 부실한 공사의 미세한 균열도 예리한 관찰과 끈기로 기어이 찾아내고야 마시는 천하의 최병성 기자님도 끝내 내 렌즈의 행방은 찾아내지 못한 채 내 순서가 되었다. 나는 시야가 흐릿한 불편한 눈으로 마이크를 잡아야 했다.

나는 편한 마음으로 수상 소감을 밝혔다. 그날 행사장에 와서 보고 느꼈던 바를 그냥 솔직하게 말하고 나니 긴장이 풀렸다. 여전히 사물이 두 개로 보이는 불편한 눈 때문에 이내 마이크를 다음 기자님에게 넘기고 나는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로 어떤 여자 직원분이 따라오더니 내가 렌즈를 찾는 일을 도와주었다. 당황하지 말고 손으로 살살 눈동자 위쪽을 밀어내리고 눈을 계속 깜박이라고 하더니 어렵잖게 남의 눈에 렌즈를 꺼내주었다. 실종된 렌즈는 다름 아닌 눈동자 뒤쪽으로 넘어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행사장에 와보니 식순이 끝나고 어떤 기자님이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직감적으로 강정민 기자라는 걸 알았다. 2월22일상 수상자 인터뷰 기사를 쓰면서 전화와 메일로만 대화를 나눴던 강정민 기자가 행사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무척 기뻤다.

아직 만난 적이 없는 우리는 여럿 가운데서 둘만 알 수 있는 '플래시몹' 같은 것을 정해서 서로를 식별해내자는 재밌는 계획도 세웠는데, 내가 렌즈를 빠뜨리는 소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 계획을 실행해보지도 못한 채 얼떨결에 대면하고 말았다.

"명성 자자한 기자들은 다 소송 한 건씩 걸려 있던데..."

<오마이뉴스> 김혜원 시민기자님은 미국의 <타임>에서 소개가 됐을 정도로 유명한 분입니다.
 <오마이뉴스> 김혜원 시민기자님은 미국의 <타임>에서 소개가 됐을 정도로 유명한 분입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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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일정을 마무리하고 행사는 강화도 오마이스쿨로 옮겨 계속되었다. 밤에는 미국 체류 중 특별히 이번 행사를 위해 먼 길을 날아왔다는 강인규 시민기자의 시민저널리즘에 대한 강의와 청춘기자상을 받은 강유진 기자의 강의가 있었다.

피곤하고 지친 밤이었지만 두 강사들의 열강과 그것을 경청하는 참석자들의 눈은 빛났다.이 시간이면 나는 집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악성 바이러스를 몰고 다닌다는, 그래서 내 컴퓨터가 그렇게 잦은 고장을 일으키곤 한다는 사이트에 접속해서 할리우드 배우들의 파파라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을 시각이었다.

뒤풀이 시간에는 새로 사귄 아줌마 기자 셋이 죽이 맞아서 수다를 떠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오른쪽 강정민 기자는 아들만 셋, 왼쪽의 한진숙 기자는 딸만 셋이라고 했다. 달랑 딸 하나 낳은 나는 가운데 죄인처럼 앉아서 아이 셋을 키운다는 그녀들의 양육 노하우를 경외심을 갖고 경청했다.

서평을 주로 쓰는 강정민 기자는 사내아이만 셋을 기르는 엄마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순하고 온화한 모습이었다. 딸 하나 키우는데도 만날 아웅다웅하는 나로선 그런 강정민 기자의 단아한 모습은 불가사의였다.

성미산공동체 기사를 썼던 분은 바로 내 왼쪽의 한진숙 기자였다. '서울 하늘 아래 그런 훈훈한 공동주택이 존재한다는 것이 사실일까' 하는 부러움과 의문을 갖게 했던 성미산공동체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적이고 명철한 한진숙 기자가 소개했던 얘기였다.

한진숙 기자는 전형적인 지적이고 똑부러지는 성격의 여성인데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하지만 만만찮은 내공이 느껴졌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일면식도 없던 아줌마들이었는데 같은 매체에 기사를 쓰는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는 공통점 하나로 금방 친해졌다.

우리 옆으로 한 자리 건너에는 김혜원 기자님이 앉아 있었는데 그녀야말로, 우리 아줌마 기자 세 명 공동의 우상이었다.

"김혜원 기자님 진짜 베테랑기자 포스가 작렬한다, 그죠?"
"저 선배님 타임지에도 실렸었잖아요. 우리도 열심히 하다보면 저 선배님처럼 될 날이 오겠죠?"
"근데.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건은 아직 깔끔하게 마무리가 안 됐대요. 명성이 자자한 기자님들은 거의 다 소송이 한 건씩은 걸려있던데. 그런 거 생각하면 아무나 존경받는 시민기자가 되는 건 아닌가 봐요. 솔직히 두려워. 그니까 우린 어디에 휘말리지 않게 미담기사 위주로 쓰는 거예요. 미담기사에는 누가 뭐라 시비 걸지도 않고 편하거든."

이런 소심한 모의를 하면서 멋쩍게 웃기도 했다.

