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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 변화가 감지된 건 그날의 접촉 이후, 20여 년이 흐른 뒤였다. 때는 1989년의 어느 햇살 좋은 봄날 오후. 바깥 날씨와 담을 쌓은 시립도서관의 지하 시청각실은 퀴퀴한 냄새와 축축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우주를 배양할 듯한 혼돈의 기운 속에서 나는 그 녀석을 만났다.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도 구석에 처박힐 시기쯤 되어야 시립도서관에서 인심 쓰듯 공짜로 상영해준다는 그 영화들 가운데, 하필 그날 나의 눈에 띄었던 영화가 바로 E.T.(The Extra Terrestrial)였다.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르는 자전거 바구니 속에서, 순간적으로 강렬하게 나를 향하던 녀석의 눈빛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나를 대신해서 지구를 지켜야 하는 건 바로 너야.'

녀석의 간절한 메시지는, 삐거덕거리는 시청각실용 의자에 파묻혀 반쯤 졸며 영화를 보던(공짜 영화의 관객들은 대개 불성실하다) 나에게 전기 충격처럼 전달되었다. 퀴퀴하고 축축한 혼돈의 공기를 가르며 날아와서 내 미간을 통해 온몸에 퍼진 정체모를 기운. 그땐 그 의미를 진정 몰랐었다.

20년 후, 복부팽창이 시작되었다

영화 < E.T >의 한 장면.
 영화 < E.T >의 한 장면.
ⓒ 유니버셜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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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 그 메시지의 의미를 몸은 이미 느끼고 있었을까? 다만, 워낙에 천천히 진행된 일이어서 내 몸의 주인인 나조차도 깜빡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과 녀석의 치밀함에 혀를 내두를 뿐이다. 지난 20년간 내 머리는 조금씩 커지고 있었으며, 두 팔은 앙상함을 유지했고, 짧은 다리 탓에 새로 사는 바지마다 수선집을 거쳐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녀석과의 싱크로율의 정점인 복부팽창이 시작되었다.

물론 외계의 시간을 기준으로 보면 불과 20년이라는 티끌 같은 시간 속에 이루어진 변태의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앞으로 20년쯤 더 지나면 초능력 유전자가 발현되어 손가락 끝에서 레이저가 발사되고, 녀석의 바람대로 지구를 지키는 어벤져스의 대열에 합류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중차대한 업무를 맡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다.

복부팽창 이전에도 유달리 앞뒤가 긴 머리 형태 때문에 '에일리언'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으나, 주변에 적지 않은 화성인들 덕분에 크게 주목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치 복수가 차듯 날이 갈수록 눈에 띄는 복부 팽창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다. 가끔씩 손가락 끝으로 배를 누르며 교감을 시도하는 아이들(혹은 외계의 첩보원들)이 나타날 때마다, 커밍아웃의 시기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왔다.

E.T의 저주, 어찌 지울 수 있을까

가슴을 비롯한 나머지 골격은 그대로인 상태로 복부만 팽창하기 시작했다면 당신도 어릴적 E.T의 메시지를 읽은 것이 분명하다.고무줄 체육복 위로 기어오르는 엄청난 생명력을 보라!
▲ E.T.형 몸매 가슴을 비롯한 나머지 골격은 그대로인 상태로 복부만 팽창하기 시작했다면 당신도 어릴적 E.T의 메시지를 읽은 것이 분명하다.고무줄 체육복 위로 기어오르는 엄청난 생명력을 보라!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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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와 우주의 존재를 넘나드는 심오한 고민 끝에 결국, 내가 선택한 길은 어벤져스의 일원으로 합류하기를 거부하는 것이었다(물론, E.T처럼 민첩성과 기동력이 떨어지는 멤버를 원치 않을지도 모르지만). 녀석의 신내림(?)을 강하게 거부하고, 평범한 지구인으로 남아 가족과 친지들과 소박한 삶을 꾸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런데, 결심만 한다고 일이 마무리되는 건 아니었다. 점점 변해가는 체형을 더 이상 숨기기도 어렵고, 주위 사람들이 하나 둘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녀석은 나뿐만 아니라, 당시 영화를 봤던 사람들 중 비교적 순수한 영혼을 가진 소년소녀들에게 마구잡이로 메시지를 뿌렸던 것 같다). 임신 가능성을 의심하는 눈치 없는 종족들도 있고, 간의 건강을 걱정해주는 온정적인 행태를 보이는 이들도 있지만, 아예 대놓고 검지 손가락을 들이미는 호전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점차 주변에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내 몸속에 번식 중인 외계 유전자의 뿌리를 뽑아야지만 변이를 저지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뽑아낼 것인가? 지난 20여 년 간, 과도한 음주와 흡연에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꾸준히 버텨온 유전자 변이를. 미세먼지, 전자파, 교통 사고에 불산까지, 각종 위해 자극에도 끄떡없는 이 E.T의 저주를, 어찌 지울 수 있느냐 말이다.

