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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정치> 표지.
 <전쟁정치> 표지.
ⓒ 도서출판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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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 김동춘(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이 '한국정치의 메커니즘과 국가폭력'이라는 '묵직한' 부제가 달린 책 <전쟁정치>를 내놓았다. 부제만 묵직한 게 아니다.

"지난 10년 동안의 나의 활동과 고민을 정리한 것"(10쪽, '머리말'에서)이라는 저자의 고백에 걸맞게, 이 책에는 해방 이후 반 세기가 넘는 동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벌어진 국가폭력의 스산한 살풍경과 저자 특유의 개념인 '전쟁정치' 메커니즘이 수많은 사례와 함께 총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가히 '대한민국 국가폭력 보고서'라 할 만하다.

"이 책은 한국의 정치가들이 제대로 입법하려 하지 않고, 검사들이 전혀 기소할 생각도 하지 않고, 언론도 주목하지 않는 과거와 현재의 국가범죄, 국가기관의 범죄와 공권력 남용에 대한 일종의 고발장이다. (9쪽, '머리말'에서)

이를 통해 저자가 의도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는 과거가 현재를 매개로 하여 미래로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어떤 국가와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인지를 밝히려 한다. 이 책 전체에서 '기억'의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되는 배경이다.

국가폭력, 희생자는 누구인가

국가폭력과 전쟁정치의 문제에서 '기억'이 중요한 까닭은 무엇일까. 저자가 보기에, 국가는 국민을 오직 복종해야 할 존재로 만들면서 지배자들이 설정한 틀에 맞지 않는 사람이나 집단에게 가혹한 폭력을 행사해 왔다. 이로 인해 고통 받은 무고한 국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데도 국가는 여전히 문제의 중심에 서 있다. 저자의 눈에 국가의 기본원칙인 정의를 어떻게 수립할 것인지는 여전히 중심 의제로 남아 있다.

왜 국가폭력을 기억해야 하는가. '국가폭력의 풍경들'(제1부)과 '전쟁정치의 매커니즘'(제2부)이 그 답을 말해 준다. 저자는 대한민국을 '국가폭력의 백화점'으로 비유한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갖가지 폭력의 사례와 그 폐해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회의감이 든다. 저자가 국가폭력의 여러 사례 중 하나로 제시한 삼청교육대를 통해 그 구체적인 이유를 알아보자.

1980년,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는 사회 '정화' 명목으로 삼청교육대를 세웠다. 그뒤 사회질서를 해친다고 의심되는 젊은이들이 희생양이 되었다. 모두 6만755명이 검거되었다. 이들은 뚜렷한 증거도 없이 '재범 우려자' '주민의 지탄을 받은 자' 등으로 자의적으로 분류되었다. '폭력 범죄'로 분류된 사람은 4만9066명으로 전체의 80퍼센트였다. 하지만 이들 중 2만1839명은 전과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권력자의 짐작에 의해서 폭력적인 순화교육을 받았거나, 그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85쪽)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될까. 흔히 정치적으로 위험한 사상을 갖고 있거나, 실제로 국가·사회에 적대행위를 한 사람들이 희생자가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저자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동안 국가폭력의 표적이 된 사람들이 모두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대한민국에 비판적인 반체제 인사 혹은 위험한 사상의 소유자라는 판단은 매우 일면적이다. 실제 박정희 정권 아래 반공법, 긴급조치 위반자도 학생보다는 정치 문제에 관심이 없던 일반인이 더 많다. 2007년 진실화해위는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건 589건을 모두 조사했는데, 그중 282건(48퍼센트)이 음주 대화나 수업 중 박정희와 유신체제를 비판한 경우로 가장 많았다." (105쪽)

이 때문에 국가는 수시로 자신들의 폭력적인 공권력 행사를 숨기고 왜곡하려 한다. 저자는 범죄를 저지른 국가기관의 태도가 통상의 범죄자들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증거 인멸과 은폐, 피해자나 목격자에 대한 공갈과 협박, 말 바꾸기, 피해자 무력화, 매수 등 온갖 비열한 방식이 모두 동원된다. 저자에 따르면, 저항세력에 대한 공권력 행사와 사건 후 처리 방식은 지난 60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대체로 다음과 같은 방식이다.

