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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거 무슨 냄새야?"

고등학생 첫째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한 말이다.

"어, 엄마가 오늘 사고 쳐서 그래."

나는 사고 뒤처리로 힘들어서 벌러덩 누워 있었다.

빨래 하나 때문에 온 집안이 '난리'

'아차차, 삶을 빨래를 가스 불 위에 올려놨었지. 그런데 내가 그걸 내려놨나?'
 '아차차, 삶을 빨래를 가스 불 위에 올려놨었지. 그런데 내가 그걸 내려놨나?'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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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12시 30분쯤, 나는 창밖을 내다봤다. '어, 비 오네, 막내 우산 안 가져갔는데….' 그 시각은 초등학교 1학년 막내 아이 수업이 끝날 때였다. 아이가 비를 맞게 되면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 걱정이 됐다. 우산을 옆에 끼고 후다닥 집을 나섰다. 학교 현관 앞에서 아이를 기다렸다. 10분쯤 지났을까. 막내가 나왔다. 아이랑 두런두런 '오늘 무엇을 배웠니' '학교는 재미있었니' 물으며 집에 왔다.

현관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는데 이상한 냄새가 났다. 빨래 삶은 냄새였다. '어, 누구네 집 빨래 삶나?' 문을 열었다. 그런데 빨래 삶은 냄새가 온 집안에 꽉 차 있었다. 헉…. 그제야 생각이 났다.

'아차차, 삶을 빨래를 가스 불 위에 올려놨었지. 그런데 내가 그걸 내려놨나?'

기억이 안 났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방으로 갔다. 다행히 가스 불은 꺼져 있었다. 하지만 가스 밸브는 열린 채 그대로였다. 비눗물이 흘러넘치면서 가스 불만 꺼진 모양이었다.

그런데 발이 축축했다. 이런, 주방 바닥이 뿌연 비눗물로 흥건했다. 꽤 많은 물이 흘러넘쳤나 보다. 그 작은 그릇에서 무슨 물이 이렇게 많이 흘러넘친 걸까?

"엄마, 불이 안 켜져."

뒤따라 온 막내가 거실등이 안 들어온다고 말했다. 가스오븐레인지로 비눗물이 넘치면서 전자기기에까지 물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전선에 물이 흐르니 누전차단기가 떨어졌고, 가스오븐레인지에서는 계속해서 물이 떨어졌다. 걸레로 바닥을 닦고 휴지를 돌돌 말아 가스오븐레인지의 구멍으로 넣어 안에 들어간 물을 빼냈다. 오븐기 문도 열어뒀다. 내부에 들어간 물을 말리기 위해서였다.

한 시간을 꼬빡 그리했을까? 어느 정도 물이 빠진 것 같아서 누전차단기를 올렸다. '지지직~' 소리가 나더니 누전차단기가 다시 떨어졌다. 아직도 물이 많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구멍에 헝겊을 밀어 넣고 계속 물기를 닦았다. 허리 구부린 자세로 단순 작업만 하려니 허리가 아팠다. 왜 이렇게 한심한 짓을 하고 있을까? 아마 남편이 알면 한동안 잔소리가 이어질 게다. 아이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남편에게는 비밀로 해야겠다.

친정엄마도 내가 이런 사고를 친 걸 아시면 얼마나 깜짝 놀라실까? 아이 셋이랑 매일 콩닥거리며 종종거리는 나를 위해 엄마는 가스 자동잠금장치까지 사 주셨다. 한동안 설치해서 잘 쓰곤 했다. 그런데 설치하고 한두 달 뒤 "삐삐삐삐~" 소기가 계속 났다. 너무 시끄러워서 자동 잠금장치를 중간밸브에서 제거했다. 새로 구입해야 했는데 게으른 탓에 그냥 지내다가 결국 이 사달이 난 거다. 물론 집에 있으면서 가스 불을 끄는 것을 잊어 냄비를 조금 태운, 그런 작은 일은 몇 차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누전차단기까지 떨어진 일은 없었다.

