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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화개장터 자리
 옛 화개장터 자리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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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을 따라 간다. 은빛 모래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대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강변 풍경은 운전에 집중할 수 없게 한다. 깨끗한 풍경이다. 화개장터를 찾아간다. 화개장터는 조영남이 부른 <화개장터> 노래가 아니더라도 예전부터 유명했다.

하동, 구례, 쌍계사의 세 갈래 길목이라 오고가는 나그네로 하여 화개장터엔 장날이 아니라도 언제나 흥성거리는 날이 많았다.(김동리의 <역마> 중에서)

작은 시골 장터가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된 데에는 이름값도 하지 않았나 싶다. '花開'(화개)라는 지명은 꽃이 만발한 곳이다. 그곳에서는 꽃만 피는 게 아니라 사람들도 모여들었다. 화개장터는 관광객들을 위한 식당들로 채워지고, 전통시장이 제 역할을 잃어가면서 쇠락했다. 옛 화개장터 자리는 반듯하게 지어진 상가건물들로 채워졌다.

그러다 몇 년 전 장터를 화개천 건너편으로 옮기면서 새롭게 정비했다. 5일마다 열리던 장은 상설시장이 됐다. 이제 이곳에서 생필품을 팔고 정을 팔던 장터의 모습은 없다. 화개장터로 들어서니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그냥 흥겹다. 들뜬 기분이다. 두리번거린다.

화개장터 풍경
 화개장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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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특산음식인 재첩국
 섬진강 특산음식인 재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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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화주막'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옛날 소설 속에 나오는 그 주막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반갑다. 들어가서 점심으로 재첩국을 시킨다. 재첩은 섬진강에서 잡히는 작은 조개다. 손톱만한 조개를 삶아서 껍질을 벗겨내고 알맹이만 다시 넣고 국을 끓인다. 부추를 잘게 썰어 국위에 띄운다. 부추의 싱싱함과 시원한 재첩 우려낸 국물이 잘 어울린다. 조갯살 맛은? 음.

김동리는 이곳 화개장터를 무대로 <역마>(驛馬)라는 유명한 소설을 썼다. 화개장터에서 주막을 운영하는 옥화는 아들 성기의 타고난 역마살을 없애기 위해 쌍계사로 보내고, 책가게를 열어 장날만 집에 오게 한다. 어느 날 체 장수 영감이 딸 계연을 데리고 와서 주막에 맡기고 떠나고, 옥화는 성기가 결혼해서 정착할 수 있도록 계연과 맺어주려고 한다.

화개장터에 있는 김동리 <역마> 조형물
 화개장터에 있는 김동리 <역마>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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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옥화는 체 장수가 36년 전 어머니와 인연을 맺은 아버지이고, 계연이 이복동생임을 알게 된다. 결국 체 장수와 계연은 떠나고, 성기는 중병을 앓는다. 옥화는 성기에게 계연과의 사연을 말해준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임을 알고 체념한 성기는 병을 이기고 일어선다. 그리고 엿판을 만들어서 화개장터를 떠난다.

거역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슬픈 이야기다. 어떻게 받아들이면 요즘 유행하는 막장드라마? 사랑하는 사람이 이모였다. 소설을 다 읽으면 아쉬움이 남는다.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계연과 결혼해서 역마살도 고치고 알콩달콩 잘 살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화개장터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약재상에서는 봉지에 약재 이름을 적어 놓아 겨우살이, 상황버섯, 하수오 등등을 직접 보는 재미가 있다. 예쁜 도자기 공예품도 보고, 주렁주렁 탐스럽게 매달아 놓은 곶감도 본다. 대장간 아저씨는 외출했는지 화덕에 불이 꺼졌다.

화개장터를 나와 칠불사로 향한다. 소설 속에서 책가게를 하는 성기는 칠불사로 책값을 받으러 간다. 옥화는 계연을 같이 따라 보낸다. 성기는 처음부터 큰길을 버리고,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수풀 속 산길을 돌아서 간다.