저항이 발생하면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공권력을 투입하기→ 투입 전후에 정부의 공식 경로와 언론을 통해 저항세력을 '폭도', '반정부·폭력·테러 세력' 등으로 낙인을 찍어 국민과 분리하기 → 투입된 군경 지휘관과 수사기관 담당자에게 성과 압박 가하기 → 문제 발생 시 부인하기 → 진실 은폐와 본질 왜곡하기 → 관행·급박한 상황 등을 들어 변명하기.

가령 지난 철도노조 파업 기간 중 노조 집행부를 검거하기 위해 민주노총 사무실을 침탈한 경찰의 행태를 상기해 보자. 정부와 여당, 보수언론은 철도노조와 그들의 파업에 '귀족 노조' '철밥통 지키기' '불법파업' 등의 딱지를 붙였다. 철도노조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검거하는 경찰에게는 1계급 특진이라는 '현상금'이 주어질 예정이었다. 5천 명이 넘는 경찰을 동원한 폭력적인 과잉 진압이 어떤 매커니즘 속에서 이뤄지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군경에 성과주의를 도입하여 경쟁을 시키거나 실적이 없으면 문책을 하는 것은 일제 시대와 해방 이후 한국 경찰과 군이 시작될 때부터 있었다. 일제는 의병 토벌, 창씨개명, 불령선인 체포 등 통제를 위해 관리나 경찰에게 가혹한 실적 경쟁을 시켰고, 그 희생양은 바로 민간이었다. (156쪽)

이보다 더 본질적으로 심각한 문제는 국가폭력의 매커니즘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물리적인 폭력만 폭력으로 생각하는 경향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폭력을 재정의할 것을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잘못이 없는 사람을 법적 기소와 판결로 고통스럽게 하는 사법부, 무고한 사람을 재판 이전에 죄인으로 매도하여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언론, 국가폭력을 노골적으로 부인하거나 틀린 사실을 전달하는 교육기관 등도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다.

또한 저자는 피에르 부르디외가 '상징폭력'이라고 부른 현상들, 특정 집단 차별을 정당화하고 구성원들이 그것을 내면화하면 그것도 폭력이라고 말한다. '노동자'나 '노조'를 '폭력집단'이나 '종북'으로 몰아세우며 집단적 '왕따'를 유도하는 것이 그런 예가 아닐까.

"1987년까지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던 국가는 민주화 이후에는 문화적 폭력, 상징폭력의 주체로 변신했다. 구조적·문화적·상징적 폭력은 당장 신체에 상처를 남기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피해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등 실질적인 고통은 결코 약하지 않다." (169쪽)

이 책의 핵심 개념인 '전쟁정치'가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저자에 의하면, '전쟁정치'는 국가 내부의 노동·빈민세력, 비판적 지식인이 내전 중의 절대적 적(absulute enemy)처럼 취급되고, 이들을 제압하여 무력화하는 일이 국가의 일차적 활동 목표나 정치적 실천으로 간주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저자는 극단적인 전쟁정치가 '법의 폭력화'로 행사된다고 주장한다. 전쟁이나 준전쟁 시기, 지배집단이 정치적 위기에 발동하는 각종 긴급조치나 명령, 폭력적 법이나 명령의 발표, 주민 통제, 불법 체포와 고문, 학살 등이 그것이다. 은밀한 국가테러, 공권력의 위법한 집행, 시위에 대한 과잉 대응, 사법적인 차원에서의 노골적 위법성과 편향성, 특히 검찰의 선택적 기소 등은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완화된 전쟁정치의 사례들이다.

