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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26세로 고졸이며 무역상사 영업팀 계약직. 이건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미생>(tvN, 금토 방영)의 주인공 장그래의 프로필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직장동료들이 알지 못하는 과거가 있다. 그는 한 때 바둑기사가 되겠다는 꿈에 인생을 걸었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 언뜻 보기에 평범하지 않은 그. 하지만 사실 한 때 꿈에 인생을 걸어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 있을까. 나도 장그래처럼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제대로 된 상패도 상장도 없어 그때를 추억하기 위해서는 친구들이 써준 롤링 페이퍼나 편지를 들춰보는 방법밖에는 없다.
 제대로 된 상패도 상장도 없어 그때를 추억하기 위해서는 친구들이 써준 롤링 페이퍼나 편지를 들춰보는 방법밖에는 없다.
ⓒ 최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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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나의 꿈은 '댄스가수'였다. 허황되고 철없어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제법 진지했다. 처음 춤을 추게 된 때는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소풍을 가던 버스 안에서 흘러나오던 노래에 박자를 맞추던 내 모습을 보고 담임선생님은 춤을 춰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셨다.

"네?"

그게 시작이었다. 농담일지도 모르는 말에 내 인생이 180도 바뀌게 된 게. 태어나 춤을 춰본 적이 없던 나는 음악 프로그램을 챙겨보며 안무를 따라하고 연습해 교내대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리키 마틴 그리고 박지윤까지. 인기 있는 가수의 안무는 모두 따라했다.

"나 장기자랑 나가고 싶은데 추천 좀 해줘."

완전히 다른 학군으로 배정 받은 고등학교에서의 첫 수련회. 장기자랑을 한다는데 나는 선뜻 손을 들고 나설 자신이 없어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그렇게 준비한 무대로 1등을 하고 전교생 앞에서 축하를 받으며 나는 점점 춤에 빠져들었다.

트랙1. "돌아가고 싶은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니?"

사실 댄스 동아리의 멤버가 아니었던 내게 기회는 많지 않았다. 교내대회 혹은 축제 같은 곳이 내가 설 수 있는 무대의 전부였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최고의 순간을 떠올리면 긴장이 풀려."

이 조언을 듣고 난 후 나는 면접 때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섰던 무대를 떠올리곤 했다. 2년에 한 번씩 열려 인근의 학교의 학생들이 몰리던 큰 축제.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장기자랑이었다. 그래서 나는 두 달 동안 안무를 연습하고 노래를 편집하고 의상까지 미리 준비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건 무대 아래로 내려온 내게 찬조 출연을 하기 위해 왔던 다른 학교 학생이 엄지를 치켜 올렸다는 것. 그 날 나는 대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비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 위해 커트 머리를 한 보람이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입시를 준비하면서부터 춤을 출 기회가 깡그리 사라졌다. 일 년의 단 하루, 무대에 서는 날만을 기다리던 내게는 더없이 힘든 시간이었다.

"대학에만 가면 된다. 다 할 수 있어."

이 말 한마디에 모든 걸 참을 수 있었다. 나는 대학생이 되면 제일 먼저 정식으로 춤을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트랙2.  "나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지금은 소녀시대와 미스에이의 멤버로 유명한 효연과 민은 그 당시 내가 제일 다니고 싶었던 댄스학원의 연습생이었다. 그 둘이 춤을 춘 동영상은 인터넷을 떠돌아다녔고 결국 대형기획사에 캐스팅되면서 나의 선망의 대상이 됐다.

대학생이 되었지만 나는 꿈을 잊지 않았다. 재즈댄스를 배우면서 기본기를 익혔고 결국 그 유명한 댄스학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서울 마포구 신촌역 7번 출구를 지날 때면 마음이 쓰릴 때가 있다.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오가며 댄스가수의 꿈을 키웠다. 일 주일에 세 번은 춤을 배우고 한 번은 실용음악학원에 다니며 노래를 연습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이제껏 동네에서 칭찬을 받아온 나는 세상에 그렇게 춤을 잘 추는 사람이 많은 줄 몰랐다. 그리고 그 무리에서 나는 제일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나보다 서너 살이 어린 여자아이 한 명은 자기도 실은 늦은 거라고 했다.

