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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정상 구름 위로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2005. 7. 23.).
 백두산 정상 구름 위로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2005. 7. 23.).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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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

우리나라 어느 고을인들 가슴 아픈 이야기가 없으련만 내 고향 구미에는 그런 이야기가 엄청 많았다. 해방둥이인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 자랐다. 나는 어린 시절 안방에서 특히 할머니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때 할머니는 10.1사건 이야기, 당신 신행 초에 옆집에 살았던 도개마을 김아무개 여인(후일 그분 신랑이 대통령이 됨)의 기구한 인생역정 이야기, 앞집 김 목수 집과 오거리 장터 공씨 엿도가와 참기름집 아들의 행방불명 이아기 등은 큰 비밀로 깊은 밤이나 이불 속에서 하셨다.

이와 반면 사랑의 할아버지는 <명심보감>이나 <동몽선습> 등 누런 한지의 고서를 펴내놓고 어린 손자에게 '공자 왈 맹자 왈'을 강독하셨다. 할아버지는 이따금 금오산이 낳은 충절의 선비들을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런 이야기를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의 손을 잡고 우리 집 마당에서 빤히 바라보이는 금오산을 가리키면서 야은 길재 선생과 송당 박영 할아버지의 충절을 아주 귀에 익도록 말씀하셨다. 아무튼 낙동강 강마을과 금오산 기슭에는 예로부터 이야기가 참 많았다.

나는 어린 시절에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란 탓인지, 장차 이야기꾼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 전공도 애초부터 국어국문학과였다. 늘 마음속에 고향을 비롯한 우리나라 산하에 담긴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작정했다. 그러면서 공부도 노력도 게을리 하며 세월만 보냈다.

그러다가 예순이 접어든 나이에 "화장실이 어디입니까?"라는 영어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정말 뜻밖에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가게 되었다. 나는 거기서 눈으로 볼 수 있는 한국전쟁 사진을 수집하던 가운데 한 어린 인민군 포로 사진을 찾고는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번에 고향마을과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장편소설 <어떤 약속>을 쓰게 되었다. 이 작품의 구상에서 자료수집, 얼개 작성, 집필에서 탈고, 그리고 퇴고에 이르기까지 여러분의 도움을 받았다.

이 작픔 집필 계기가 된 소년 인민군 포로 신문 광경 사진(1950. 8. 18.).
 이 작픔 집필 계기가 된 소년 인민군 포로 신문 광경 사진(1950. 8. 18.).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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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을 주신 분들

1965년 대학 1학년 때 청록파 시인의 한 분이신 조동탁(지훈) 선생은 작문시간이면 당신의 시집을 펼치고서 자작시를 굵은 저음으로 자주 낭독해 주셨다. 특히 시집 <역사 앞에서> 에 실린 '다부원에서'라는 시에서 받은 영감은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그때 받은 영감은 이번 작품 창작의 한 바탕이 되었다.

항일유적지 답사로 고향에 갔을 때 구미중학교 허호(전 구미시의원) 선배가 임은동 왕산생가가 한국전쟁 중 야전병원이었다는 증언, 아직도 구미 형곡동에 사는 구미초등학교 구미중학교 동창 강구휘(전 경북도의원) 친구의 증언도 집필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고종 정정길(작품 속 정수길) 형이 들려준 작품 속의 주인공 김윤기(작품 속 김준기)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는 이 작품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내가 이 작품을 집필하며 가장 걱정했던 평안도 방언은 고교 은사이신 김영배(동국대 명예교수) 선생님께서 도와주셨고, 마침 선생님의 고향이 영변군 용산면 구장동이라고 하여 애초 구상과는 달리 아주 주인공의 고향까지 그 마을로 삼았다(애초 준기는 평양고보 출신으로 설정하였음). 여 주인공 최순희와 같은 해에 태어나신 김영숙(이대 명예교수, 전 이대부고 교장) 선생님은 초고를 읽어주신 뒤, 그 시대에 어긋난 점과 본문의 영문과 영시를 지도 감수해 주셨다. 그러면서 준기와 순희의 전선 탈출 장면이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어라>를 연상케 한다고 일부러 서점에서 그 책을 산 뒤 내게 우송해 주셨다.

두 주인공이 모두 간호전사 출신인지라 의료 관련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 대목은 고교 동창인 이관세(삼성의료원) 박사와 이대부고 제자인 송영득(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 내분비내과과장) 박사의 자문을 받았다.