여기에서 국가폭력을 '기억'해야 하는 당위성, 이를 위해 우리가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드러난다. 저자는 인간성을 말살한 국가 숭배, 전쟁, 폭력, 독재, 고문, 강제추방, 배제, 차별이 나타나게 했던 바로 그 권력의 매커니즘, 법과 제도, 관행, 그러한 문화가 온존한 상태에서 전쟁과 학살, 고문과 테러를 과거의 우연한 일회적 사건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집단 기억의 문제를 우리의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이자 인간성 말살을 거부할 수 있는 주체의식·시민의식·정치의식의 일부로 보는 것이다.

"법과 제도, 평균적인 시민 의식 넘을 수 없어"

저자가 보기에 기억은 해방의 수단이며, 망각은 잊힌 것을 합리화하는 움직임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된다. 현실 정치에서는 망각을 유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필요한 기억은 만들어내고 불편한 기억은 의도적으로 지워버리기도 한다. 저자는 이를 '기억의 오염', 혹은 '기억의 조작'으로 부른다. 그래서 저자는 과거의 국가범죄를 모르는 것,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잘못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세력의 등장을 도와주는 것이고 나아가 죄를 범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아주 작은 부정일지라도 우리 각자가 정치 공동체 내의 시민권자로서 혜택을 입고 있다면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 세월이 지난 후 과거의 독재자를 비난하는 것으로 그 독재자 밑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책임이 모두 면죄되는 것은 아니다. 독재자가 독재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중의 침묵과 동조가 있어야 한다. ··· 반드시 가해 측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의로운 일을 한 이웃이 고통 받을 때 침묵하거나 그들을 돌보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 부끄러움은 느껴야 한다." (300~301쪽)

저자는 이와는 또 다른 방향으로 국가기관의 민주화를 강조한다. 저자가 보기에 한국인에게 제일 익숙한 정의 수립 방식은 문제 인물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인적 청산이다. 이보다 더 본질적인 방식은 정의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법과 제도를 없애고, 그것을 위해 정치적 민주화를 밀어붙이며, 정부기구를 민주화하는 일이다.

저자는 그와 같은 민주화의 가장 일차적인 과제를 국민의 통제권 밖에 있는 수사정보기관의 활동을 제한하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제 시기와 민주화 이후 여전히 크게 변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기무사, 국정원, 경찰 내 공안부서와 공안검찰 등이 그 대표적인 표적이다. 저자는 이들이 일제 식민지 시기와 해방 이후 지금까지 가장 강한 연속성을 갖고 있는 조직이라고 말한다. 국정원개혁안을 둘러싸고 벌어진 최근의 격렬한 논란도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심각한 사회갈등, 자살, 폭력 등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저자는 이들이 자발적 승복이 아닌 강압과 폭력의 언어로 지탱되어온 치안·안보국가의 전쟁정치 매커니즘이 민주화 이후 새롭게 등장한 경쟁지상주의·효율지상주의의 기업국가·기업사회와 최악의 조합을 이룬 결과라고 말한다. 전쟁정치 매커니즘이 쉽게 없어질 수 없는 이유다.

우리에게 희망은 있기나 한 걸까. 다음과 같은 저자의 간절한 외침을 통해 찬찬히 가늠해 보기 바란다.

"권력과 자본의 폭력, 반인도적이고 부당한 행위를 묵인하거나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한, 경쟁과 출세 때문에 부당한 일을 비판하거나 분노할 여유조차 없는 사람이 다수이고 부정의한 일을 한 사람이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한, 우리는 정의로운 세상을 건설할 수 없다. 지역 공동체, 학교, 종교단체, 직능단체 등 시민사회 일반에서 기억, 공감, 책임의식을 함양하는 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어떤 법과 제도도, 어떤 사회운동도 교육과 미디어, 그것에 의해 주로 만들어진 평균적인 사람들의 의식을 넘어설 수 없다." (302쪽)

덧붙이는 글 | <전쟁정치> (김동춘 지음 | 도서출판 길 | 2013. 11. 30 | 333쪽 | 25,000원)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전쟁정치 - 한국정치의 메커니즘과 국가폭력

김동춘 지음, 길(2013)


태그:#<전쟁정치>, #김동춘, #도서출판 길, #국가폭력, #국가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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