우선, 나라는 존재를 분석해본다. 일단, 움직이는 거 싫어하고, 즐기는 운동 전혀 없으며, 창자가 찢겨나갈 정도로 먹어줘야 뭔가 충실하게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들고, 한 끼라도 굶으면 아프리카 식인 부족의 전사처럼 포악하게 돌변하고, 늘 남의 떡이 커 보이는 식탐을 가지고 있으며, 주 2회 정도는 육류섭취를 통해 씹는 맛을 되새기는 전형적인 복부비만에 내장비만 스타일이다.

그런 내가 어찌 E.T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나말고 그 당시 메시지를 읽은 숱한 사람들이 버젓이 '나는 E.T의 후예입니다'라고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사실, 턱살 때문에 고개를 숙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데, 너 따위가 뭐라고 감히 신내림을 거부하는가? 자연스레 나타나는 몸의 변화를 인정하고, 지구 방위대로 살아가면 간단한 일 아닌가?

"당신 뱃살 때문에 우리 사이가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야"

173cm의 키에 70킬로그램은 정상에 가깝다고 생각했으나, 팔다리와 뱃살의 비율까지 고려해 넣지 못하는 큰 실수를 범한 생각이었다.
▲ 현재 나의 체중 173cm의 키에 70킬로그램은 정상에 가깝다고 생각했으나, 팔다리와 뱃살의 비율까지 고려해 넣지 못하는 큰 실수를 범한 생각이었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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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유혹과도 같은 E.T와의 협상에서 그래도,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이성의 손을 들어준 결정적 계기는 바로 아내의 한마디였다.

"당신의 뱃살 때문에 우리 사이가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야."

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어휘의 선택이란 말인가. 아내의 사랑(?)없이는 단 하루도 살지 못하도록 길들여진 나에게 이러한 벼락같은 일침은 용돈을 끊겠다는 엄포보다 몇 갑절은 두려운 선전포고였다.

그래서 지금부터 뱃살을 빼볼까 한다. 이름 하여 꽃중년을 위한 뱃살빼기 프로젝트. 세상에 차고 넘치는 이런저런 다이어트 책자나 노하우들을 참고는 하되, 최대한 내 방식대로 진행해 보고자 한다. 내 방식이라 하면, 가급적 덜 꿈지럭 거리고, 최저 비용에, 생활의 경계 안에서 진행할 수 있는 미니멀한 방식으로.

어설픈 체형들은 따라하지 마시라(살짝 나온 똥배는 애교로 충분히 넘어갈 수 있다). 나는 식스팩을 만들려는 게 아니다. 다만, 내안에 살고 있는 또 하나의 존재인 E.T를 추방하려고 하는 것이다. 학창 시절의 55kg 몸무게로 돌아가려는 것도 결코 아니라는 걸 미리 밝혀두고 싶다. 지금 현재 몸무게는 69kg, 허리 싸이즈 34인치. 목표는 몸무게 63kg, 허리 싸이즈 30인치.

물론, 실패한다고 누군가에게 피해줄 일 없으며, 앞서서 나간 자의 책임감 때문에 스스로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성격은 더더욱 아님을 미리 공지하는 바이다.

(2편에 계속)


태그:#뱃살빼기, #E.T, #체중감량, #어벤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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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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