이 작품 집필에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이는 이대부고 제자로 재미 동포 찰스 리 선생이시다. 그는 순희와 준기의 미국 이민과정과 이민생활 전반에 관하여 자기 경험을 토대로 많은 자문을 해주었고, 고교 재학 시절 교지편집 위원이었던 제자 강승모(유동물산교역) 대표는 여전히 번뜩이는 눈으로 지난날 지도교사의 초고에서 얼굴이 뜨겁도록 잘못된 점을 일일이 찾아 고쳐주었다. 고향 구미에 사시는 손현희 시민기자도 자료 사진으로 도와주셨다. 그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소매를 걷고 도와주었다. 나는 여러분들의 도움을 받아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이 작품을 썼다.

실상사에서 바라본 지리산(2004. 8. 7.)
 실상사에서 바라본 지리산(2004. 8. 7.)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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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고민했던 점

이 작품에 나오는 지리적 배경은 내 발로 일일이 답사했다. 국내는 빠짐없이 어떤 곳은 두세 번 답사하기도 했다. 의정부 곧은골의 미 제2사단은 평택으로 이전한 줄 알았는데 다행히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북한은 2005년 남북작가대회에 다녀온 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미국은 백범 김구 선생 암살배후 진상규명을 위한 방미와 다시 한국전쟁 사진을 수집코자 2, 3차에 걸친 방미로 이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 다만 그때 가보지 못한 시카고는 시카고대학에 근무하는 이대부고 제자 이영 박사의 도움을 받았다.

이 작품의 초고는 2011년 10월에 기필하여 2013년 3월에 마무리했다. 꼬박 1년 6개월이 걸린 셈이다. 가장 고민했던 점은 순희의 도미과정이었다. 당시로서는 일반인들의 미국 이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데이비드라는 미군과 국제결혼 방법을 선택했는데 인민의용군 간호전사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독자가 항의를 한다면 내 변명이 궁색해질 것이다. 소설은 있을 수 있는 일도 그릴 수 있다고 대학 창작론 강의 시간에 배웠기에 그렇게 썼다. 사실 그 시절 한국여인 가운데는 미군과 국제결혼하여 태평양을 많이 건너갔다. 몇 해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미 프로풋볼 선수 하인즈 어머니도 그렇게 도미했다.

막 이 작품을 탈고할 즈음 <오마이뉴스> 2013 전국투어가 강원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오마이뉴스> 본사의 한 기자가 2013 전국투어 첫 모임을 강원도 정선에서 가진다고 나에게 참석을 정중히 부탁했다.

나는 여태 운전면허증도 없는 사람이라 그 몇 해 전 원주에서 그 행사가 열렸을 때 버스가 끊겨 한밤중에 강릉에 사는 한 후배기자의 신세를 진 일이 있었다. 그날 이후 후배에게 나의 구차한 사정을 밝히기도 민망한 일이라 다른 이유를 대고 불참을 통보했다. 그런데도 그 후배는 다시 간곡히 참석을 부탁하는지라 애초의 생각을 접고 참석키로 했다. 이 늙은이를 산수 좋은 곳으로 초대하여 숙식 제공에 대화의 광장에 끼어주겠다는데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금강산 만물상(206. 9. 20.).
 금강산 만물상(206. 9. 20.).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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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연재하다

그날 예정된 회의 후 뒤풀이 자리에서 본사 편집부 다른 한 기자가 내 근황을 물었다. 나는 그 참에 <어떤 약속>을 탈고했다는 얘기를 불쑥 했다. 그러자 문득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기자에게 솔직하게 그 얘기했다. 그러자 그는 아주 흔쾌히 연재기사 신청을 권하기에 그 규정에 따랐다. 나는 기왕이면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기에 2013년 6월 25일 한국전쟁기념일에 첫 회를 송고했다.

나는 그날부터 이틀에 한 번 꼴로 원고를 보냈다. 나의 작품 <어떤 약속>이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게 작가로서 보람 있는 일이 아닌가. 더욱이 온라인 오마이뉴스 연재는 시공을 초월하여 지구촌 곳곳에 전파되고 있다. 이 소설이 지구촌 곳곳에 사는 동포들에게, 그리고 휴전선 넘어 북한 동포에게도 읽히기를 바란다.

