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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벚꽃 터널
 섬진강 벚꽃 터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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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다녀가시오

"좀 쉬세요."

각종 수치를 점검한 의사는 진단을 내렸다. 기계도 무리하면 탈이 나는데 나는 그동안 내 몸을 혹사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쉴 수가 없었다. 하던 작업을 마무리 단계에서 쉬어버리면 자칫 탈고 못한 원고로 남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먹어가며 원고를 탈고한 뒤 출판사로 보내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몸에 감사할 일이다.

"선생님 보고 싶소."
"한번 다녀가시오."

올 해 들어 여수시 율촌면 여흥리에 사는 스승의 아들 내외가 번갈아 한번 다녀가라고 초대한 목소리가 그제야 귓전을 맴돌았다. 나는 그때마다 하던 일을 끝내면 가겠다고 언약했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가을에 만난 전주에 사는 한 사진작가가 전주시 서학동 예술인마을에 '서학동사진관(Photogalley & Cafe)'을 연다고 초대했다. 척박한 지방도시에 문화공간을 마련한다는 그 용기에 한 마디 덕담이라도 들려주고자 그곳도 들르기로 했다.

4월 1일 1차 탈고된 원고(미군정기)를 출판사로 넘김 뒤 다음날 아침 원주에서 전주행 시외버스에 올랐다. 남도로 가는 차창 밖은 온통 봄꽃으로 뒤덮였다. 개나리와 목련, 진달래, 벚꽃, 복사꽃, 배꽃 등 봄꽃들이 일제히 자태를 뽐내는 경연장으로 '봄꽃의 향연'을 이루고 있었다.

전주 '서학동사진관'
 전주 '서학동사진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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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동사진관(Photogalley & Cafe)'

시외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산과 들의 흐드러진 봄꽃들을 두리번거리며 완상하는 새 전주에 이르렀다. 서학동 골목 속의 '서학동사진관(Photogalley & Cafe)'을 찾아 작가 김지연(66)씨와 잠시 차담을 나누었다. 광주 태생인 그는 애초 연극무대에 섰다가 쉰이 된 나이에 카메라를 손에 잡았다고 했다. 그의 카메라 앵글은 생활 속의 정겨운 모습들에 주로 포커스를 맞췄다는데, '정미소' '이발소' '묏동(묘지)' '우리동네 이장님은 출근 중' 등 우리 가 사는 언저리의 친숙한 풍경을 즐겨 담았다.

나는 주인이 내주는 새빨간 오미자 한 잔을 마신 뒤 전주역으로 가서 남행 열차는 탔다. 이전에 벚꽃이 만발한 섬진강 강변길을 열차로 타고 자나면서 살아생전 언젠가 꼭 한 번 벚꽃이 피는 계절에 그 꽃 터널을 지나고 싶다는 소망을 품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례구역에 내린 뒤 역 앞 밥집에 쓰인 '재첩국밥'이라는 메뉴가 나를 유혹하여 미리 저녁밥을 먹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사시던 부산 집에 가면 이른 새벽마다 들려오던 "재첩국 사이소"라고 외치던 그 정겨운 섬진강 하동 아지매의 목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를 추억하며 재첩국을 먹자 담백한 맛에다 청양 풋고추를 넣은 탓으로 맛이 알싸하고 상큼했다.

서학동사진관 주인이 알려준 강변 민박집으로 전화를 했다. 하지만 때가 때인지 민박집 주인은 선약 손님으로 빈 방이 없다고 하여, 몇 해 전 호남의병전적지 답사 때 하룻밤 묵은 적 있는 화엄사 들머리 산장을 찾았다.

나는 지방 여행 중 잠자리는 가능한 모텔을 피하고 있다. 시골에서조차도 도시냄새를 풍기는 그 오묘한 분위기가 몹시 싫었기 때문이다. 그새 일만 원이 인상된 숙박료를 청구하기에 몇 해 전 묵고 갔다는 실없는 얘기를 하자, 산장 주인은 그때 요금 그대로 받겠단다. 따뜻한 온돌방에서 지리산의 깊은 숨소리를 들으며 단잠을 잤다.

