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세상물정의 사회학> 겉표지
 <세상물정의 사회학> 겉표지
ⓒ 사계절

관련사진보기

우리는 '세속'이란 단어를 그리 밝게 보진 않는다. 오물이 묻은 느낌이 있다. 너무나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감추고 싶고, 의식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민낯이 드러난다고나 할까.

은연중에 자신이 세속에 살고 있기를 거부하는 발버둥 같은 것. 그러나 어쩌리오. 인간사 다 그런 걸. 스스로 세속에 살고 있음을 인정하는 순간, 고결함에 한껏 힘을 준 어깨가 푹 꺼지지나 않을까. 사서 걱정이다.  

그렇게 세찬 풍파를 만나 심신이 지친 사람들은 어쩌면 자인하고 싶지 않을 뿐인지도 모른다. 열심히 스스로를 독려하지만 쉬이 나아지지 않는 세상살이는, 비록 자기만족일지라도 '세속'과는 심리적 거리를 두려하는 게 아닐까. 차라리 조금은 세상이 어두움을 인정하고 세속에 몸과 마음을 맡겨보면 홀가분해질 것을.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보이면서 말이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도 있지만, 짐승만도 못한 인간도 있는 법이다. 이러한 세속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삶의 리얼리티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환등상의 등불을 끄게 만드는 힘의 근원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유토피아적 희망, 소박하게 말하자면 좋은 삶에 대한 기대는 약간은 가슴 쓰라린 세상의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세상물정의 사회학> 프롤로그에서)

힐링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미 성공한 자들의 세상을 향한 아우성은 태반이 결국 자기자랑으로 귀결된다. 남는 건 박탈감이요, 얻는 건 무력증이라.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 말하고, 세속에 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사람이 듣는다. 그래서 그 순간은 모르지만, 환상의 시간이 끝나면 결국 다시 고민은 시작된다.

담배를 끊고 싶다면, 당장 텔레비전을 꺼라

한편으론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란 표현이 말해주듯, 마냥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적당한 타협점이 필요하겠다. 아주대 노명우 교수의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그런 고민의 흔적이다.

'세상에는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서기에 함량 미달인 사람이 너무도 많다'며 여론이 가진 고결함에 어퍼컷을 날린다. 와장창. 그래서 그는 담배를 끊고 싶다면, 먼저 텔레비전을 끄라고 충고한다. 스트레스 때문에 결코 담배를 끊을 수 없을 것이라며. 여론을 형성하는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에 대한 지극히 세속적인 시각이다. 무슨 박사니, 교수니 다 벗겨놓고 보면 한없이 세속적인 인간이 남는다.

그에게는 앞에 마이크가 놓여 있고, 자신이 쓴 글이 신문에 인쇄되어 독자에게 배달된다는 사실 자체만 중요하다. 그의 말과 글은 여론의 힘으로 정치를 올바르게 바로잡겠다는 의지보다는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고 싶은 나르시즘의 욕구와, 혹여 권력자의 눈에 들어 이른바 '한 자리'를 차지하는 바탕이 되었으면 하는 심산에 의해 지배된다. 많은 칼럼은 사실상 공직을 구한다는 이력서에 가깝기도 하다. (<세상물정의 사회학> 본문 72~73쪽)

여론 자체에 대한 현실적인 해석도 덧붙는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다. 사실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타인의 의견에 관심을 가지기 결코 쉽지 않다. 이미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자기의 생각이 모세혈관을 타고 사회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가기를 원할 뿐이다. 들어서 뭐하겠는가.

독재자는 여론 수렴이 아니라 명령을 좋아하고 토론보다는 연설을 즐긴다. 파시스트 독재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신자유주의적 독재자는 경제적 효율성을 구실로 삼는다는 점은 다르지만, 여론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에 따라 법을 만들고 정치를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세상물정의 사회학> 본문 74쪽)

계급을 담는 취미를 진정한 취미라 부를 수 있을까

인간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장소에서 온전한 청교도적 삶은 갈망의 대상이 될지는 몰라도, 현실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하여 종교 지도자의 생활을 칭송하고 어떤 모범으로 설정하는 이유도 그에 있다. 내 손에는 결코 잡히지 않기에.

