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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 40분, 아내가 딸아이를 깨우는 소리가 들린다.
"딸! 어서 일어나. 학교 가야지."

엄마의 소리에도 딸아이는 한동안 꼼짝을 하지 않는다. 엄마의 재촉을 여러 번 들은 후에야 '으응~'하며 눈을 비빈다. 학교에 가는 날이면 매일 매일 이런 장면이 연출된다.

딸아이는 아침잠이 많다. 휴일이면 11시까지는 기본으로 잔다. 아무리 깨워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밥이 먼저가 아니라 잠이 먼저다. 그런 딸아이를 보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어떻게 학교에 갈까 걱정까지 했지만 그런대로 적응을 하며 다니는 모습이 신통하기까지 하다.

딸아이는 30분 안에 모든 것을 해치운다. 통학버스가 7시 10분에 오기 때문이다. 일어나서 머리 감고 말리고 교복입고 가방 챙겨서 현관문을 나서기까지 정신이 없다. 좀 더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면 좋을 듯싶지만 아내는 조금이라도 더 자라고 정확히 40분이 돼야 딸아이를 깨운다. 미적거리다 보면 45분, 그 짧은 시간에 아침 몇  술 뜨고 가려니 엄마의 손이 이만저만 바쁜 게 아니다. 간혹 밥을 떠먹여 주기까지 한다.

어쩌면 이런 아침 풍경은 우리나라 고등학생의 일반적인 풍경이 아닐까 싶다. 허겁지겁 일어나 준비하고 통학버스인 사설 봉고버스에 올라타면 매일 보는 얼굴들이 힘없이 앉아 있다. 그렇게 학교에 가서 밤늦게까지 남아 공부하다 돌아오면 어깨가 축 쳐질 수밖에.

그러나 어른들은 이런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학생이면 이런 것쯤은 참고 견뎌야 한다고 한다. 그것도 못 참으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 거냐고 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이런 아이들의 생각을 모아서 한 권의 시집으로 엮은 책이 있다. 경남여고 구자행 교사가 아이들의 쓴 시를 모아 엮은 <기절했다 깬 것 같다>(나라말)이다. 아이들의 글을 한 땀 한 땀 읽다 보면 늘 웃고 이야기하는 아이들 내면에 수많은 고민과 아픔이 배어있음을 볼 수 있다.

<기절했다 깬 것 같다> / 구자행 엮음
 <기절했다 깬 것 같다> / 구자행 엮음
ⓒ 나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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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안 놓치려고 열심히 뛰면
내 눈앞에서 출발한다.
기다렸다 타려고 일찍 나오면
버스가 안 온다.
운 좋게 타이밍이 딱 맞아 버스에 타면
차가 막힌다.
돌겠네 정말!
                                              -<버스>(이민주)-

이른 아침 학교로 가는 봉고
그 속에는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 앉아 있다.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아무 표정이 없는 채로
나를 쳐다본다.

그 분위기에
나도 그냥 창문을 머리에 박고
그 아이들과 똑같은 모습을 한다.

하지만 해가 지고 이 자리에 앉을 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잘거리겠지.

해가 져야 살아나는 아이들.
                                              - <봉고>(조연경)-

하루는 허겁지겁 뛰어나간 딸아이가 전화를 했다.
"아빠 버스가 갔어. 어떡해?"
아이를 태우고 갈 버스가 정확히 10분에 떠나버린 탓에 아이는 어쩔 줄 모른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서 5분, 언제 올지도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다간 학교에 늦는다. 그런 아이에게 집으로 오라고 했다. 태워다 주기 위해서.

