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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물정 모르고 무턱대고 들어간 회사에서 쥐꼬리 반토막 같은 연봉을 받다가 도저히 생활이 되지 않아 사직서를 쓰려고 할 때 주위에서 그랬다.

"지금 들어갈 수 있는 덴 영업직밖에 없을 거야."

하지만 난 영업직에 도전했다. 왜 그랬을까? 적성도 취미도 근성에도 맞지 않았는데 말이다. 모르겠다. 아마도 젊은 혈기나 자기 세뇌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초반에는 등장인물이 많고 낯선 명칭들이 많아 머리속에 그림을 그리기가 쉽지 않았다.
▲ 블루게이트 초반에는 등장인물이 많고 낯선 명칭들이 많아 머리속에 그림을 그리기가 쉽지 않았다.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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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직으로 들어간 제약회사에서 엉뚱하게도 마케팅 일을 맡게 되었다. 영업이나 마케팅이나 전공서적 한 번 들쳐보지 않았고 어깨 너머로도 쳐다보지 않아 아는 게 없었고 오리무중에 막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하는 일에 지식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거다. 죄다 몸으로 때우는 지저분한 일들이었다. 내 일은 환하고 밝은 병원 형광등 아래에서 거짓웃음으로 시작해 대부분 악취가 풍기는 술집 뒷골목 어디쯤에서 끝났다.

회사생활 초기에는 정의로움과 사람다움에 대한 고민도 있었지만 점점 세상물정이란 걸 알게 되고 큰 저항없이 그 추함에 물들어갔다. 제법 잘 물들었는지 몇 년은 별 걱정이나 반성없이 늘어가는 저축과 굴러다니는 소주병으로 즐거웠다.

그러다 제약업계 전체가 들썩인 적이 있다. 영업사원들이 리베이트를 이유로 구속되고 신문과 방송에서는 연일 제약회사와 병원의 검은 거래 운운하며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열을 올렸다. 당시에는 회사를 출근하는 건지 범죄단체에 들락거리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회사는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정신없이 돌아갔다. 누구나 출입할 수 있던 출입구에 카드인식기를 달아 출입을 통제하고 노트북 하드를 잘 관리하라고 닦달했으며 보안 USB라는 걸 개인마다 나누어 주기도 했다. 생각없이 끼적인 낙서가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수첩은 버리라고 했고 종이 서류는 특정 부서에 보관하거나 아예 만들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러고도 하루에도 몇 차례씩 책상정리를 다시 하는 날들이 반복됐다.

어느 날인가 출근을 하는데 회사 출입구에 방송국 중계차량과 마이크를 들고 스탠딩 뉴스를 찍고 있는 기자들이 보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드디어 터질 게 터졌구나. 출입구로 종종 걸음을 치면서도 주변을 살폈다. 자칫 내가 연 문으로 기자들이라도 들이닥치면 내가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모르므로 문 여는 타이밍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 출입구에 진을 친 기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에 올라와보니 어수선하다. 말단 직원들은 자기 책상서랍을 뒤적이느라 누가 물어도 대꾸도 하지 않고 팀장들은 상황을 파악하느라 어딘가로 전화를 해 댔다. 괜히 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평소에 반복하던 서류 정리를 재빠르게 하는 것뿐이었다. 어제도 솎아냈던 서류철을 다시 뒤적이고 있는데 대피명령이 떨어졌다. 괜히 앉아 있다가 당황해서 엉뚱한 말 흘리지 말고 차라리 사무실을 비우라는 지시였다.

다행히 그날의 일은 같은 건물에 입주한 다른 업체 때문에 벌어진 것으로 파악돼 큰 탈없이 지나갔지만 그 사건 이후로 정기적인 서류 파쇄 및 대피 훈련까지 시행해야했다.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급기야 노트북 하드를 말끔히 지우고 그 어떤 파일도 남기지 말라는 지시까지 내려왔다. 그 때 누군가 "이러면 너무 티나지 않나요?"라고 했는데 말하기 좋아하는 이사의 말은 이랬다.

'야, 상관없어. 우리가 없애고 가린다고 걔들이 모르겠냐. 어차피 위에서 적당히 까주고 딜하고 마무리 짓는 거야. 너희는 시키는 대로나 잘 해.'

아니, 그럴 거면 이 고생은 다 뭐가 싶었지만 윗분들 심사를 알 길이 있나. 그저 하란대로 하랄 밖에. 그게 월급 받는 값 아니겠는가.

하지만 내 속은 갈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속한 회사가 원래 청렴과 결백을 내세우는 도덕군자들의 모임이 아닌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우리를 어떤 눈으로 쳐다보는지 분명해지고 그 시선이 날카로워지자 급격하게 두려워졌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도대체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뭔지 신입사원 때보다 더 모르게 되었다. 표지판 하나 보이지 않는 검은 밤의 시골길에 덩그러니 내팽개쳐진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이러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도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건가? 퇴직금도 못 받고 쫓겨나지는 않겠지? 다른 데 갈 데는 있나?

매일 질문을 해 보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영업직으로 발령이 났고 옮긴 부서에서 반년을 더 뭉개다 회사를 그만두었다.

<블루게이트>를 읽고 있자니 사이즈가 다르고 일의 성격은 다르지만 내 회사생활과 어찌 그리 닮았는지 깜짝 놀랐다. 특히 그 파일 지우는 프로그램, 나도 꽤 많이 돌려봐서 아는데 하드뿐만 아니라 컴퓨터 자체를 망가뜨려놔서 몇 번을 수리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어디든 시궁창은 존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다른 시궁창으로 옮겨가는 것뿐인 걸까?


블루게이트 - 불법 사찰 증거인멸에 휘말린 장진수의 최후 고백

장진수 지음, 오마이북(2014)


태그:#블루게이트,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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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기업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려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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