"칠불은 아직 멀지라?"

낙엽이 진 화개십리벚꽃길
 낙엽이 진 화개십리벚꽃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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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사 오르는 길목에 있는 범왕마을
 칠불사 오르는 길목에 있는 범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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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 화려했던 벚꽃 길은 가지 끝에 잎들만 몇 개 남았다. 잿빛으로 어른거리는 나뭇가지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화려한 날을 그리워하는 아쉬움도 또 다른 매력이 있다. 꽃이 없어도 푸른 잎이 없어도... 쌍계사로 들어가는 다리를 지나친다. 표지판에는 10km를 더 가라고 알려준다.

계곡에는 바위들이 물과 싸우는 듯하다. 거칠다. 길은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간다. 주변으로 차밭이 산비탈을 타고 올라간다. 삼거리를 만나 범왕마을로 들어선다. 범왕마을에는 찻집들이 몇 집 있다. 마을이 뒤로 물러서더니 가파른 길로 올라선다. 길은 구불구불 산길을 올라간다. 귀가 먹먹해지다가 터진다. 높게도 올라간다.

아래로 보이는 풍경이 멀어질 때쯤 일주문이 보인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걸어 올라가려는데, 내려오시는 분이 절 밑에까지 차가 올라간단다. "걸어가려고요." 산 속으로 난 길은 마지막 남은 단풍이 힘들게 버티고 있다. 나뭇잎들은 빛을 바랜 채 힘이 없다.

칠불사 단풍
 칠불사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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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의 일곱왕자가 성불했다는 칠불사 풍경
 김수로왕의 일곱왕자가 성불했다는 칠불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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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차다. 손이 시리다. 주변 풍광이 너무나 조용해서 더욱 춥다. 새로 짓고 있는 3층 건물이 보이고, 높은 기단 위에 웅장한 건물이 길을 막아선다. 예전에는 운치 있는 암자였을 텐데, 지금은 웬만한 절보다 크다. 그래서 칠불사로 바꿨나보다.

계단으로 오른다. '동국제일선원'이라는 현판이 현재의 모습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다. 대웅전으로 들어서서 부처님께 인사를 한다. 안에 계시는 분이 절집 내역을 알려준다. 옆에 있는 부조가 '칠불'이라며,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외삼촌인 장유보옥 선사를 따라 이곳에 와서 수도한 지 2년 만에 모두 성불하였다고 해서 칠불사(七佛寺)라 불렀단다.

칠불사에는 유명한 '아자방'이 있다. 신라 효공왕 때 담공선사가 '아(亞)'자 모양의 방을 만들었는데, 한 번 방을 덥히면 한 달 동안 온기가 유지된다고 한다. 현재 아자방은 1951년 소실되어 복원하였다. 현재 건물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아자방은 문이 닫혀있고, 내부를 볼 수 있도록 유리로 막아 놓았다. 석굴암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데, 많이 아쉽다.

한번 덥히면 온기가 한달을 간다는 칠불사 아자방
 한번 덥히면 온기가 한달을 간다는 칠불사 아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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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사 헌식대에서 식사중인 고양이
 칠불사 헌식대에서 식사중인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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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을 나오는데 헌식대에서 고양이가 음식을 먹고 있다. 헌식(獻食)은 재(齎) 의식에 올린 음식을 새나 작은 동물들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절집 음식에는 고기반찬이 없을 텐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고양이가 먹고 있는 것이 콩나물이다. 뭘 기대했을까? 고양이가 절에 살다보니 반 스님이 되었나 보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고양이가 절집에 살면 콩나물도 먹는다. 엷은 웃음이 나온다.

덧붙이는 글 | 11월 17일 풍경입니다.



태그:#화개장터, #칠불사, #화개 십리 벚꽃길, #재첩, #역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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