"그래도 아빠가 전폭적으로 제 꿈을 밀어줘서 학원도 등록 시켜줬어요."

그 말을 들으니 서러움이 몰려왔다. 당시 댄스학원과 실용음악학원의 원비는 합쳐 한 달에 30만 원 정도였다. 그나마도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수강생을 위한 전문반의 원비보다는 훨씬 저렴한 편이었다.

"너 춤 배우는 거에 절대 못 보태줘. 정 하고 싶으면 네가 알아서 해."

나는 수강료와 차비를 내기 위해 각종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하지만 수업과 연습 때문에 시간이 없어 단기알바를 할 수밖에 없었다. 길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르바이트, 교통량을 체크하는 아르바이트, 입시 도우미 아르바이트, 시험 진행 보조아르바이트 등 할 수 있는 건 다해서 학원비를 마련해야 했다. 그러니 같이 수업을 듣는 수강생이 햄버거를 먹으러 가자고 해도 나는 늘 쏙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노력했지만 오디션에서는 번번이 떨어졌다. 공개 오디션에도 참가해 보고 데모 테이프도 만들고 이메일로 녹음파일도 보내봤지만 나를 연습생으로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2007년에 본 오디션을 끝으로 나는 꿈을 포기하기로 했다.

트랙3. "꿈을 사랑한 만큼 포기가 어렵다"

늘 포기하려 했지만 한 번만 더 해보자는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이번에는 진짜 못하겠다고 해놓고도 백화점이나 쇼핑몰에서 댄스공연을 하면 눈을 떼지 못했다. 허리가 아프다는 친구를 먼저 보내고도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직성이 풀렸다. 분명 이미 끝나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쉬움이 남았다.

"죽기 살기로 한 번만 더 해보자."

이번에는 부족한 노래실력을 키워보겠다고 혼자서 연습하기 시작했다. 갈 곳이 없어 비오는 날 운동장에서 한 손으로 우산을 받쳐가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시끄럽다는 말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연습도 했다. 안 되겠다 싶어서 궁여지책으로 빈 '프링글스' 통에 대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지나친 연습으로 성대결절이 왔고 나는 또 다시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후회나 아쉬움은 없었다. 해볼 만큼 다 해봤다는 생각이 들어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트랙4. "좋아하는 것을 하려면 싫어하는 것 10가지를 참아야 해"

춤은 참 이상했다. 내가 싫어하던 것들을 하게 만들었으니까. '컴맹'이라는 소리를 듣던 내가 공연곡을 만들기 위해 '골드웨이브'라는 프로그램으로 노래를 편집하고 쇼핑을 싫어하던 내가 무대의상을 만든다고 동대문시장을 찾아갔다. 꼼꼼함과 거리가 멀던 나였지만 공연 전에는 리허설을 수도 없이 했다. 특히 폭이 넓은 바지는 찢어질 수도 있어 몇 번이고 의상을 입은 채로 춤을 추고 또 춰야만 안심할 수 있었다.

빈 프링글스 통에 대고 노래를 연습할 만큼 나는 절박했다.
 빈 프링글스 통에 대고 노래를 연습할 만큼 나는 절박했다.
ⓒ 최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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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ro. "무엇이든 취해야 한다"

나는 <미생>의 열혈 시청자다. 본방송부터 재방송까지 챙겨본다. 그 이유는 앞에서 이미 말했듯 장그래와 과거의 내가 한없이 닮아 보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가장 괴로웠던 순간은 바로 더 이상을 춤을 추지 않겠다고 학원신발장에서 운동화를 챙겨 나오던 날이었다. 장그래가 바둑을 그만두겠다면서 짐을 모두 정리해서 나오던 날 그는 나와 같은 걸 느꼈을 것이다.

지금도 가끔 그 때를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도대체 왜 춤을 췄을까?"

하지만 그 질문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라서 하고 싶은 걸 지금 하지 않으면 영원히 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게 이뤄지든 안 이뤄지든 상관없이. 쓰라린 실패를 맛봤지만 그의 인생도 나의 인생도 끝나지 않았다. 드라마의 대사처럼 나는 그도 또 다른 무언가에 취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태그:#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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