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비닐, 파리통,
그리고 또 무엇이던가?
아무튼 구질구레한 생활필수품
오 주사기
2cc짜리 국산 슈빙지
그리고 또 무엇이던가?
오이, 고춧가루, 후춧가루는 너무나 창피하니까
그만두고라도
그중에 좀 점잖은 품목으로 또 있었는데
아이구 무어던가?
오 도배지 천장지, 다색 백색 청색의 모란꽃이
다색(茶色)의 주색(主色) 위에 탐스럽게 피어 있는 천장지
아니 그건 천장지가 아냐 (벽지지!)
천장지는 푸른 바탕에
아니 흰 바탕에
엇걸린 벽돌처럼 빌딩 창문처럼
바로 그런 무늬겠다
아냐 틀렸다
벽지가 아니라
아냐 틀렸다
그건 천장지가 아니라
벽지이겠다
더 사로라는 건 벽지이겠다
그러니까 모란이다 모란이다 모란 모란······

그리고 또 하나 있는 것 같다
주요한 본론이 네 개는 있었다
비닐, 파리통, 도배지······?
주요한 본론이 4항목은 있는 것 같다
4항목 4항목 4항목······ (면도날!)
(1962. 5. 30)

<죄와 벌>은 김수영이 1963년 10월에 쓴 시다. 이 시 2연에는 제법 '살벌한' 폭행 장면 하나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우산대로 /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 비 오는 거리에는 / 40명가량의 취객들이 무여들었고 (2연 1~7행)

수영은 평소에 아내를 자주 핍박(?)했다. 위 시에 보이는 '살벌한' 폭행도 실제 사례였을 가능성이 높다. 수영은 폭설이 내려 '여편네가 들어오려면 애 좀 먹겠다'며 고소해 하는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자신의 아내를 향해 돈밖에 모르는 여자니 부정한 여편네니 하는 말도 내뱉기도 했다. 그가 아내를 부를 때 쓰던 '여편네'라는 비칭어(卑稱語)가 모든 것을 말해 준다.

그런데 유념할 게 하나 있다. 수영의 작품에 그려진 '아내'를 시인의 실제 아내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물론 작품 속의 '아내'가 실제 현실의 아내에게서 차용된 이미지를 갖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시에 등장하는 '아내'는 수영이 극복하려고 했던 현실성이나 세속성의 상징 인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수영 자신도 '여편네'를 "문학의 악의 언턱거리"로 이용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수영이 현실에서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는 술을 마실 때 폭음을 할 때가 많았다. 폭력적인 언사를 내뱉는 등 '마초'적인 주사 기질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는 아내를 위해 집안 일을 하기도 하는 등의 다정다감한 면이 있었다. 집에서 쉴 때는 음악과 그림을 감상하고, 추리소설을 읽는 등의 '여성스러움'(?)도 보여주었다.

때로 수영은 걸레로 마루를 닦기도 하는 자상한 남편이었다. 아내가 외출할 때에는 과감하게(?) 개수대로 달려가 설거지를 하기도 했다. 문인들은 물론 당시 그 어떤 남성도 쉬이 하지 못하는 행동이었다. 언젠가 소설가 최정희씨가 수영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수영은 손님을 맞아 부랴부랴 손을 씻고 나갔다. 하지만 그의 손에서는 퀴퀴한 행주 냄새가 풍겨나왔다.

이 시의 화자도 그런 수영을 많이 닮았다. 그는 아마도 아내 심부름으로 장을 보러 간 길인 것 같다. 그런데 사 오라는 물건 몇 개가 떠오르지 않는다. "구질구레한 생활필수품"(1연 3행)인 '주사기'와 '국산 슈빙지'(1연 5행)는 금방 기억해낸다. 하지만 "점잖은 품목"(1연 9행) 두 개가 어슴푸레하다. '비닐'과 '파리통'을 제외한 두 가지다.

그것들은 그가 사 가야 하는 '생활필수품' 목록에서 "주요한 본론"(2연 2행)이다. 다행스럽게도 먼저 한 가지가 떠오른다. '도배지'다. 그런데 그 용도가 '천장지'인지 '벽지'인지 헷갈린다. '벽지'와 '천장지'를 오락가락한다. '모란꽃' 무늬와 '벽돌' 무늬를 혼동하고, '푸른 바탕'과 '흰 바탕'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다. 그러다 간신히 결론을 맺는다. '벽지'!

마지막 하나는 무얼까? 쉬이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는 화자는 "4항목 4항목 4항목"(2연 5행) 하고 부르짖는다. 그 '4항목'이 없으면 "주요한 본론"의 목록이 완성되지 않아서일까. '4항목'을 되풀이하듯 외치는 모습이 거의 집착 수준이다. 그러다 드디어 기억해낸다. '면도날!'(2연 5행).

'면도날'은 날카롭다. 그 '면도날'로 시상을 끝낸 시인의 의도는 어디에 있을까. '면도날'에 느낌표를 달아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지금 아내의 심부름을 하고 있다. 지극히 일상적인 물건들을 챙겨야 한다. '자질구레'(1연 3행)하고 '창피'(1연 7행)하기까지 한 것들이다. 그러다가 떠오르지 않는 두 가지에 "점잖은 품목"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주요한 본론"으로 규정한다. 바로 지금 그가 가장 중시하고 있는 것들이다. 왜 그럴까.

'천장지'인지 '벽지'인지 혼동하는 '도배지'가 의심스럽다. 그것은 진실과 거짓이 뒤바뀐 현실, 정의와 불의가 착종된 세상의 혼란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그 '적'이, "나의 양심과 독기를 빨아먹는" <적>에서의 현실처럼, '천장지'인지 '벽지'인지 모를 것이 돼버린 전도된 세상을 함축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면도날'의 상징성은 명백하다. 그것은 왜곡되고 전도된 현실을 일도양단(一刀兩斷)하겠다는 다짐의 표현이다. 날카로운 '면도날'의 정신으로 세상의 정의과 불의를, 진실과 거짓을 명명백백하게 가려 보겠다는 의지를 표상하리라. 그러므로 잊지 않고 '면도날'을 사는(마케팅하는) 것은 '면도날'로 사는(생활하는) 것이다. 날카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마케팅>, #김수영, #<죄와 벌>, #김현경 여사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