고단했던 1박 2일... 고마운 마음도 못다 전했네

강화도 오마이스쿨에서 열린 단합대회, 멋진 골키퍼의 포즈와는 달리 골인이었습니다. '기왕 골 먹을거 편안히 서서 먹지' 라고 말했더니 끝까지 해 보겠다는 <오마이뉴스> 저력이랍니다.
▲ 날자! 강화도 오마이스쿨에서 열린 단합대회, 멋진 골키퍼의 포즈와는 달리 골인이었습니다. '기왕 골 먹을거 편안히 서서 먹지' 라고 말했더니 끝까지 해 보겠다는 <오마이뉴스> 저력이랍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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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오전 강연자는 김용국 시민기자였다. 그 어느 시간보다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간단한 법률상식을 새롭게 배우는 재미가 쏠쏠했다. 특히 <오마이뉴스>라는 매체에 글을 쓰는 시민기자들 입장에서는 언제라도 부당한 법 적용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개연성이 다분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법에 관한 질문이 시민기자들 사이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행사 마무리 단계로 친선 축구경기를 했다. 즉석에서 꾸려진 팀이었지만 양 팀의 승부를 향한 욕구는 친선 단계를 넘어 살벌하기까지 했다. 남자들은 어시스트만 가능하고 골대 안에 공을 넣을 수 있는 권한은 여자들에게만 주어진다는 희한한 경기규칙 때문에 양 골문 앞에는 여자들이 포진해 있고 운동장 가운데서는 남자들이 열심히 누비며 공을 몰았다.

상대팀 골키퍼인 김병기 <오마이뉴스> 뉴스게릴라본부장을 에워싸고 우리 팀 여자들이 빙 둘러섰다. 그가 '겨우 앉을 수는 있으되 구부릴 순 없는' 부실한 허리를 지녔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포착한 우리는 자신만만했다. 아닌 게 아니라 김 본부장은 서 있기도 힘든지 수시로 허리를 두드리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게다가 승부에는 일말의 욕심도 없다는 듯이 흐물흐물 웃기만 하는 그의 허술한 방어 태도는 우리 팀 여성들의 태만을 부추겼다. 그래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느긋한 모습으로 공이 골문 앞에 굴러 올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허를 찔리고 말았다. 허약한 신체조건에도 불구하고 골키퍼의 활약은 만만치 않았다.

온몸을 던진 투혼 덕분에 번번이 골문 앞에서 공은 잡히고 말았다. 골 결정력은 자꾸 떨어지고 우리가 방심했던 까닭에 오히려 전반에 간격차를 벌여 놓았던 세 점의 점수마저 역전 당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다행히 '우리 팀 호나우두'란 애칭이 어색하지 않게 소중한(이름이 '소중한'이다) 인턴기자의 활약은 위기의 순간에 더욱 빛을 발했다. 소중한 기자의 환상적인 플레이로 우리는 겨우 역전의 수모만은 면할 수 있었다.

상대팀 선수이자 심판을 겸하고 있는 박 상규 기자의 편파적인 판정으로 경기는 상대팀에게 점점 유리한 방향으로 흘렀고 이대로 가다간 우리 팀의 패배가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밥때를 넘기면서까지 경기를 계속하길 바라는 박상규 심판을 채근하여 겨우겨우 경기 종료 휘슬을 불게 했다. 오랜만에 운동장에 나와 몸을 움직이는 경기가 이렇게 재미있을 줄은 몰랐다.

총선 특별취재팀의 일원으로, 나도 각오를 단단히!

강화도에서의 마지막 식사로 점심을 먹고 나자 1박 2일의 일정은 끝이 났다. 서울로 오는 버스에서 차례로 사람들과 헤어졌다. 이윽고 호남선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여수에서 오신 황주찬 기자와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나는 광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동안 애쓴 상근기자님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하고 온 것이 못내 미안했다.

버스 승객들은 모두 고단한지 의자를 젖히고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앞좌석의 젊은 커플들만이 깨어 있으면서 3분에 한 번 꼴로 진한 입맞춤을 나눴다. 남자는 그때마다 여자 쪽으로 기울였던 얼굴을 돌려 뒷좌석 동정을 살피곤 했는데 나랑 눈이 마주치면 어색해하면서도 그들의 애정확인 작업을 멈출 의향은 없어 보였다.

그들의 입맞춤은 광주에 도착하도록 계속되었다. 남자가 얼굴을 옮겨와 입술을 댈 때마다 여자는 쥐포를 먹던 입을 잠시 멈추고 기꺼이 응해주었다.

내 옆 자리의, 조카 결혼식에 왔다 가는 길이라는 60대 어르신은 앞좌석 커플들의 진한 애정행각에 신경이 거슬리는지 흠흠, 헛기침을 하다가 그마저도 안 먹히자 일부러 큰 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고는 했다. 더러는 목소리를 낮추고 가만가만 작은 소리로 통화를 하기도 했는데, 이번에 아는 사람 누가 총선에 출마를 하는 관계로 동문들 간에 사전 모임을 준비하느라고 바삐 움직여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오마이뉴스> 총선 특별취재팀에 지원했다. 다음 주에 발대식을 갖는다고 한다.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구미에 맞는 기사만 쓰면 진정한 시민기자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승낙을 했다. 누구는 목숨 걸고 기사를 쓰는데 언제까지 내 구미에 맞는 기사만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각오를 더욱 단단히 해야겠다.


태그:#2월22일, #오마이뉴스, #기사,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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