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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보이 김성구 군이 다른 병사들과 같이 군장검열을 받고 있다(장소 날짜 미상).
 하우스보이 김성구 군이 다른 병사들과 같이 군장검열을 받고 있다(장소 날짜 미상).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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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희의 이야기

순희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 밤, 그들은 긴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은 서로 아픈 과거를 묻기보다 자기 고백시간으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눴다. 준기는 순희가 미국 동포도 시민권자만 되면 북한에도 갈 수 있다는 얘기에 혹하여 자기도 미국에 이민을 가고 싶다는 소망을 얘기했다. 그러자 순희는 준기의 말에 적극 동의하면서 미국 이민생활이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장밋빛만이 아니라는 얘기를 자신의 체험으로 에둘러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했다.

순희는 데이비드가 월남에서 전사한 이후 시카고 다운타운에서 네일숍을 시작했다. 순희는 그때까지도 이민 초기라 언어도 서툴 뿐 아니라, 미국인 고객 비위 맞추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네일숍은 노력에 견주어 수입도 시원치 않았고, 또한 고객관리도 매우 힘들어 곧 문을 닫았다.

순희는 자기에게 익은 병원 간호사 취업을 알아보았지만 한국 간호사 자격증은 쓸모가 없었다. 순희는 하는 수 없이 초급대학에 입학하여 간호과 준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러자 시카고의 한 대형병원에 간호조무사로 취업할 수 있었다. 말이 간호조무사였지 사실은 환자의 대소변을 치우는 일이나 환자 목욕시키는 일과 같은 허드렛일이었다. 피부색이 다른 순희에게는 그런 일조차도 주로 주말이나 밤 당번이었다.

순희는 집에서 병원에 출근하고자 승용차를 타고 고속도로에 올랐다가 교통사고가 날 위험한 순간도 여러 번 겪었다. 술 취한 젊은이들의 차가 지그재그로 순희 차를 희롱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순희는 위험한 줄 알지만 고속도로를 주행할 때는 일부러 대형 컨테이너트럭을 뒤따라 다녔다. 순희는 병원 지하주차장에 이르고서도 동료 간호사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그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출근을 했다. 그런 고달픈 생활을 6년 한 뒤에 비로소 미국에서 정식 간호사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그러자 그때부터 순희는 병원에서 보수도, 인간적인 대우도 제대로 받을 수 있었다.

시카고다운타운
 시카고다운타운
ⓒ 재미동포 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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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여권

순희는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 외에도 한국문화와 미국문화의 이질감 등을 얘기했다. 그들의 베갯머리 이야기에 여름밤이 짧았다.

"미국 사람들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요. 특히 남의 사생활은 간섭하지 않지요. 한국 사람처럼 남의 일에 간섭하다가는 '당신 일에나 신경 쓰라'라는 말로 망신당해요."
"우리도 기런 덤(점)은 배울 만 합네다."
"미국사람들은 생각보다 매우 검소해요. 한국 사람들은 지나친 과시욕으로 겉치레나 값비싼 사치품을 추구하는데, 미국 사람들은 우리 생각과는 달리 대단히 실용적이에요."
"준기씨가 미국에 이민 오려면 온갖 고생을 하겠다는 독한 마음을 가지고 와야 합니다. 한 10년 정도 이민자의 설움을 잘 참고 견디면서 오로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할 수 있어요. 그 성공이 가능한 나라가 또한 미국이에요."

순희는 핸드백에서 파란색의 미국 여권을 꺼내 보여주었다.

"이건 미국인 여권이에요. 이 여권만 가지면 세계 어느 나라에도 갈 수 있어요."
"북녘 땅에도?"

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럼, 미국 이민은 어떻게 하믄 갈 수 있나요?"
"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지요. 용산 미군부대 부근에는 이민대행사들이 많아요."
"알가습네다. 미국 이민생활을 자세히 알쾌줘서 고맙습네다."

밀짚모자를 쓴 한국인 이발사가 유엔군 병사의 머리를 깎아주고 있다(1950. 8. 25.).
 밀짚모자를 쓴 한국인 이발사가 유엔군 병사의 머리를 깎아주고 있다(1950. 8. 25.).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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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기의 다짐

준기는 순희의 마지막 말이 이별의 긴 키스보다 더 진하게 머릿속에 남았다.

'미국인 여권만 가지면 세계 어느 나라에도 갈 수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 말들은 계속 준기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준기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내레 이제는 오마니를 만날 거야.'

순희는 고국에서 꼭 열흘을 머문 뒤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준기는 김포공항 출국장에서 순희를 배웅한 뒤 그가 탄 비행기가 사라지자 마치 꿈에서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떠난 순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재회의 열흘, 그 가운데도 출국 전 나흘은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은 꿀 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여건은 두 사람을 더 이상 한데 묶어둘 수 없었다.

준기는 순희를 만나기만 하면 이 세상 모든 소망이 다 이루어지고 여한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그를 만난 뒤 다시 헤어지니까 새로운 아픔이 돋아났다. 준기는 그제야 자신의 지난 삶이 고통만이 아닌, 기다리는 기쁨 속에 산 희망의 세월이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내레 미국에 가는 건 한꺼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이야.'
'내레 김준기는 미국에 가서 최순희랑 결혼두 하구, 반다시 성공두 하여 고향의 오마니도 꼭 만날 거야.'

준기는 김포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에 새로운 목표를 세운 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집념을 불태웠다.

'기래, '하늘은 스스루 돕는 자를 돕는다' 그 말 한번 돟아서. 김준기에겐 불가능이 없디. 한번 야무디게 도던(도전)해 보는 거디. 기럼, 사나이 두 번 죽가서.'

순희가 미국으로 떠난 밤, 준기는 밤새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해병 장병들의 야전 식사 장면(장소 날짜 미상).
 해병 장병들의 야전 식사 장면(장소 날짜 미상).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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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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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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