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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16일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http://www.nationaltrust.or.kr) 회원들과 함께 강화도, 교동도의 근대문화유산을 둘러보는 답사를 다녀왔다. 이번 답사는 강화지역의 문화재 보존과 활용에 대한 간략한 강의와 답사를 통한 체험 프로그램으로, 매년 7~8회 정도 연례적으로 진행되는 회원 및 일반 시민들을 위한 행사다.

한국에서는 아직 내셔널트러스트라고 하면 생소한 사람들도 많겠지만, 내셔널트러스트는 지난 1895년 영국에서 시작된 자연보호와 근대문화유산보존을 위해 설립된 전통 있는 시민단체다.

이 단체는 보존가치가 있는 자연이나 역사 건축물과 환경을 기부금, 기증, 유언 등으로 취득하여 이것을 보전, 유지, 관리, 공개함으로써 차세대에게 물려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회화나무
▲ 강화읍 회화나무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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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00년에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발족했다.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설립(주무관청 환경부) 직후 멸종위기 식물인 매화마름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인천 강화군 길상면의 농지 912평을 매입했으며, 이후 서울 성북동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옛집을 매입했다.

또한 2004년 남한강 상류의 동강 보전을 위해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제장마을의 땅 5200평을 매입했다. 이후에도 '나주 도래마을 옛집' '권진규 아틀리에' '연천 DMZ 일원 임야' '청주 원흥이 방죽 두꺼비 서식지' '내성천 범람원'을 확보하여 시민유산으로 보전관리하고 있다.

2004년 최순우 옛집을 시민들에 개방하면서 문화유산의 전문적인 관리 운영 및 모금을 위한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이 설립(주무관청 문화재청)되었다. 지금 재단법인은 '최순우 옛집' '나주 도래마을 옛집' '권진규 아틀리에' '원서동 고희동 가옥' 등을 소유 혹은 운영, 관리하고 있다.

대성전
▲ 강화향교 대성전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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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15일 아침 9시 대학로에 집결하여 버스를 타고, 강화도로 향했다. 삼일 연휴라 차가 조금 밀리기는 했지만, 별다른 막힘없이 예정대로 강화읍에 도착하여 우선 '강화향교(江華鄕校)'로 갔다. 무더위에도 향교의 장의(掌議) 선생이 직접 나와서 안내를 해 주었다. 

지난 1995년 인천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강화향교는 고려시대인 1127년(인종 5)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1731년(영조 7)에 강화유수 유척기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무·서무·제기고·주방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 송조6현, 우리의 18현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현재 강화향교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을 봉행하고 초하루에 분향을 하며, 전교와 장의가 운영을 맡고 있다. 고려의 39년 임시 수도답게 강화향교는 현재 강화군의 모습보다는 크고 웅장했다. 장의 선생이 구체적으로 대성전 안쪽의 위폐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어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

은수물
▲ 강화읍 은수물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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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향교 서쪽에 있는 '은수물'로 갔다. 향교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곳으로 오랫동안 지역 여인들의 빨래터로 쓰이던 곳이다. 물도 맑고 시원하여 목을 축이기도 좋았다. 하지만 현재는 인근에 강화여고 기숙사가 신축되어 물줄기가 지대가 낮은 쪽으로 바뀌는 바람에 약수터에 거의 물이 말라 있었다.

주위가 개발되면서 여인들의 사랑방이 사라진 듯하여 마음이 아팠다. 이어 일행은 이웃한 '고려궁지(高麗宮址)'로 갔다. 사실 현재의 터는 원래 고려시대에 비해 규모도 상당히 작고, 고려의 건물은 하나도 없는 조선 동헌이라고 보면 되는 곳이다.

원래 이곳은 1232년(고려 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를 강화로 옮긴 후 1270년(원종 11) 화의를 맺고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 동안의 왕궁 터이다. 고려시대의 유물은 건물 기단과 3단으로 된 돌계단만이 일부 남아있다.

고려궁지
▲ 강화읍 고려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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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하시는 분에게 물어보니"원래 규모는 개성의 궁궐과 비슷했고, 내부에 여러 관청도 있었지만, 환도 이후 몽골군에 의해 거의 파괴되어 현재로서는 자료가 없다고 보면 된다"면서 "아쉽게도 강화도 전체에 고려의 유물이나 유적 역시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며 안타까워했다.

나도 마음이 아팠다. 고려의 39년 수도라서 고려의 유적이 많은 줄 알았는데, 찾아볼 수 없다는 말에 약간의 충격을 받아 머리를 아프게 했다.

이어 '외규장각(外奎章閣)'이다. 1782년 조선의 정조 대왕이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으로,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 역할을 하였다.

외규장각
▲ 강화읍 외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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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 이후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를 비롯해 총 1000여 권의 서적을 보관하였으나,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297권의 왕실의 주요행사를 기록한 의궤 191종 297책을 포함한 도서 359점을 약탈했다. 나머지는 불에 타 없어졌다.