요즘 아이들은 등하굣길에 통학버스를 이용한다. 노란 봉고버스다. 버스 안엔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앉아 있다. 늘 보는 얼굴들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별 말이 없다. 하지만 하교 때는 버스 안의 풍경이 전혀 달라진다. 해가 지고 학교가 파하면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들은 그제야 해방감에 재잘거린다. 살아난다. 참 아픈 모습이지만 이런 현실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만 그치는 게 아니다.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학원으로 가는 아이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수진이라는 아이는 처절한 하루라고 표현하고 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 야자를 한다./ 야자가 끝나면 / 봉고를 타고 학원에 간다./
그렇게 하루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 공부에 찌달리며 산다./

끝나고 집에 와 씻고 / 조금이나마 텔레비전을 보며 여유를 즐기고 / 잠을 잔다.

그리고 또다시 반복할 것이다. / 처절한 내 하루 - <처절한 하루> (황수진)

시를 읽다보면 정말 아이들이 이렇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나 글들은 아무런 꾸밈없이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아이들은 쉬고 싶고 뛰어놀고 싶은데 연못 속의 물고기처럼 갇혀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저녁 시간이 끝나 갈 즈음
작은 연못가로 나가
연못 안 작은 물고기를 본다.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넌 절대 연못을 벗어나지 못해.
나처럼 말이야 - <물고기>(이현영)

연못 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교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는 아이들이지만 마음은 순순하고 예쁘다. 답답한 환경 속에서도 따뜻한 마음들을 가진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른들은 세상에 무관심하지만, 아이들은 소외되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 줄 안다. 아이들은 그렇게 한다. 다만 우리 어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할 뿐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 한 분, 두 분 / 내게 다가오신다./
"학생, 우대권 뽑는 거 좀 도와줘"
그런 할머니, 할아버지를 돕고 있는데 / 내 눈에 한 아저씨가 보인다./
"화장실 좀 ……." / 하면서 도움을 청하신다.
시각장애인이다. / 주위에 있는 ㅏ람들은 / 무관심하게 보고 있을 뿐 /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 화장실이 가까이 있는데도 / 아저씨는 길을 못 찾는다./
그분에게 다가갔다. / "아저씨, 제 팔 잡고 따라오세요." /
그러고는 화장실 입구까지 모셔다 드렸다. / 고맙다고 몇 번이고 /
허리 굽혀 인사하는 아저씨 / 도리어 미안해진다. - <무관심> (박현아)

야자를 끝낸 딸아이는 오후 10시 30분이면 집에 도착한다. 지금은 그런대로 야자에 적응하면서 지내지만 야자 첫날 아이는 울었다. 왜 우느냐는 말에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했다. 그냥 눈물을 떨구는 아이. 그저 짠하게 바라만 보았었다.

이제 고1이 된 아이는 3월 한 달간 야자를 하지 않았다. 그냥 쉬게 했다. 그런 날 보고 사람들은 뭘 믿고 그러냐고 했다. 믿을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냥 3년 동안 연못 속의 물고기처럼 지낼 아이 편하게 해주고 싶은 최소한의 마음이었다. 지금도 1주일에 한 번은 일찍 집에 온다. 와서 그냥 논다. 부모로서 그런 딸아이를 보면 속으로 애가 타지만 당분간은 그냥 놔둘 참이다.

이 시집은 두 가지 주제로 나눠져 있다. 하나는 불평이고, 다른 하나는 따뜻한 시선과 마음이다. 이는 아이들에게 시를 쓰게 한 구 교사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불평'과 '불쌍한 이웃'이란 글감을 주고 썼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눈으로 마음으로 보고 느낀 글들을 읽노라면 부끄러워지는 마음이 절로 든다. 미안함도 일어난다. 불평 속에서도 따스함을 간직하며 하루하루 생활하는 아이들을 보면 우리 어른들은 많은 반성을 해야 할 것 같다. 기절했다 깬 것처럼.

덧붙이는 글 | 경남여고 아이들이 쓴 시모음 <기절했다 깬 것 같다> / 구자행 엮음 / 값 8000원



기절했다 깬 것 같다 - 경남여고 1학년 학생들이 쓴 시

경남여고 1학년 학생들 지음, 구자행 엮음, 휴머니스트(2012)


태그:#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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