보리차 때문에 택시 타고 급히 집으로

엄마는 이모 집에서 물도 못 마시고 '튀어나왔다'. 엄마는 신림동 이모네 집에서 해방촌까지 택시로 달렸다.
 엄마는 이모 집에서 물도 못 마시고 '튀어나왔다'. 엄마는 신림동 이모네 집에서 해방촌까지 택시로 달렸다.
ⓒ free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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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 친정엄마는 더 심각한 사고를 친 적도 있다. 30년 전쯤, 내가 한참 학교에 다닐 때 일이다. 엄마는 남산 아래 첫 동네 해방촌에서 문방구를 하셨다. 한여름 신림동에 사는 이모가 '열무김치 담가 놨으니 가지러 오라'고 전화를 했다. 엄마는 해방촌에서 남영동까지 걸어간 뒤 남영동에서 버스를 타고 신림동 이모네로 갔다. 이모가 한여름 더위에 지친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언니, 잠깐 있어 봐, 내가 시원한 보리차 꺼내 줄게."

땀을 닦던 엄마는 '보리차'라는 말에 가스 불 위에 올려놓은 보리차 주전자가 생각이 났단다.

"가만있어 봐. 나 가스 위에 주전자 올려놓고 왔어."

엄마는 이모 집에서 물도 못 마시고 '튀어나왔다'. 엄마가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택시가 오더란다. 엄마가 전해준 말은 이랬다.

"진짜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그 택시를 탔는데, 한 번도 신호등에 안 걸리는 거야. 그냥 쉬지도 않고 집에까지 한 번에 왔다니까. 신기한 일이지! 진짜 누가 도와줬으니까 그런 일이 생기지 어떻게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있었는지 몰라.

나는 한강 다리를 건너면서부터 남산만 쳐다보는 거야. 우리 집에 불이 났는지 걱정이 되니까. 남산타워만 바라봤어. 연기가 올라가나. 우리 집은 문방구였지, 우리 바로 옆집은 목공소였지…. 아주 불에 잘 타는 종이랑 나무가 있으니 얼마나 위험해. 집에 딱 도착해서 내가 택시에서 내리는데 아저씨가 '아줌마, 택시비요'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잠깐만요, 가스 불 좀 끄고요'라고 올라갔지.

2층에 올라가서 부엌문을 여는데 연기가 아주 꽉 찬 거야. 그래서 가스 불을 끄고 내가 주전자를 열어보니까 진짜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물이 딱 한 방울 남아 있었어. 그것도 뚜껑 수증기가 주전자 바닥에 떨어진 거야. 그때 내가 집에 조금만 늦게 도착했어도 우리 집을 홀라당 다 태워 버릴 뻔했지. 우리 집뿐이냐 옆집 목공소까지…. 아이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엄마는 조상님의 은덕으로 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조상님의 도움이 아니라면 그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냐고 했다. 이모가 보리차를 준 것도, 이모 집을 나서자마자 택시가 온 것도, 택시가 신림동에서 해방촌에 오기까지 신호에 한 번 안 걸린 것도 모두 조상님의 보살핌으로 가능한 일이라 했다.

엄마가 해주신 우리 집의 옛날이야기는 항상 조상님의 은덕에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나와 남편, 우리 아이들이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것도 돌아가신 시어머님이 하늘에서 돌봐주시기 때문이라고 항상 말씀하셨다.

"아빠에게는 비밀"... 아들, 고맙데이

이번에 내가 친 사고도 시어머님의 보살핌 덕분에 이 정도에서 마무리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나마 빨래를 삶은 것이라 물이 금방 넘쳤던 것도 그래서 가스 불이 자동으로 꺼진 것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허리를 구부려 가스오븐레인지의 물을 찍어내는 것을 그만두고 누전차단기를 올렸다. 가스오븐레인지에서는 '지지직' 소리가 났지만, 누전차단기는 다시 떨어지지 않았다.

첫째에게 내가 친 사고가 무엇이었는지 설명을 마치고 한 마디 덧붙였다.

"가스오븐레인지에 들어간 물 닦아 내느라 엄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들…. 부탁이 있는데 아빠한테는 말하지 마라. 아빠가 알았다간 큰일 난다."
"당근이지."

안전문제에서는 꼼꼼한 남편 성격을 잘 아는 아들이 씩 웃는다. 아드님, 고맙데이.


태그:#건망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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