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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휴업신청을 낸 서울시 영등포구의 한 주유소. 주유기와 주유 관련 시설들을 철거했다.
 8월 휴업신청을 낸 서울시 영등포구의 한 주유소. 주유기와 주유 관련 시설들을 철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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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주유소는 정부 '빽', 정유사 직영주유소는 정유사 '빽', 평범한 자영업자들 하는 주유소만 '빽' 없이 죽어나는 거지 뭐."

서울 도봉구에서 주유소를 경영하는 이한승(가명)씨는 최근 더욱 치열해진 주유소 간 가격 경쟁을 이같이 표현했다. 그는 자신의 가게 평균 마진율은 매출의 3%도 안 된다고 고백했다.

전국적으로 문을 닫는 주유소 숫자가 점점 늘고 있다. 16일 한국주유소협회에 따르면 지난 8월 한 달 동안 휴업 신청을 한 주유소는 전국적으로 436개에 달했다. 지난해에 비해 11.7% 증가한 수치다. 업계 종사자들은 정부가 유발시킨 과도한 경쟁을 연쇄 휴업의 이유로 꼽았다.

"영세 주유소들은 알뜰주유소와 가격 경쟁 못 따라가"
정부는 지난해 12월 경기 용인시에 1호 알뜰주유소를 출범시켰다. 석유공사를 통해 싼 가격에 기름을 풀어 시중 주유소들보다 100원 정도 싼 가격의 기름을 소비자들에게 공급하면서 경쟁 효과를 통해 주변 주유소 기름값도 낮추겠다는 취지였다.

당장 고공행진을 이어가던 기름값을 잡을 뾰족한 방법이 없었던 탓에 정책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4월부터는 390억 원 정도의 세금을 들여 알뜰주유소 사업자에 대해 소득세, 법인세, 지방세를 2년 간 감면해주는 등 인센티브도 대폭 확대했고, 시설개선자금과 외상거래자금도 지원했다.

그 결과 알뜰주유소는 전국적으로 700개 넘게 늘어났다. 결과적으로는 소비자가 부담하는 기름값도 내렸다. 담당부처인 지식경제부는 지난 7월 이같은 분석 결과를 밝혔다. 올해 2월 5일부터 7월 3일 사이 휘발유 평균 판매가격으로 봤을 때 알뜰주유소 평균 가격이 전국 평균보다 42.97원 쌌다는 것이다.

이같은 정책 효과에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은 것은 알뜰주유소 인근 자영주유소들이었다. 알뜰주유소는 기름 공급가 자체가 비교적 낮아 싸게 팔 수 있고, 정유사가 직영으로 운영하는 주유소들 역시 가격경쟁 여력이 있지만 자영주유소들이 이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자기 마진을 깎아 가격을 내려야 했기 때문.

주유소협회 관계자는 "적극적인 경쟁 유도를 통해서 가격 인하를 유도하는 정책이다보니까 영세한 주유소들은 가격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고 털어놨다.

서울의 한 정유사 직영 주유소. 직영 주유소들은 최근 치열해진 주유소간 가격경쟁에서 상대적으로 압박을 덜 받는 편이다.
 서울의 한 정유사 직영 주유소. 직영 주유소들은 최근 치열해진 주유소간 가격경쟁에서 상대적으로 압박을 덜 받는 편이다.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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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주유소 "마진 2%... 우리도 힘들다"

시장 경쟁이 힘들기는 알뜰주유소도 마찬가지다. 한국 석유공사에서 공급해주는 기름의 공급가가 당초 정책 목표만큼 싸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알뜰주유소를 경영하는 김덕진(가명)씨는 "처음에 (알뜰주유소) 시작할 때는 리터당 100원씩 싸게 해주자고 시작한 건데 어차피 석유공사에서 주는 기름도 정유사에서 사오는 것이다보니 공급가가 그다지 낮지 않고 물량도 충분치 않다"고 말했다.

김씨가 지난 16일 석유공사를 통해 받아온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910원. 주유소종합정보시스템에 공시된 17일 김씨네 주유소 판매가격으로 계산한 마진 및 영업비용은 2.0%를 살짝 넘는 정도다. 자영주유소들 보다 마진은 더 낮지만 '박리다매'로 버티고 있다는 얘기다.

김씨는 "아무리 그래도 낮출 수 있는 한계라는 게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전남 순천의 한 알뜰주유소는 지난 4월 가짜 석유를 판매하다 적발되기도 했다. 알뜰주유소 출범 이후 법정 석유품질 기준을 위반한 업소는 4곳에 달한다.

기본적으로 차량 통행량이 많은 편인 도시는 그래도 형편이 나은 편이다. 도시나 주요 도로와 떨어진 지방 지역에서는 자영주유소들이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분위기다. 올해 알뜰주유소로 전환한 농협주유소들 때문이다. 충남 공주시에서 주유소를 경영하는 신하석(가명)씨는 "시골에서 기름 사가는 건 대부분 면세유인데 현재 농협이 그 물량을 다 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씨는 "이전에는 모든 주유소가 면세유를 취급했지만 이번 정권들어 면세유 배정 권한을 가진 농협이 급격히 직영 주유소 숫자를 늘렸다"고 설명했다. 농협주유소가 늘자 농협 조합원들이 기름을 그곳에서 사기 시작했고, 그덕에 인근 자영주유소들이 다수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다.

