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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결혼을 앞둔 김용찬군과 장은진양이 주례를 청하기 위해 큰절을 하고 함께 주례를 설 두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5월에 결혼을 앞둔 김용찬군과 장은진양이 주례를 청하기 위해 큰절을 하고 함께 주례를 설 두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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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4월 1일), 모티프원에 아주 특별한 방문이 있었습니다. 김용찬군과 장은진양이 그들입니다. 올 5월 4일 결혼을 앞둔 두 사람입니다.

두 사람은 먼저 사양의 손을 내젓는 소엽 선생님과 저를 앉히고 큰절부터 했습니다. 푸른 젊음을 가진 두 사람의 방문 목적은 주례를 청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례를 요청하기 위한 큰 절을 두 사람에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결혼에 주례를 두 사람이 맡기로 한 까닭입니다. 사연은 이렀습니다.

신랑 김용찬군의 아버지, 김대영 선생은 용찬군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십 수 년 전에 스스로 구도자의 길을 걷기위해 출가했습니다. 법명은 '야초'. 서예가 소엽 신정균 선생은 야초스님이 속가에 있던 때에 인연을 맺은 분으로 야초스님의 속가시절과 출가 후의 만행에 함께 구도하는 마음으로 인연을 계속했습니다. 그 세월이 올해 만 15년입니다. 야초스님의 속가(俗家) 아들 김용찬군이 10여 년 전, 군에 입대하면서 소엽 선생께 요청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결혼을 할 때 주례를 맡아 주십사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소엽 선생은 흔쾌히 승낙했고, 그 청년이 마침내 배필을 찾아 혼인을 앞두고 그때의 약속에 따라 주례를 요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소엽 선생은 그 혼례가 그동안의 변화된 관계를 반영하고 좀 더 창의적이고 감격적인 혼례식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저와 함께 주례를 담당하고 싶다는 '더블 주례'를 제의하신 것입니다.

소엽 선생은 저와 야초스님과도 7년 동안 구도하는 한 가지 마음을 서로 나누어왔으니 이 더블 주례가 신랑과 신부에게 결혼생활에 대한 더 확고한 울림의 기준을 전할 수 있을 거라는 의견이었습니다.  

하지만 결혼은 신랑·신부 당사자뿐만 아니라 양가 부모님과 친지들이 모두 관여되는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인 만큼, 기존의 형식과 관례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부모와 하객들에게 불편한 마음을 드릴 수도 있으므로 그 뜻을 확인받도록 했습니다. 양가 부모님은 이 파격적인 형식에 대해 큰 기쁨으로 반긴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신랑과 신부가 될 두 사람이 직접 방문한 것입니다.  

김용찬군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경우입니다. 아버지의 엄한 기준에 따라 새벽 4시에 일어나 무릎을 굻고 명심보감을 외어야했습니다.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는 체벌도 뒤따랐습니다. 한번도 '아빠'라고 불러보지 못했습니다. 꼭 '아버지'로만 불러야했습니다.   

그리고 용찬군이 가장 예민한 청소년 시절에 아버지는 가족들의 뜻에 반하여 홀로 구도의 길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용찬군은 흔들림 없이 어머님을 지켜드리면서 장한 청년이 되어 스스로의 힘만으로 청년 사업가로 섰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버지의 입장을 가장 깊이 헤아리는 효자가 되었습니다. 용찬군은 두 사람에게 절을 한 후, 아버지에 대한 애끓는 마음을 토로했습니다. 

"이번 결혼식을 앞두고 '아버지'는 마침내 저의 '아빠'가 되셨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근엄하게 부르는 대신 더욱 정겨운 '아빠'라고 부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번에 결혼을 앞두고 마침내 '아빠'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용찬군의 눈에 고인 눈물이 두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옆에 앉은 은진양이 그 눈물을 훔쳐주었습니다. 용찬군이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주장이셨지만 식장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비워두고 싶지 않은 어머니와 저의 간절한 청을 뿌리치지 못한 것입니다. 딱 3분이더라고요. 아빠는 엄마에게 뿐만 아니라 제게 참 엄하고 호된 말씀을 많이 하곤 하셨는데 우리가족 모두가 성직자의 방식으로 살도록 요구하셨습니다. 제가 청소년이었을 때 그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 비수 같은 말로 반항하기도 했었습니다. 좀 더 나이가 들어 아빠의 그 가혹하다고 느낀 말씀들에 저항하지 않고 딱 3분을 참으니까 그 말씀들이 모두 옳더라고요. 모두가 귀한 말씀들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부모님께 최대한 잘하고 싶어요."  

용찬군은 이미 스스로 인생의 중요한 가치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가족의 어떤 어려움도 출가한 아버지에게 토로하거나 기댈 수 없는 상황에 좌절하는 대신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해낼 수 있고 이성과 의지를 적절하게 구사할 수 있는 독립심을 가진 페르소나(persona)가 되었습니다. 고난이 오히려 용찬군의 스승이 된 셈입니다.  

신랑의 눈물을 자신의 손바닥과 손등으로 쓱쓱 문질러 닦아주는 은진양은 독일에서 나고 그곳에서 자란, 극히 자유롭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처녀였습니다. 사업하는 아버지의 사업장이 그곳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용찬군과 은진양이 눈물을 닦고 다시 활짝 웃었습니다. 사실 부부의 삶이라는 것은 늘 흐림과 맑음이 번갈아오기 마련이지요.
 용찬군과 은진양이 눈물을 닦고 다시 활짝 웃었습니다. 사실 부부의 삶이라는 것은 늘 흐림과 맑음이 번갈아오기 마련이지요.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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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이미 사라진 형태의 극히 동양적인 방식으로 교육을 받은 총각과 극히 서구화된 방식의 교육시스템에 적응해온 신부의 이 만남이 일견 색다른 만남일 수 있지만 제게는 서로에게 발전적인 진보가 있을 수 있는 만남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서로가 다른 성장 배경에서 형성된 것들을 상호 교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결혼 이야말로 인생의 여러 통과의례 중에서 가장 중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누군가와 한방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혼자 사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그 어려운 길을 평생 지속해야하는 의무를 지는 것이 결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의무를 두 사람이 예술처럼 잘 조화시키면 혼자 살아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행복의 고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결혼이기도한 것입니다.  