마침내 2013년 6월 25일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 제1회 "오마니, 내레 꼭 살아서 돌아오갓시오"가 온라인상에 떴다. 나는 이미 쓴 원고를 오마이뉴스로 송고하기 전에 다시 대폭 가다듬었다. 오마이뉴스 특성상 지면에 구애받지 않기에 시각적 효과를 얻고자 내가 소장하고 있는 2천 매 가까운 한국전쟁 관련 사진 가운데 작품과 관련이 있거나 한국전쟁의 실상을 가늠할 수 있는 사진을 골라 매회 서너 컷씩 배경사진으로 올렸다. 곧 여러 독자들이 댓글이나 쪽지함으로 메일, 그리고 원고료주기로 성원을 해주셨다. 그 가운데 내 글을 열독해 주시고 잘못 서술된 부분을 바로 잡아 주시는 분이 가장 고마웠다.

철조망 앞에 선 국군상이용사(1950. 10.).
 철조망 앞에 선 국군상이용사(1950. 10.).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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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의 메일들

박도 선생님, 선생님이 심혈을 기울여 쓰신 글을 이국 땅에서 늘 반갑게 읽고 있습니다. 63년 전의 전쟁,  아직 휴전 중인데도 전 국민의 70 퍼센트 이상은 전쟁 이후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마치 먼 나라 얘기 같이 생경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선생님의 온갖 정성을 다 들인 글로 한국전쟁의 실상을 알려주리라 믿습니다. 

이 글 연재 7회에 나오는 인민군의 따발총 사진이 좀 이상 하군요. 제가 갖고 있는 사진은 보시는 바와 같이 탄창이 방아쇠울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장착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촬영한 사진은 보시는 바와 같이 탄창이 방아쇠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실제 따발총인가 의심이 듭니다(한국 현행법상 발사가 가능한 총기를 전시 할 수 없어서 모조품을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런 상태라면 총알이 통과하는 총열이 너무 짧아 명중을 기대 하기가 어렵겠지요.

선생님 '글의 애독자'로 옥에 티가 될까 해서 드리는 제언입니다. 가능하면 새로운 따발총 사진으로 대체하여 주십시오.
Sunday, July 07, 2013 11:09 PM 워싱턴 근교 알렉산드리아 시에서
선생님의 글을 사랑하는 Jon Whang 드림

이분은 연재가 끝날 때까지 10여 차례나 메일함, 쪽지 함으로, 때로는 집 전화로 그때마다 내가 잘못 쓴 부분을 지적해 주거나 관련 사진을 애써 구해 전송하거나 격려해 주셨다. 이분 외에도 필리핀에 사는 한 동포도 쪽지 함을 통해 메일을 보내왔다.

선생님이 올리시는 <어떤 약속> 잘 읽고 있습니다. 제가 인터넷을 시작하게 되면 메일 체크한 뒤 선생님의 글이 올라왔는가를 가장 먼저 확인합니다. 보통 이틀에 한번 씩 올리시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매일 여러 번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
2013. 11. 15. 필리핀에서 Cedric Son 올림

묘향산(2005. 7. 24.).
 묘향산(2005. 7. 24.).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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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지키다

이밖에도 호주에서도, 일본에서도 전화나 메일로 격려를 보내오고 국내에서도 많은 독자들이 오류에 대한 지적과 격려의 말을 메일로 보내왔다. 70회 글에서 조선호텔 옆 '황궁우' 사진을 내 무식의 소치로 '팔각정'이라고 사진설명을 단 것을 이기원 사북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이 바로잡아 주시기도 했다. 아마도 온라인 연재의 매력은 바로 이런 저자와 독자 간의 실시간 상호 소통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이 자리를 빌려 그분들에게 깊이 감사를 드린다.

작품 연재 중 독자들이 어디까지가 실화인가 물었다. 이제 연재가 끝났기에 밝히는데 앞부분 약 30퍼센트는 실화이고 나머지는 픽션이다. 하지만 나는 실화 이상으로 주인공들과 대화하고 밥도 같이 먹고 여행도 같이 다녔다. 그들은 내가 창조한 분신이었다.

