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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인 콜로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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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뜬히 1000명 이상의 승객을 수용하는 거대한 페리가 알바니아의 듀레스(Durrës)를 출발, 밤의 아드리아해(海)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항해한 끝에 도착한 곳은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바리(Bari). 시끌벅적한 입국심사대. 이탈리아어와 영어·독일어와 알바니아어까지가 뒤섞여 시장판이 따로 없다.

때는 유럽인들의 휴가가 마무리 절정을 이룬 2011년 9월 초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입국객 탓에 2시간 가까이 땡볕 아래 줄을 서 입국심사를 기다렸다. 짜증이 안 날 수 없는 상황. 게다가 동유럽 사람들에 비해 이탈리아인들은 감정 표현에 솔직하고, 조금은 시끄럽다. 어찌 보면 한국인과 기질적으로 비슷하다. 출입국 보안요원과 더위 먹은 이탈리아 사람들의 말다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동양인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바리의 입국장. 2시간을 기다렸는데, 입국 도장 찍는 데는 딱 5초가 걸린다. 다른 나라와 달리 "왜 왔느냐?" "우리나라에 온 이유가 뭐냐" 등 여행자를 향한 질문 하나 없다.

이건 나중에 이탈리아를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 출국심사장에서도 출국 도장을 3초 만에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유럽에서 출입국 심사가 가장 허술한 국가가 이탈리아란다. 올 테면 오고, 갈 테면 가라는 말인지. 어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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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볼 수 있는 이탈리아 도시의 뒷골목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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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의 손길 내민 흑인, 왜 친절을 친절로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바리 시내로 나왔다. 당시는 이탈리아와 그리스를 포함한 유럽의 경제 공황이 가시화될 무렵. 버스기사들의 파업으로 인해 시내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다음 목적지인 나폴리로 가려면 역을 찾아야했다.

그런데, 이탈리아 바리 사람들, 알바니아와 크로아티아 사람들보다 영어를 훨씬 못한다. "스테이션"이라는 단어를 끊임없이 내뱉었지만, 그 단어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녹슨 기억력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역(驛)이 이탈리아어로 스타지오네(stazione)라는 걸 떠올렸고, 1시간여를 헤맨 끝에 바리역에 닿았다.

문제는 연이어 터졌다. 서유럽과 남유럽에 비해 경제적으로 낙후된 동유럽의 기차역에서는 창구에서 직원이 표를 판다. 전산시스템이 미비한 이유일 터. 세르비아와 알바니아, 불가리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모두 그랬다. 그런데 바리역에는 자동발매기가 있었다. 이걸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 발매기 앞에서 고민에 빠져있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톡톡 친다.

마르고 까만 얼굴의 흑인 하나가 유창한 영어로 묻는다. "도와줄까요?" 사람의 선입견이나 편견이란 건 무서운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나 미국 TV 드라마에서 극악무도한 범죄자나 불량한 건달로 자주 등장하는 흑인들. 내 머릿속에도 그 이미지는 선명해서 선뜻 "고마워요, 나폴리 가는 기차표 좀 끊어 주세요"란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도와주겠다는 이가 그 사람뿐이니 별다른 방법이 없다. 자동발매기 앞에서 물러서며 50유로(약 7만5000원)짜리 지폐를 그에게 건넸다. 뚝딱뚝딱…. 채 1분 되지 않아 승차권과 잔돈을 내게 전해주며 그가 씨익 웃었다. 채 인사도 전하지 못했는데, 총총히 역 밖으로 사라지는 친절한 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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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사람들은 '젤라또'라고 부르는 아이스크림도 이탈리아의 부가가치 높은 관광상품이다. 로마의 유명한 젤라또 가게는 그 맛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1시간씩 줄을 서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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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는 미항(美港)이 아니다 절대... 그러나 아름답다

나폴리에 도착한 것은 이미 해가 저문 늦은 저녁. 그런데, 이건 뭔가? 사진으로 보고, 말로 듣던 나폴리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호주의 시드니,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 등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 도시'로 손꼽히는 곳. 깨끗한 바다와 푸른 산이 조화를 이루는 한국의 통영을 '동양의 나폴리'라고도 칭하는 걸 들은 바 있다.