올해 8월 말까지 알뜰주유소로 전환된 농협 주유소 숫자는 374개. 8월 기준, 전국 718개 알뜰주유소의 52.1%에 달한다. 18일, 배기운 민주통합당 의원에 따르면 농협은 지난해 10월까지만해도 정부의 알뜰주유소 전환 권유를 강력히 거부하다가 11월 1일 청와대에서 참여 요청을 받고 이같이 숫자를 늘린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의 한 알뜰주유소(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 없음).
 서울의 한 알뜰주유소(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 없음).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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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소 경쟁보다 정유사 기름값 원가 공개가 더 필요"

이러한 주유소들의 출혈 경쟁은 연말에 더 심화될 전망이다. 정부가 연내 알뜰주유소를 1000개까지 늘리는 한편, 석유공사를 통해 외국산 휘발유 20만 배럴을 연내에 수입해 알뜰주유소에 추가로 공급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중 10만 배럴은 중국의 페트로차이나로 공급자가 최종 낙찰됐으며 품질에 문제가 없을 경우 10월 말 수입될 계획이다.

석유공사 관계자는 "낙찰가를 밝힐 수는 없지만 지금 정유사들을 통해 알뜰주유소에 공급되는 가격보다는 당연히 싼 가격"이라면서 "중국에서 들여올 10만 배럴은 전국 알뜰주유소의 30% 정도가 모여 있는 영남권에 공급할 것"이라고 말했다. 석유공사 측은 이 물량으로 이 지역 알뜰주유소들이 연말까지 현재보다 더욱 싼 가격에 기름을 판매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경쟁 촉진 정책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목소리가 높다. 인위적이며 지속되기 어려운 시장 개입이고,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김동철 민주통합당 의원은 지난 8일 지식경제부 국정감사에서 높은 기름값을 낮추기 위해서는 주유소보다 정유사들을 경쟁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내놨다.

김 의원은 "정부가 기름값을 낮춘다며 알뜰주유소 정책을 쓰고 있지만 이는 일선 주유소의 3~6% 유통마진을 쥐어짜는 성과내기용 정책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고유가 원인은 주유소가 아니라 시장을 과점하고 있는 정유사에 있으며 주유소 경쟁 유도로 기름값을 낮추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김 의원은 "정유사 기름값의 원가 공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경쟁 촉진 정책의 핵심에 있는 알뜰주유소의 휘발유 가격 인하가 사실은 모두 '세금효과'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홍의락 민주통합당 의원은 지난 12일 지식경제부 국정감사에서 이같은 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그간 알뜰주유소를 통해 공급된 물량이 1억 8567만 리터인데 같은 기간 동안 알뜰주유소 전환에 직접적으로 들어간 지원금을 따져보면 리터당 22.05원씩 세금을 지원됐다는 것이다.

정부가 일반 주유소보다 평균 42.97원 싸다고 밝혔지만 세금 지원을 빼면 실제 효과는 20.92원 인하에 불과한 셈이다. 직접 지원 이외에 감면된 세금까지 합하면 인하된 가격은 사실상 모두 세금에서 나온거나 다름없다는 게 홍 의원의 설명이다. 자기가 낸 세금으로 기름값 할인받은 격이다.

주유소종합정보시스템(www.opinet.co.kr)에 공개되는 가짜석유 판매업소 현황. 19일 현재 전국에 80개소가 있다. 매년 유통되는 가짜석유 양을 보면 실제로 단속을 피해 가짜석유를 파는 주유소는 이보다 훨씬 많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주유소종합정보시스템(www.opinet.co.kr)에 공개되는 가짜석유 판매업소 현황. 19일 현재 전국에 80개소가 있다. 매년 유통되는 가짜석유 양을 보면 실제로 단속을 피해 가짜석유를 파는 주유소는 이보다 훨씬 많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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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석유 단속만 잘 해도 기름값 129원 내릴 수 있어"

정부가 할 수 있는 '기름값 잡기' 방법이 일선 주유소들의 경쟁 촉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연세대 김동훈 교수는 "정부가 시중에서 판매되는 가짜석유, 탈세 석유를 근절시키면 리터당 129원의 유류세 인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지난 2010년 시중에 가짜 경유가 28%, 가짜 휘발유가 6% 가량 시중에 유통됐는데 이로 인해 걷히지 않은 세금이 매년 1조 7000억 원 정도라는 것이다. 여기에 무자료거래, 유가보조금 부정수급 등 불법거래까지 합치면 한 해에 3조 7000억 원 규모의 세금이 새고 있다는 게 김 교수의 분석이다.

알뜰주유소 없이 가짜 석유 단속만 잘 해도 기름값의 절반을 넘게 차지하는 유류세를 100원 이상 깎아줄 수 있는 셈이다. 가짜 석유를 팔면서 연명해 온 불법 주유소들이 줄어들면 주유소 간 과다한 출혈 경쟁을 완화하는데도 도움이 되니 일석이조다.

정부가 물가 안정을 목표로 알뜰주유소를 출범한 지도 1년이 가까워오고 있다. 소비자는 항상 더 싼 기름을 원한다. 국민들에게 싼 기름을 공급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정부의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태그:#얼뚤주유소, #주유소 휴업, #유류세, #가짜석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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