1975년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촉탁 직원으로 일하던 박병선 박사가 도서관에 조선시대의 도서가 보관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목록을 정리하여 그 존재가 한국에 알려졌다. 서울대는 1991년에 정부에 도서 191종 279권의 반환 추진을 요청하였고 1992년에 정부는 외규장각 도서목록을 프랑스에 전하여 도서반환을 요청했다.

드디어 2010년 11월 G20정상회의에서 한국, 프랑스 대통령 간에 외규장각 도서를 5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임대형식으로 대여하기로 합의하였고, 2011년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나는 박병선 박사님의 노력에 잠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는 안팎을 살펴보고 나왔다.

궁지 내부에 생각보다 아름답고 큰 고목이 많음에 놀랐고, 좌측 구석에 450년 된 회화나무가 멋스럽게 자라고 있어, 한번 안아보고는 소원을 빌기도 했다. 이어 아래로 내려와 '강화동종'을 보았다.

강화동종
▲ 강화읍 강화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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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품의 동종은 인근 고인돌공원에 있고, 이곳에 있는 것은 복제본이라고 한다. 원래 동종은 고려시대 입화형(立花形)의 퇴화형식으로 조선시대인 1711년(숙종 37)에 만든 것이다.

전통적인 종 형태에서 벗어나 횡대를 두른 이례적 형식을 취하였고, 어깨부분의 입화장식이 퇴화된 점, 유곽이 어깨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점, 용뉴에 음관(音管)이 없는 점 등이 특징이다. 당일은 광복절이라 강화군수 이하 직원 및 관계자들이 동종 타종행사를 하고 있어 잠시 구경을 했다.

아래의 일반적인 동헌보다는 무척 규모가 큰 '이방청'을 살펴본 다음, 외부로 나와 바로 우측에 천주교 '강화성당(江華聖堂)'으로 갔다. 조선시대에는 해상경비 임무를 맡았던 진무영의 군영이었고, 이후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장이 되기도 했던 곳이다. 강화에 천주교는 1839년 기해박해 무렵부터 본격적인 포교가 시작되었다.

강화성당은 지난 1958년 김포 본당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다. 조선시대 말, 두 번의 천주교 박해기에 이미 강화도에는 여러 명의 순교자들이 있었다. 이후 충청도에서 이주해온 몇 명의 신자들에 의해 전교가 활발해지면서 대산리·부근리·온수리에 공소가 설립되었다.

강화성당
▲ 강화읍 강화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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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에 '진무영 순교성지 역사관' '진무영성지 야외제대' '성모 성심상' 등이 있다. 본당 건물은 참 멋스러웠다. 때마침 교황이 한국에 와서 성당이 더 멋스러워 보이고 좋다. 이어 한참을 걸어 이동한 곳은 '성공회강화성당(聖公會江華聖堂)'이다.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코프에 의하여 1900년(광무 4)에 건립된 멋진 한옥건물이다.

성공회가 한국인에게 처음 세례를 베푼 것은 1896년 강화에서였다. 성공회에서는 이러한 인연으로 강화에 제일 먼저 성당을 건립한 것인데, 현존하는 한옥 교회건물로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서유럽의 바실리카(Basilica)양식과 동양의 불교사찰양식을 조합시켜 건립하였다.

교회의 내부공간은 바실리카양식을 따랐고, 외관 및 외부공간은 불교사찰의 형태를 따랐다. 목재는 백두산의 참나무를 압록강을 통해 운반해다가 사용하였으며,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목수들이 건축을 맡았다. 그래서 그런지 지둥의 크기나 모양이 대단히 웅장했고, 일반 관람객의 가슴을 누르는 듯한 기상이 엿보였다.

성공회강화성당
▲ 강화 성공회강화성당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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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지의 대지에 배 모양 비슷하게 축성하여 입구 계단, 외삼문·내삼문·성당·사제관을 동남향 종축으로 배치한 외부공간의 구성이 불교사찰의 구릉지가람과 비슷하며, 성당 앞마당에는 큰 보리수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외삼문 솟을대문은 팔작지붕으로 담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 칸에는 초대 사제의 묘비가 서 있다. 내삼문은 평대문에 역시 팔작지붕이고, 서쪽 칸은 종각으로 쓰이고 있으며, 성당은 정면 4칸, 측면 10칸의 바실리카식 평면구성이다.

강화성당 내부, 백두산에서 가져온 나무가 참 멋스럽다
▲ 강화성당 강화성당 내부, 백두산에서 가져온 나무가 참 멋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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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외부에는 서양식 장식이 거의 없는 순수한 한식 목조건축이면서도 교회기능에 충실한 내부공간을 연출함으로써,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가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 역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성당건물이다.

언덕 위에 지어진 성당은 뒤편의 사제관과 함께 강화읍을 조망하기에 좋은 터라 성공회의 위상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강화에는 감리교와 함께 성공회가 주요 종교 중에 하나이다.


태그:#강화도, #한국내셔널트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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