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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바라본 839고지(2011. 10. 10.).
▲ 유학산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바라본 839고지(2011. 10. 10.).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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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산

곧 준기는 금오산 아홉산골짜기 들머리인 금오저수지에다 차를 세웠다. 구미시가지가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랐다.

"한국이 그새 몰라보게 발전했다는 보도는 많이 봤지만 여기까지 이렇게 변할 줄이야."

순희는 적이 놀란 표정으로 차창 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그때 우리가 탈출했던 유학산은 어딘가요?"
"데기(저기) 왼쪽에 멀리 보이는 데(저) 산이야요."
"그럼, 천생산은?"
"유학산 왼편 산입네다. 이 고장사람들은 데(저) 산을 '반티산'이라고 하더구만요."
"'반티'가 무슨 말이에요."
"내레 구미에서 살 때 마을들한테 물어보니까 천생산 모양이 함디박(함지박) 같아 붙인 이름이라는데, 여기 사람들은 그 함디박을 '반티'라고 하더만요."
"그때는 참 지겨웠지만 지금 보니 산도 예쁘고, 이름도 재미있네요. 참 그때 남자들은 양식이나 솥, 심지어는 아이나 부모까지도 지게에 지고, 여자들은 곡식을 항아리나 함지박에 담아 머리에 이고 피난을 다녔지요."
"기럼요, 온 나라 백성들이 피난을 다니누라 갈팡질팡했디요. 피난 널차(열차)가 지난 굴 속에는 아이들 시체가 널려 있었고요. 흥남 철수 때는 미군 수송선에 어떻게나 사람이 많이 탔는지 그야말로 콩나물시루였다구 하더만요."

흥남철수작전에 따라 수송선(LST)에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탄 피난민들. 부두에는 미처 수송선에 오르지 못한 피난민들이 아우성치고 있다(흥남, 1950. 12. 12.).
 흥남철수작전에 따라 수송선(LST)에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탄 피난민들. 부두에는 미처 수송선에 오르지 못한 피난민들이 아우성치고 있다(흥남, 1950. 12. 12.).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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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

"지금도 유학산을 보니 그때의 B-29 폭격소리와 대포소리가 들리는 듯하네요. 참 그 소리가 지긋지긋했지요."
"기럼요, 우리가 살아남은 게 기적이엇디요. 기때 다부동전투에서 양측 모두 3만에 가까운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당했디요. 그래서 시체로 산을 이루었구. 우리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디 않았습네까. 조지훈이라는 시인이 데곳(저곳)을 디나면서 '다부원에서'라는 시를 남겼더만요. 요기 적어 왔디요. 순희 누이가 한 번 읊어보시디요."
"준비를 단단히 하셨구만요."
"뭘요, 기냥 심심할 것 같아…."
"그럼, 읊어보겠습니다."

한 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 공방의 포화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 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 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조지훈의 '다부원에서' 시비 (다부동전적기념관, 2011. 10. 10.).
 조지훈의 '다부원에서' 시비 (다부동전적기념관, 2011. 10. 10.).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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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고등어 냄새

"와아! 대단히 좋은 시예요."

순희는 낭독을 끝낸 뒤 '와아'하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내레 거(그) 시가 워낙 도와(좋아) 자주 흥얼거리디요."
"나도 그 시를 자주 읊고 싶네요. '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이란 시구가 아주 가슴을 찌르네요. 그때 정말 그랬지요."
"기럼요. 마지막 구덜은 내 마음을 그대루 옮겨다 놓은 듯합네다."
"정말 좋은 시입니다."  
"거 종이 가지시라요. 내레 적어놓은 게 이시우."
"잘 간직하면서 욀게요."
"내레 순희 누이가 아니었다면 나두 거 시처럼 유학산 계곡에서 간 고등어 냄새로 썩었을 거야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그때 더 이상 전선에 남았다가는 꼼짝없이 죽겠더라고요. 그래서 전선을 탈출하고 싶은데 도저히 혼저선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불현듯 준기 동생이 생각나데요. 더욱이 준기 동생은 그 다음날 유학산 고지 방어 참호조로 차출된다는 오철수 사단작전참모의 얘기를 듣고 죽음을 각오하고 같이 도망가지고 제의했지요."

"우리는 이미 기때 서로 마음과 마음이 통했나 보디요."
"그랬나 봅니다. 아무튼 우리는 전선을 이탈한 도망병이었지요."
"비겁한 죄인이디요. … 사실 우리뿐만 아니라 많은 인민군이 투항하거나 탈출했답네다. 인민군 제13사단은 작전참모장 이하 간부들이 모두리(모조리) 아예 집단으로 투항했다구 하더만요. 기때 총구 앞에서 살아남으려믄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디요."
"사람이 산다는 것은 죄를 짓는다는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아요."

순희는 그 자리에서 잠시 묵도했다.

피난열차 무개 화물칸에 빼곡히 오른 피난민들(인천역, 1951. 1. 3.).
 피난열차 무개 화물칸에 빼곡히 오른 피난민들(인천역, 1951. 1. 3.).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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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산골짜기

"아홉산골짜기는 어디에요?"
"데기 더수지(저수지) 위 비탈진 길로 가면 나옵네다."
"그때 어떻게 그 어두운 밤길에 저 험한 길을 갔을까요?"
"기때는 젊었고, 사정이 절박했기 때문이디요."
"지금 봐도 경사가 매우 심한 위험한 길인데. … 해평 할아버지 할머니는 살아계실까요?"
"내레 구미가축병원에 있을 때 어느 해 추석을 앞두고 쇠고기를 멫 근 사들고 별남 할머니 댁과 아홉산골째기 해평 할마니 댁에 일부러 찾아갔더랬디요. 기런데 각산 별남 할아바지는 휴전되던 해 돌아가시고 할마니 혼자 살아시오. 아홉산골째기 해평 넝감(영감)님 내외분은 그대로 사셨는데, 몹시 반가워하더군만요. 순희 누이 안부도 묻더군요. 근데 거제(그제)는 힘에 부틴다면서 곧 대구 아들네 집으로 갈 거라고 하더만요."
"참 잘 하셨어요. 영원한 것은 없군요."
"기래요. 그게 세상 리치(이치)디요."

부산에 먼저 도착한 북한 피난민이 부두에서 가족 친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부산, 1951. 1. 8.).
 부산에 먼저 도착한 북한 피난민이 부두에서 가족 친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부산, 1951. 1. 8.).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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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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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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