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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장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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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운과 혁련지는 모닥불 곁에 앉았다.

혁련지가 잔가지를 한 움큼 집어 불속에 집어넣었다. 불길이 확 일었다. 주위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관조운이 수조의 문에서 널빤지 하나를 떼어내 조각을 낸 다음 불 속에 던졌다. 불길이 춤을 추며 환해졌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말없이 모닥불만 바라보았다.

"미안해……, 사매."

관조운이 불꽃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나직이 말했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죠?"
혁련지 역시 불꽃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 때문에 쫓기는 몸이 되었잖아. 사매 염업(鹽業)도 내팽개치고……."

"저에게 사부님은 부모님이나 마찬가지에요. 사부님의 유지(遺志)는 곧 제 부모님의 유지라고 할 수 있어요. 사부님은 무극진경의 공개가 가져올 강호의 파장을 경계하셨어요.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욕심을 내는 진경이 사악한 세력들의 손에 들어갈까봐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마음을 못 놓으신 거죠. 이런 사부님의 유지를 제자인 우리가 받들지 않으면 누가 받들겠어요."

모닥불에 달아오른 혁련지의 얼굴이 발가스름해졌다.

관조운은 입술이 말랐다. 반점에서 사온 여아홍(女兒紅)을 한 모금 들이켰다. 속이 더욱 타들어갔다. 관조운이 널빤지 조각을 집어 불 속에 넣자 혁련지가 도로 빼낸다. 먹이를 빼앗긴 불꽃이 억울하다는 듯 앙탈해보지만 기운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풀죽은 불길이 조금씩 사그라졌다. 이 틈을 타 어둠이 한 발자국 성큼 다가왔다.

남과 여의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눈에 담겨 있던 타는 열망과 여자의 눈에 어려 있던 아련한 갈망이 서로 교차했다. 서로의 것을 각자의 것에 담기를 소망했다.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았다. 손 안에 있는 손과, 손 밖에 있는 손이 각자의 열기를 전달했다. 손은 불을 쥔 듯 뜨거웠다. 잠시 후 남자의 손이 여자의 얼굴을 감쌌다. 여자가 눈을 감았다. 처마 끝처럼 살짝 올라간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남자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뜨거운 입김이 나왔다. 여자의 입술이 꽃잎처럼 흔들렸다. 남자의 입술이 여자의 입술에 닿자 호흡이 멎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동시에 숨을 내쉰 남녀는 각자 상대의 숨을 들이마셨다. 입술과 입술은 사개처럼 맞물려 떨어질 줄 몰랐다. 두루미가 장송(長松)에 앉듯 어느새 여자는 남자의 너른 품안에 안겨 있다. 먹이에 주린 모닥불이 마지막 발악을 하듯 치지직 거리며 용심을 부려 보았지만, 남녀는 아랑곳 않고 각자의 가슴에 타오른 불꽃에 서로를 태우기 바빴다. 어둠은 이빨을 감추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북녘 하늘 운부산 위로 게으른 달이 고개를 내밀다가 남녀를 보자 얼른 구름을 불러들였다. 사위는 캄캄해졌다.

조복의 비첩은 의외로 쓸 만했다. 동문(東門)의 관졸들에게 비첩을 내밀자 졸개 하나가 급히 막사로 뛰어가 늙수그레한 속리(屬吏)를 데려왔다. 복장을 보아하니 수문장은 아니고 차역(差役) 정도 될 것 같다. 수문장은 보나마나 보따리장수 하나 조져 뜯어낸 돈으로 어디 가서 낮술 한 잔 걸치고 있을 것이다. 차역이 뒤가 급한 사람처럼 엉거주춤 양손을 맞잡고 굽실거리며 수문장의 행방을 둘러댔다. 저기 저, 성곽 순찰을 갔읍죠. 헤헤. 금의위 기가 꽂힌 마차를 본 적이 있냐니까, 엉뚱한 답을 한다. 다시 물으니 답을 못하고 자기 밑에 있는 정용(丁庸)을 데려온다.

정용은 문을 지켜보는 자이다. 수많은 마차와 수레와 사람들이 드나드는 성문을 정용 혼자서 일일이 순검(巡檢)한다는 건 밥알의 숫자를 세면서 먹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얼어붙은 동태눈을 해가지고서는 보아도 보지 않는 것 같고, 안 보아도 보는 것 같은 눈길로 시간만 때우는 자들이다. 정용에게 금의위 기를 꽂은 수조마차가 지나간 적이 있느냐고 또 물었다.

정용의 눈이 해동된 동태 눈깔처럼 약간 흔들리더니 아, 하고 반색을 한다. 미시(未時) 초쯤 수조를 실은 마차가 지나 갔읍죠. 소인이 기억하기론 금(金)자인지 뭔 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둥그런 원 안에 글자가 새겨진 깃발이 꽂혀 있는 건 확실히 보았습죠. 순간적으루 저건 또 뭔가 싶다가, 수조 실은 마차가 별 거 있으랴 싶어 그냥 보냈읍죠. 근데 저, 그기 뭐 잘못되기라도…… 저희 동문은 개봉으루 가는 길목이라 마차가 하루에 수백 대는 지나갑죠. 그런 가운데……. 딴에는 근무에 소홀함이 없다는 듯 열심히 설명하는 정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영객은 말에 올라타 뒤꿈치로 말의 뱃구레를 힘차게 찼다.