상아탑이라는 성소에 콕 박혀 세상과 담쌓고 짐짓 고상한 이론만 늘어놓을 수 없다. 그러기엔 세상은 너무 세속적이 됐다. 이제는 세상, 좀 거칠게 말하면 '세속'에 나와야만 하는 교수들이다. 사회학자의 세속에 대한 자조적 성찰은 계속된다. '취미인간 오타쿠를 위한 변명'이란 부제가 붙은 '취미'편을 보자.

취미에 대한 그의 세속적 해설은 날카롭다. 취미는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스스로의 기호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종의 놀이다. 특별한 취향이 없는 사람은 취미도 없다. 지극히 개인적인, 하여 한 개인의 취미가 성립하기 위해 타인의 시선은 필요가 없다.

그러나 취향이 사소한 기호의 차이가 아니라 계급적 지위를 담기 시작하면, 상황은 급변한다. "필드를 간다"는 게 운동을 좋아하는 취미가 아니라, '돈 좀 벌었다'는 상징으로 해석된다. 공부 좀 한 사람은 대중가요보다 오페라와 클래식 감상을 한다. …그래야만 한다.

트렌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혹은 트렌디한 취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개인의 내면을 성찰하는 것보단 백화점을 부지런히 들락거려야 한다. 그 편이 더 빠르고 쉽다. 자발성은 사라진다. 그렇다면 우린 이 행위를 '취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세상물정 알기 위해서, 세속을 살아가기 위해서

<세상물정의 사회학>에 등장하는 25가지 키워드
상식 - 상식의 배반, 양식의 딜레마
명품 - 럭셔리라는 마법의 수수께끼
프랜차이즈 - 맥도날드에 대한 명상
해외여행 - 선진국이라는 유령
열광 - 열광이라는 열병
언론 - 여론의 흥망성쇠
기억 - 역사라는 이름의 공허한 기억
불안 - 위험은 기술을 먹고 자란다
종교 - 자본주의가 종교를 만날 때
이웃 - 나 홀로 고스톱
성공 - 자기계발서의 장르 규칙
명예 - 명예의 기원
수치심 - 수치심, 자기통제의 덫
취미 - 취미인간 오타쿠를 위한 변명
섹스 - 문제적인, 너무나 문제적인
남자 - 남자다움의 리얼리티
자살 - 그리고, 자살은 계속되고 있다
노동 - 임금노동의 운명
게으름 - 노동과 게으름에 대한 불편한 진실
인정 - 인정받고 싶은 당신
개인 - 상처받은 개인
가족 - 가족이라는 운명과 화해하는 방법
집 - 고물상 강 씨네 집을 위하여
성숙 - 배운 괴물들의 사회
죽음 - 죽음에 대한 성찰

'너무 현실적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사회학이 '세상물정'을 알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는 데부터 시작해야 한다.

거기서부터 치유가 시작된다. 사회학자들의 이런 시도는 가벼운 사유라 할 수 있지만, 위로가 필요한 사회에 던지는 첫 출사표가 되기를 소망한다. 언제까지 '눈 가리고 아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당신의 고통은 당신 탓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는 고통에 당신은 책임이 없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당신 마음 속의 고통을 끝없이 만들어 내는 어떤 존재가 있다. 그 어떤 존재를 우리는 '콜드 팩트'라 부를 수 있다. 그렇기에 상처받은 삶은 상처받은 사회를 치유하지 않은 채 치유될 수 없다. (<세상물정의 사회학> 에필로그에서)

집필 또한 굉장히 '세속적'으로 했단다. 버스 안에서, 지하철 안에서, 카페에서. 차례대로 읽을 필요도 없다. 주제가 나오고, 자유로운 사유를 해나간다. 차례를 보며 먼저 읽을 주제에 해당하는 쪽을 미리 접어두고 읽었다. 틈틈이 집히는 데로.

사회에 여백을 던져주는 일도 학자의 몫이란 생각이 든다. 테두리의 설정은 남겨두고, 독자의 생각으로 그림을 그려나가는 일. 고상할 필요도, 예쁘장할 필요도 없다. 생각에서는 남 시선일랑 접어두고 맘껏 세속적이 되어보자. 저자의 말이 옳다면, 차라리 그편이 희망을 위해 나은 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세상물정의 사회학>, 노명우 지음, 사계절 펴냄, 2013.12, 1만6천8백원



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사계절(2013)


태그:#세상물정의 사회학, #노명우, #사계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