구례장터, 봄나물로 가득하다.
 구례장터, 봄나물로 가득하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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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꽃 터널

이튿날 이른 아침 화엄사 계곡 물소리에 잠이 깼다. 나는 호남의병지 답사로 여섯 차례나 고을 고을을 누빈 탓으로 아는 분들이 많다(주로 의병장 후손). 애초 여행을 떠날 때는 그분들을 찾아뵈려고 하였지만, 바쁜 분들에게 폐가 될 것 같아 만나려던 생각을 접고, 출발 전 선약해 둔 약속도 취소했다. 애초 주목표로 잡았던 스승의 무덤을 찾고자 이른 아침 아드님에게 전화를 하자 언제라도 좋다고 하여 그날 낮 12시 순천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새 두어 시간 섬진강 꽃 터널을 완상하고자 구례장터에서 국밥을 먹은 뒤 구례버스정류장에서 벚꽃길이 가장 좋다는 하동행 농어촌마을 버스를 탔다. 하동으로 가는 도중 송정마을에 이르자 섬진강 강변 좌우의 벚꽃 길이 절정으로 선경을 이루었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오자 버스기사는 나그네를 내려주며 거추장스러운 가방을 자기자리 곁에다 두라고 하면서 정확히 45분 후 그 정류장에 서 있으라고 했다.

섬진강과 벚꽃, 그리고 물새들
 섬진강과 벚꽃, 그리고 물새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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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침내 짐에서 해방되어 카메라만 들고 언저리 꽃 경치에 셔터를 부지런히 눌렀다. 벚꽃과 섬진강, 그리고 모래톱과 물새… 참 기가 막힌 풍경이었다. 조금 전 기사가 그랬다.

"우리 호남이 개발이 늦은 탓에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지요."

어제(2일) 열차를 타고 오면서, 오늘(3일) 현장에서 보는 섬진강은 아직 옛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개발은 능사가 아니다. 자연 그대로의 산하는 뭇 생명들의 보금자리요, 평안한 삶의 공간이요. 쉼터이다. 섬진강이 지난 정권에서 4대강 개발사업에 들지 않은 것은 정말로 축복이다. 아마 개발이 되었더라면 섬진강 명물 재첩도 사라졌을 것이다.

스승의 무덤 '중동고등학교장 박철규의 묘' 앞에 그 시절의 이야기를 쓴 졸작 '제비꽃'을 바치다.
 스승의 무덤 '중동고등학교장 박철규의 묘' 앞에 그 시절의 이야기를 쓴 졸작 '제비꽃'을 바치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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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무덤에 내 작품집을 바치다

낮 12시 순천터미널에서 머리가 하얀 아드님을 만나 순천만이 바라보이는 한 밥집에서 점심을 든 뒤 곧장 스승의 무덤으로 갔다. 대부분 사람들은 저 잘난 듯이 뻐기지만, 사실은 부모와 스승이 그를 잘나게 만든 것이다.

1961년 나는 고향 구미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실력부족으로 전기고교에서 낙방을 한 뒤 후기 고교인 중동고교에 응시했다. 첫 시간은 국어 시험이었는데 답안지를 다 메운 뒤 두어 번 쓴 답안지를 확인을 해도 시간이 남았다. 그제야 감독교사를 바라본 순간 그 선생님이 대단히 멋있게 보였다. 짙은 남색 싱글에 곱슬머리, 훤칠한 키, 후리후리한 키 등….

만년의 박철규 선생님 모습(시집 최후의 이야기 표지)
 만년의 박철규 선생님 모습(시집 최후의 이야기 표지)
ⓒ 박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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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 내가 이 학교에 입학한다면 저 선생님의 사랑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그렸다. 나는 다행히 그 학교에 입학했고, 그분은 박철규 국어선생님으로 고1 때 만나게 되었다.

박 선생님은 첫 시간부터 내 이름을 기억해 주셨고, 이후 문예반 지도교사로, 교지편집 지도교사로, 대학을 졸업한 뒤 내가 교단에 서자 박 선생님은 중동고등학교 교장으로 승진하여, 나를 모교 교사로 특별히 불러줬다. 아무튼 오래도록 각별한 사제의 정을 이어왔다. [관련기사 : 하늘로 띄우는 편지]

한번은 내가 학교에서 퇴직 후 강원 산골에 내려와 어깨통증으로 강원도 시골 안흥병원 물리치료실에 누워 있는데, 아흔이 넘으신 선생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선생님은 천리안으로 내 모습을 보시는 듯. "박군 용기를 잃지 말라" "족적을 남겨라" … 선생님의 음성은 그때 좌절에 빠진 나에게 크나큰 용기를 줬다. 선생님은 말씀만으로 채찍질을 하는 게 아니라 두루마리 한지에 그 말씀들을 붓글씨로 적어 보내기도 했다.