이제 이 후기조차 끝내야 할 때다. 정말 감사하고 고개 숙여 깊이 절을 드리고 싶은 분은 그동안 열독해 주신 오마이뉴스 독자이시다. 사실 이 작품을 시작하면서 가장 염려스러웠던 점은 연재 중에 흐지부지 중단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정말 고맙게도 독자 여러분의 뜨거운 사랑으로 1회부터 98회까지 예정보다 빨리 완주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여담은 이전 내 소설을 읽은 독자들은 "당신 글 속에 들어있는 훈장 냄새를 제거하라"고 충고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작품에서 두어 차례 진한 장면을 썼지만, 편집부에서 이를 걸러 내거나 '잉글'로 처리하였다. 하지만 그 회는 내 기대와는 달리 독자의 조회 수가 별로였다. 아마도 오마이뉴스 독자들은 수준이 매우 높아 진한 장면은 외면(?)하는 편인가 보다.

솔직히 나는 <어떤 약속>을 연재하는 6개월 동안 밥먹고 잠자고 화장실 가는 기본 생활에 소요한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은 이 작품에 쏟았다. 먼저 나 자신을 위해서 그랬다. 일흔이 되도록 연습(민주당 김한길 대표가 이전 방송인 시절 라디오 대담에서 한 말)만 하는 내 스스로가 가여웠기 때문이다. 다음은 숱한 제자들에게 실망감을 주지 않기 위해 낱말 하나 조사 하나에도 정성을 다했다. 그들은 우리 국어 선생님의 글이 엉망이라면 얼마나 허탈하겠는가.

1회부터 99회까지 문서 통계를 클릭해 보니 글자수가 약 340만 자요, 낱말이 8만1천여 개요, 원고지 1883장이었다. 나는 이들 글자와 낱말 하나하나에도 정성을 다했다. 그것은 이 글이 통일 제단에 올리는 제문과 같은 글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곧 분단 70년을 맞는다. 하지만 휴전선 철책은 아직도 요지부동으로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나의 보잘것없는 이 작품이 그 철책을 허무는데 이바지하고 남북통일 제단에 한 줄기 향불 연기가 된다면, 나는 이 땅의 한 작가로 더 이상 무슨 바람이 있겠는가.

이번에 오마이뉴스에 연재하는 원고는 지난 12월 1일 밤에야 모두 마무리하여 임시저장 기사함에 송고 대기시켜 놓았다. 그 이튿날 나는 조상님이 영원히 잠들고 있는 오대산 월정사 자장암 뒤 수목장으로 갔다. 나는 할아버지 유해가 묻힌 전나무 앞에서 마침내 <어떤 약속> 탈고를 고유했다.

"할아버지, 제가 고향 구미와 낙동강, 금오산을 배경으로 한 한국전쟁 이야기를 장편소설 두 권 분량으로 마침내 다 썼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통해 한 가정의 작은 통일을 그려보았습니다."
"그래, 애썼다. 중국의 양쯔 강(揚子江)과 같은 큰 강의 근원도 술잔을 띄울 수 있는 작은 시냇물이다."

할아버지는 흐뭇이 내 등을 두드려주신 듯했다. 나는 비로소 할아버지와 한 무언의 약속을 지킨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산했다.

이제 이 후기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 번 더 애독자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아울러 오마이뉴스 편집부기자에게도 감사와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 송고 전 몇 차례 퇴고한 뒤 보내지만 왜 화면에 뜬 뒤 그제야 오타나 오류가 보이는지? 송고한 뒤 몇 차례 거듭된 편집수정 요청에도 군말 없이 들어준 편집부 기자들에게 깊이 감사를 드린다.

나는 이번 연재가 끝나면 당분간 쉰 뒤에 어느 날 갑자기 신명이 나면 다시 의미있는 긴 이야기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뵙겠다는 약속을 드린다. 솔직히 나는 그동안 30여 권의 책을 펴냈지만 아직도 스무 살난 청년처럼 배가 몹시 고프다. 고향의 한 친구는 나에게 아래구미 누구는 총칼로 대한민국을 휘어잡았는데 상구미 장터에서 자란 너는 펜으로 평정해 보라고 우스갯소리 겸 덕담을 했다. 아마도 평생 평교사로 늘그막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구질구질하게 주변머리 없이 사는 백면서생에게 용기를 주고자 한 말일 게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는데 객담이 너무 길었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음 작품으로 미룬다.

독자여러분!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2013. 12. 14. 작가 박도 올림

백두산(2005.7. 23.)
 백두산(2005.7. 23.)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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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 끝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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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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