저는 이미 두 사람의 큰 절을 받았으니 주례를 허락한 셈이 되었습니다. 결혼식이 한 달이 남았지만 저는 벌써 부터 걱정이 적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이 어떻게 협력과 조화의 예술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어떤 내용을, 어떻게 주례사에 담아야할지도 걱정이지만 양복이 한 벌도 없는 저로서는 어떤 드레스 코드를 해야 할지도 참 걱정스럽습니다. 

이즘 주례 없는 결혼식에 더블 사회자의 결혼식이 유행입니다. 하지만 더블 주례의 결혼식은 전례를 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 형식을 어떻게 갖추어야할지도 고민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더블주례 형식의 큰 가닥은 잡았습니다. 소엽 선생이 먼저 두 사람의 성혼을 하늘과 땅의 신명께 고하는 고천문(告天文)을 낭독하고 의식을 집전하며 제가 주례사를 하는 방식으로 역할을 분담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주례사에는 소엽 선생과 제가 함께 실천해온 인생의 엄선된 지침만을 담을 것입니다.

무장수, 야초스님
2007년 아코디언 연주로 음악회를 열어 장학금을 모금하고 그것을 소년소녀가장들에게 전하는 자선을 실천하고 계신 보광스님의 연주회에 참석했을 때 찍었던 야초스님 사진을 전하고 함께 웃었습니다.
 2007년 아코디언 연주로 음악회를 열어 장학금을 모금하고 그것을 소년소녀가장들에게 전하는 자선을 실천하고 계신 보광스님의 연주회에 참석했을 때 찍었던 야초스님 사진을 전하고 함께 웃었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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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불쑥 야초스님이 모티프원의 서재로 들어오셨습니다. 서재 안으로 들어오시면서 벗어둔 신발에 자꾸 신경을 쓰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신발을 다시 보니 아주 고급한 새 운동화였습니다.  

사연을 물었습니다.  

"지난 일주일간 경기도의 한 토굴에서 법랍(法臘)이 높으신, 홀로계신 스님을 시봉했습니다.  

홀로 수양을 오래하신 스님의 경우, 나이가 들면 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외롭기도 합니다. 그래서 간혹은 말벗이 그립기도 하지요. 그 스님의 경우, 거동이 불편할 정도여서 제가 잠시 궂은일들을 도왔습니다.  

마침 제가 그곳에 머물 때, 한 보살께서 스님의 운동화를 사가지고 가시겠다는 전갈이 왔을 때 그 스님이 제 운동화도 함께 사다주실 것을 청해서 얻은 운동화입니다. 오래 걸어도 발이 아주 편해요.   

문제가 값비싼 새 운동화를 신고 보니 자꾸 신경이 쓰여요. 그래서 식당에 들어갈 때도 운동화를 방으로 가지고 들어가게 됩니다.  

좋은 운동화를 갖게 되다보니 지금 제게 운동화가 오히려 부처님이 되었습니다. 갖지 않았으면 없을 번뇌를 안게 된거지요." 

저는 야초스님과의 대면에서 묻지 않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느냐? 언제 다시 올 거냐?"  

철저하게 운수납자(雲水納子)의 삶을 살고계신 야초스님에게 이 물음은 부질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님은 주로 걷지만, 아주 장거리를 이동하실 때는 히치하이크를 하기도합니다.  

오래전 스님의 일화입니다. 

"강원도 산길에서 작은 트럭이 오기에 손을 들었지요. 옆 좌석에 앉고 보니 그 운전자는 오른쪽 팔에 깁스를 하고 있었어요. 왼손으로 운전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모두가 추수에 바쁜 가을의 끝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제 갈 길을 잊고 그 운전자의 집으로 함께 갔습니다. 그 집에는 노모 혼자 계셨습니다. 가을의 들일이 지천인데 아들의 팔이 부러진 상황이었습니다." 

스님은 그 집에 눌러앉아 3일간 추수를 도왔습니다. 다시 누더기 법복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서자 90도로 허리가 굽은 노인이 말했습니다. 

"스님, 한 계절 더 계시다 가시지요."     

아주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스님이 출가 전에 있었던 마을에 들렸습니다. 무가 한창 출하되는 계절이었습니다. 그런데 600평 무 농사를 잘 지어놓은 그 동네의 농사꾼이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집 무밭은 출하시기를 놓치고 방치되어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스님은 그 동네의 한 젊은 친구를 설득하여 트럭을 빌리고 그 무를 뽑아 트럭에 실었습니다. 그리고 인근 도회지의 골목골목을 돌면서 그 무를 팔았습니다. 600평의 무가 어찌나 많은지 할머니들에게는 그저 주곤 했어도 도붓장사로 그 무를 다 소진하는 데는 아주 여러 날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무값을 봉투에 담아 병원에 누운 화상환자에게 전했지요." 

저는 야초스님과 대면하다보면 화엄경을 읽는 열락을 맛보게 됩니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주례, #야초스님, #소엽신정균, #김용찬, #장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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