하지만, 천만에. 직접 만난 나폴리의 첫인상은 조금 과장하자면 '쓰레기 더미'에 가까웠다. 기차가 나폴리역에 들어설 무렵부터 철로 위에 온갖 잡동사니 오물들이 가득하더니, 역 광장에도 곳곳이 쓰레기 천지다. 늦여름이었으니 그 냄새는 또 어땠겠나.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게다가 구걸로 연명하는 동냥아치도 패션모델처럼 잘 생겼다는 이탈리아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인지, 역 인근엔 각종 기념품과 싸구려 의류를 파는 흑인들이 절대다수였다.

이탈리아 북부와 남부는 경제 발전 정도의 차이가 전혀 다른 별개의 나라로 느껴질 정도라더니 그 전언이 과장이 아닌 모양이었다. 실례가 될 수도 있는 비교지만, 이탈리아 남부도시 나폴리는 캄보디아나 라오스의 도시보다 훨씬 지저분하고 살풍경했다. 물론, 여행자가 그 도시의 깊숙한 속내까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탈리아에 도착하기 전까진 동유럽만을 4개월 가까이 여행했던 탓으로 한국 식당이나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를 거의 이용하지 못했다. 당연지사 한국 음식을 먹은 지 오래. 나폴리에선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며 된장찌개 맛을 보고 싶었다. 해서, 인터넷을 뒤져 나폴리역 인근 숙소의 주소를 메모했다.

유럽은 도로와 건물이 어떤 일정한 방식에 의해 규칙적으로 배열돼 있어, 길 찾기가 비교적 수월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건 잘 그려진 지도가 있고, 길눈이 밝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을 때 가능한 일. 나는 20년지기 친구 집도 갈 때마다 헷갈려 하는 사람이다. 메모한 주소만 가지고 숙소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 바리역에서 기차표 발매기 앞을 서성이던 것처럼 다시 나폴리역 광장을 서성였다.

그때다. 이번에도 흑인 하나가 다가와 묻는다. "도와줄까요?" 바리에서 만난 조그만 흑인과 달리 이 사람은 183cm인 내 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덩치다. 그러나, 새까만 얼굴을 환히 부수며 미소 짓는 웃음이 선량했다. 입술 사이로 빛나는 새하얀 이가 너무나 가지런했고. 주소를 적은 종이를 내밀자, "따라오세요"라며 앞장선다. 커다란 짐 보따리를 등에 멘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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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바다와 깎아지른 바위산이 근사한 조화를 이루는 이탈리아의 아말피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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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다, 피부색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어리석은 일

내가 가고 싶어하던 한국인 운영 숙소는 멀지 않았다. 사실은 한국인은 아니고, 중국 조선족이 주인으로 있는 숙소였지만. 어쨌든, 고마움을 전해야 했다. 행상이 분명해 보이는 그 흑인에게 물었다. "보따리 안에 든 게 뭐죠?" 예의 그 착한 웃음을 거두지 않고 그가 가방을 연다.

조잡하고 가벼운 화산암으로 만든 이탈리아 여행 기념품이다. 1개에 5유로, 3개엔 10유로라길래 10유로를 주고 1개만 집어 들었다. 잔돈을 사양하는데도 기어코 5유로짜리 조그만 지폐를 거슬러주는 친절. 손 흔들어 그를 배웅하고, 게스트하우스의 벨을 눌렀다. 이탈리아에서의 첫날은 두 흑인으로 인해 유쾌했다.

흑백 차별이 엄존했던 시대의 미국. 흑인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는 유력신문과의 인터뷰 도중 "왜 때리고 맞는 복싱을 선택했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도 맞으면 아프고, 상대를 때리는 게 싫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자라는 흑인 청소년이 택할 수 있는 직업이란 한계가 분명해요. 나 역시 복서가 되지 않았다면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나 갱이 됐을 겁니다."

잘못 없이 편견과 선입견의 그늘 아래서 사는 사람들. 흑인도 분명 그러한 부류 중 하나다. 단지 피부색으로 인간을 판단하려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편견과 선입견으로 인한 피해자는 언제건 존재할 터.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날이면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한심하고 서글퍼진다.

어쨌든, 내일은 카프리해의 빛나는 보석이라는 아말피(Amalfi)와 포지타노(Positano)를 보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