핸들을 잡은 아드님과 이런저런 추억담을 나누는 새 여수시립공동묘지에 잠드신 스승의 무덤에 도착했다. 나는 고교시절 단짝친구의 이야기를 소설화한 '제비꽃' 작품집을 스승님 무덤 앞에 바친 뒤 한참동안 고개를 숙였다.

"박도, 먼 길 찾아줘 고맙다."
"늦게 찾아봬서 죄송합니다."
"박군, 족적을 남겨라."
"예, 선생님."

이승에서 마지막 작별인사를 드리다(돌아가시기 1년 전 2006. 8.).
 이승에서 마지막 작별인사를 드리다(돌아가시기 1년 전 2006. 8.).
ⓒ 권태균(당시 월간 중앙 사진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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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님은 돌산대교와 여수시내를 안내를 하며, 저녁은 며느님이 손수 지은 밥을 꼭 대접하고 싶다고, 당신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가라고 간청했다. 아들 내외는 71세에 당신 곁으로 낙향하여 98세 때까지 그 아버님을 27년간을 봉양한 '하늘이 내린 그 효부(생전 선생님의 말씀)'에게 나마저 밥 한 끼라도 대접받는 게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관련기사 ; 시아버님을 27년간 봉양한 며느리]

마침 여수 시내 관광 중 '여수여객터미널'이 보이기에 나는 차를 세운 뒤 한려수도를 배를 타고 삼천포나 통영으로 가겠다고 거기서 내려 작별했다. 1966년 여름, 대학시절 친구와 함께 여수에서 밤배를 타고 삼천포로 갔던 추억이 아련히 남아 있기에 그 길을 다시 '구름에 달 가듯이' 여행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객터미널 매표소로 가자 이즈음은 승객이 없어 한려수도 뱃길은 없어지고, 가까운 섬에만 운행한다고 했다. 나는 낙담한 채 가까운 섬으로 가는 배표를 달라고 하니까 시간이 늦어 그날 배는 모두 끊겼다고 하여 별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돌산대교에서 바라본 여수항. 세계 미항 가운데 하나로 손색이 없다.
 돌산대교에서 바라본 여수항. 세계 미항 가운데 하나로 손색이 없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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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이에도 외가를 갑니까?"

그 순간 나는 어머니가, 어머니가 자란 외가 마을이 떠올랐다. 여수여객터미널 의자에 앉아 손 전화를 누르자 외가를 지키는 외사촌 형수님이 받았다.

"어서 오이소."

나는 곧장 여수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거기서 대구행 버스를, 대구에서  다시 구미행 버스를. 구미에서 다시 김천행 버스를 타고 내린 뒤, 택시를 타자 그새 밤 9시가 넘었다. 기사는 마침 내 외가 동산리마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컴컴한 시골 길을 달리면서 나에게 물었다.

"어르신 올해 춘추가 어떻게 되십니까?"
"일흔이오."
"이 늦은 밤에 어딜 가십니까?"
"외가에 가오."
"네에? 그 나이에도 외가를 갑니까?"
"그렇소. 나는 평생 외가를 다녔소. 한 치 앞을 모르지만 근데 이번은 마지막 길 같은 예감이 드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이튿날 아침, 식전에 외조부모, 외삼촌 내외분의 무덤에 두 번 절을 드렸다. 그분들은 막내 딸, 막내동생의 맏아들에게 끔찍한 사랑을 베푸셨다. 외사촌 형님 내외분과 아침밥을 먹은 뒤 곧장 귀갓길에 올랐다. 나의 휴식은 2박 3일로 끝났고, 이제 나는 다시 새 일감을 준비 중이다.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다. 그런데 세월이, 건강이 허락해 줄지 의문이다. 설사 그 일을 다하지 못하더라도, 이제까지라도 일할 수 있게 건강과 세월을 허락해 준 하늘에 감사를 드린다.

1971년 교사 초년 시절 외가 감나무 아래에서 외삼촌 내외분과 함께(이태원 외삼촌은 참 농사꾼으로 4.19 후 민선 어모면장을 역임하셨다).
 1971년 교사 초년 시절 외가 감나무 아래에서 외삼촌 내외분과 함께(이태원 외삼촌은 참 농사꾼으로 4.19 후 민선 어모면장을 역임하셨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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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스승의 무덤, #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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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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