갑자기 얻어맞은 한혈마는 히힝,하는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사납게 달려나갔다. 늙은 정용은 금의윈지 금딱지인지, 어느 높은 부서에서 온 나으린지 모르겠지만, 일단 상황을 무사히 넘긴 것에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모르게 둘러대 위기를 모면한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다행이었다. 높은 놈들이 괜한 걸루 꼬투리 잡고 닦달하기 시작하면, 수문장 이하 모두 경(黥)을 칠 수도 있다. 어찌 그리 거짓말이 술술 나오던지, 이놈의 조동아리, 처먹을 때만 필요한 줄 알았더니 급할 땐 나름대로 쓸모가 있네 그려. 정용은 자기 주둥이를 살살 쓰다듬었다. 나중이야 어찌 될 갑세 당장은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삼거리가 나오자 무영객은 객잔과 반점을 훑어보았다. 가운데 있는 빈관(賓館)부터 시작했으나 오래 가진 않았다. 겨우 세 번째 반점에서 필요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어린 점소이는 관조운 일당에 관한 모든 걸 알려주었다. "운부산 가는 방향을 묻길래, 왼쪽 길로 가서는……," 점소이는 일행이 옷을 갈아입고 간 것까지 말해주었다. 무영객은 점소이에게 동전 두 닢을 던져주었다. 어디에서든지 점소이들은 훌륭한 정보원이다. 그들은 동전 몇 닢이면 자신들이 본 모든 걸 말해준다.

벌써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한혈마의 속도로 볼 때 해지기 전까지 운부산 입구에 도착할 순 있겠지만 한 밤중에 산길을 타는 건 무모하다. 관조운 일당이 드넓은 운부산의 어느 쪽으로 갈 건지 알 수 없는 입장에서 미리 앞지를 수도 없다. 게다가 한 밤중에 달리는 말발굽소리는 몇 십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다. 관가 놈 일행의 경계심을 자극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최선의 방법은 그들을 먼저 찾아낸 후 뒤를 쫓다가 운부산의 어느 한 곳에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사실 은근히 마음 쓰이는 게 담곤이다. 관조운이야 서생이니까 신경 쓸 거 없고, 같이 있는 혁련지라는 계집은 무예를 익힌 것 같긴 한데, 자신에게 칼을 맞은 미련곰탱이의 보호를 받고 있다면 그다지 염려할 건 못 된다. 그러나 담곤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비록 비룡문에서 손을 떼고 표국 일에 전념하고 있다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비천사운의 하나이고 태허진인의 제자이다. 그의 무공이 어디까지일지 가늠할 순 없지만 기습해서 그의 명줄을 끊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 자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담곤의 목숨이 목표가 아니라 서생 놈에게서 무극진경과 관련한 모충연의 유언을 캐내야 하는 것이다. 표적을 제거하는 것보다 몇 배 어려운 게 표적의 심중에 들어 있는 생각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표적을 완벽하게 제압해야 한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정신을 제압하려면 공포 밖에 없다. 사람은 극단의 공포에 처하면 속에 있는 무엇이든 다 분다. 심지어 공포를 지배하는 자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있지도 않은 사실까지 가공한다. 그래서 공포도 잘 조절해서 사용해야 한다. 잘 쓰면 약이지만 잘못 쓰면 독이 되기도 한다.

무영객은 이런저런 생각 끝에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한혈마의 속도로 볼 때 이제 관조운 일행과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도 한밤중에 달리는 건 자신을 노출시킬 염려가 있다. 그들이 움직일 때 자신도 움직여야 한다. 마차를 몰면 자신의 말굽소리도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마차를 계속 타고 간다면 마차가 다닐 만한 넓은 길을 갈 것이고, 더 이상 마차가 다닐 수 없는 길이라면 마차는 버려져 있거나 은폐되어 있을 것이다. 마차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많은 관도는 일단 제외하고 운부산 산중에 들어 갈 때까지 미행했다가 적당한 곳에서 계획대로 하는 것이다. 담곤의 무공 수위를 모르는 입장에서 무작정 길을 막고 싸우는 건 미련한 짓이다.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고는 기회를 노려 담곤을 먼저 제압해야 한다. 

무영객은 야영을 준비했다. 조용히 흐르는 천(川) 가의 모래밭에 자리를 잡자 한혈마도 다리를 접고 앉았다. 그는 안장 뒤편에 둥그렇게 말려 있는 밧줄을 확인하고는 한혈마의 엉덩이에 반쯤 기대고 누웠다. 멀리 검은 병풍처럼 둘러쳐진 운부산이 보였다. 그 위로 구름에 가려진 달이 뽀얗게 달무리를 내뿜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월, 목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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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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